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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매년 자두와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리는 과수원 앞에 차를 세웠다. 교통량이 제법인 곳에 있는 과수원은 봄부터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을 운전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하얀 자두꽃과 붉은 복사꽃이 있는 풍경을 펼쳐주다가, 어느새 열매가 달려서 과육을 불려가는 과수원의 한살이를 매년 보여 주던 곳이었다. 꽃이 필 때부터 나날이 커가는 자두와 복숭아에 눈독 들이던 운전자들은 가을이면 그 과수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복숭아 좀 주세요."
"읎슈. 팔게 읎슈."


어감이 달랐다. '품절'을 의미하는 '팔게 읎슈'가 아니었다. 팔 수 있는 물건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 '읎슈'였다.

"더 이상 하느님과 동업하기는 글렀슈"
 
추석 무렵 수확해서 팔아야 할 복숭아 나무에 열매가 없다. 올해의 날씨가 복숭아의 생육에 좋지 않았다.
▲ 텅빈 복숭아 밭 추석 무렵 수확해서 팔아야 할 복숭아 나무에 열매가 없다. 올해의 날씨가 복숭아의 생육에 좋지 않았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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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매시장으로 올릴 것도 없이 직거래로 운전자들에게 다 팔았던 자두와 복숭아인데, 올해는 상품성이 있는 물건을 한 박스도 건지지 못 했다고 과수원 주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올해 같은 날씬 첨 봤슈. 내년에도 날씨가 이러면 우리 과수원 농사는 포기해야유. 더 이상 하느님과 동업하기는 글렀슈. 계약 파기해야쥬."

농장주의 충청도식 유머가 밴 하느님과 동업 계약 파기 선언이었다. 오죽하면 계약서도 쓴 적 없는 하느님과 동업 계약 파기 선언부터 했을까. 농사는 하느님과 동업해야 한다고 농민들은 흔히 말한다. 그 정도로 날씨 변화와 밀접하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적절한 기온이 유지되고 자연재해 등의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야 안정된 수확을 거둘 수 있다.

'팔게 읎슈'라고 이미 달관한 듯이 말하는 농장주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오직 수확을 위해 가지치기하고 거름을 주고, 봄부터 가을까지 날씨가 과수나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정성을 들인 결과 앞에서 실망할 기력조차 잃은 것 같았다.
 
지금쯤 수확해서 한창 팔고 있어야 할 자두 나무에 자두가 없다.
▲ 자두가 붉게 익어가고 있어야 할 자두 밭 지금쯤 수확해서 한창 팔고 있어야 할 자두 나무에 자두가 없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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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틀렸슈. 3천만 원은 거뜬히 했는디 꽃부터 냉해를 입어서 배가 별루 없쟎유."

부여 외산면 배 재배 농가도 다르지 않았다. 봄에 과수에 꽃이 맺힐 시기에 된서리가 왔고 겨우 살아남은 꽃들이 열매로 성장할 즈음에는 비가 계속 내려서 일조량이 부족했다. 가물었다가 폭우가 되어 내린 비와 이어진 폭염은 과일에 단맛 대신 일소 현상(직사광선에 과육이 타서 갈색 반점이 생기거나 움푹 파이는 것)을 안겨주었다. 겨우 맺은 열매들마저 한여름 폭염으로 시험에 들게 하더니 하늘의 형벌처럼 내린 극한 호우가 그나마 싹쓸이해 버렸다.

멜론 농부가 남의 멜론을 사서 선물한 사연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를 과수 농가들은 온몸으로 겪고 있다. 올해 날씨는 최악이었다.

부여 규암면은 멜론과 수박, 사과 대추 재배 농가가 밀집해 있다. 백마강변에 둑을 쌓아 농토로 만든 규암면의 비옥하고 너른 갯벌 땅은 어떤 작물을 심어도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부여군이 농산물 공동 브랜드 '굿뜨래'로 지역을 알리고 품질 좋은 농산물 생산 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규암면 백마강변의 농경지와 멜론 덕분이었다.

그러나 백마강이 둑을 넘어 범람할 정도로 내린 극한 호우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절단 났슈. 아무 것도 읎슈. 매년 멜론 다섯 동을 심어서 팔기도 하고 내 인사치레도 하고 했는디유. 올해는 다른 데서 메론을 사서 추석 선물을 하고 있다니께유, 멜론 농사를 짓던 늠(농부)이 멜론을 사서 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남유."

