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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⑤] '둘째 형은 이민, 누나는 이혼... 맏형의 죽음은 큰 상흔을 남겼다'(https://omn.kr/25tab)에서 이어집니다. 
 
용산치 4차(공동조사단 기준) 현수막 모습
 용산치 4차(공동조사단 기준) 현수막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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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발굴지는 제4차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용산치)이다.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아래 표와 같다.
4차 용산고개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들
 4차 용산고개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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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다시 찾은 용산고개

제2차(2015년) 대전 골령골, 제3차(2016년) 홍성군 광천읍에서 발굴을 마친 공동조사단은 3년 만에 용산고개를 다시 찾았다. 전국유족회에서 서로 발굴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들이 용산고개를 다시 찾은 이유는 '유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시굴이 필요 없는 곳'이라는 전 진주유족회장 강병현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유해발굴은 시굴이 중요하고 경비도 많이 든다. 사실 그렇게 시굴해도 유해가 나오지 않은 곳이 태반이다. 공동조사단은 시민단체 후원금으로 발굴을 하기에 경비가 넉넉지 않아, 파면 나오는 발굴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공동조사단은 2017년 2월 24일, 용산고개에서 제4차 발굴을 시작했다. 제4차 발굴지는 제1차 발굴지에서 100m 정도 아래로, 지금의 컨테이너가 놓여 있는 곳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는 2차, 3차를 거쳐 4차 발굴지로 향했다. 발굴지에 가면 가장 먼저 도착해 움직이는 이가 있다. 바로 구자환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체중보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속 골짜기를 헤매고 다닌다. 이번에는 드론으로 발굴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구자환 감독의 2004년 여양리 발굴장 촬영 당시 모습
 구자환 감독의 2004년 여양리 발굴장 촬영 당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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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감독은 민간인학살 관련 영화 3편(레드툼, 해원, 태안)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영화는 수입이 거의 없어 공공기관에서 상영해 주지 않으면 개봉 자체가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30여 년 넘게 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론을 샀으니 참 대단한 열정이다 싶다.

구 감독과 인연도 9년이 넘어가고 있다. 구 감독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근무했다. 틀에 박힌 직장이 맞지 않았던 그는 1년 근무 후 퇴사를 결심했다. 당시 1년간 번 월급으로 영화 3편에 쏟아부은 빚을 갚을 거라고 말을 던진 게 생각이 난다.

마냥 착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 아니면 이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없다. 강의, 답사 해설 등 10여 년간 자원봉사를 한 필자는 그의 헌신에 누구보다 공감한다. 이 기회를 빌려 많은 이가 구 감독의 영화를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그마한 돌무덤 하나의 정체

발굴 작업은 주로 봄방학을 시점으로 시작한다. 