올해는 부여뿐만이 아니라 전국 과수 농가들의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일조량이 필요한 시기에는 비가 내렸고 과육이 생장할 무렵에는 폭염과 집중 호우가 과수를 괴롭혔다. 추석 대목을 봐야 할 농가에 최악의 상황을 안겨준 기후의 폭주에 농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비가림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과일들의 상황은 조금 나았다. 그러나 은산면에 집중된 포도 재배 농가들은 수확의 기쁨에 앞서 오른 생산비와 작년에 비해 적은 생산량에 울상이었다. 포도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포도는 늦여름 습기를 걷어낸 청량한 햇볕으로 익어야 제대로 단맛이 나는 법이다. 지난달에는 그렇게 좋은 날이 드물었다.

레드향을 재배하는 농민은 지난 여름 폭우로 하우스에 물이 차서 레드향 나무가 많이 고사했다고 한숨이었다. 재배법을 연구해 가며 우리나라 과일 시장의 판도를 바꿔보려 의욕적으로 시작한 내륙 재배 레드향 농가였다. 올여름 3일 동안 세차게 쏟아진 비는 거침없이 레드향 하우스로 진격을 해왔다. 살아남은 레드향으로는 생산비 건지기도 힘들 것 같다고 했다.
 
태풍이 한번쯤 흔들어서 작은 밤송이들을 털어내야 밤이 굵어지는데 비만 내리고 태풍이 불지 않아서 알밤이 작고 병충해가 많다고 한다.
▲ 밤이 익어가고 있다 태풍이 한번쯤 흔들어서 작은 밤송이들을 털어내야 밤이 굵어지는데 비만 내리고 태풍이 불지 않아서 알밤이 작고 병충해가 많다고 한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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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밤송이 가득 달린 밤나무만 보이고 밤 줍는 일꾼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마을마다 메아리친다. 길바닥에 떨어진 알밤은 그냥 사뿐히 즈려밟고 다닐 정도로 밤이 흔한 부여 밤의 작황도 심상치 않다. 올해 밤 수확은 양보다 질이 떨어져 비상이 걸렸다.

"올해는 밤이 잘아서(크기가 작아서) 팔아봤자 돈이 안 될겨. 밤에 살이 오를 새가 있었어야지. 문제여 문제. 내년에도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밤농사도 못 해먹을 겨."

밤은 특대(特大)자와 중(中)자의 가격의 격차가 크다. 밤의 씨알이 작으면 줍고 운반하는 데에 인건비 지출이 많고 수입은 적어지기 마련이다.

가을은 풍성해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풍요로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일과 채소 가격은 올랐고 소비는 줄었다고 아우성이다.

올해는 어쩔 수 없다. 이미 기후 변화의 과도기에 들어서 버렸으니 아무리 농민들이 몸부림치고 첨단 영농 기술을 접목해도 한동안은 품질이 좋은 과일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두가 열긴 열었는데 씨 있는 데가 구멍이 생기고 맛이 푸석한 스펀지 현상 땜에 다 따서 버렸슈. 그런 걸 소비자들에게 돈 주고 사먹으라고는 못 하쥬."

김광수 농민은 일부 선별한 자두를 후쿠시마 오염수 폐기 반대 시위에 동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전에 없던 위기... 소비자의 '연대'가 필요하다 
 
행사 상품이라고 했지만 작년보다 현저하게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 마트에서 팔리고 있는 왕대추 행사 상품이라고 했지만 작년보다 현저하게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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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소비자와 농민들 사이에 이해와 타협의 필요성을 느낀다. 비싼 가격에 품질 좋은 과일만 고집한다면 어쩔 수 없다. 조금 흠집이 있으나 먹기에는 지장이 없는 과일들, 즉 못난이 과일들은 공동체 정서에 호소해 지역의 소셜 미디어와 로컬 매장에서 팔아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농업 전문 기관에서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완성해서 발표하는 동안, 과일 소비자들은 이처럼 생산자들이 직면한 고통을 함께 분담하면 어떨까? 

시골 국도변에서 상자를 쌓아 놓고 즉석에서 과일을 따서 팔던 풍경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추석이 다가오는 9월 중순, 아직도 날씨는 변덕스럽다. 비가 또 내리고 있다. 추석은 맑아야 풍년이고 가을비는 농부의 눈물이라고 한다. 과연 가을이 오고는 있는 걸까?

태그:#가을비, #과수 재배 농민, #부여군, #부여 농민, #기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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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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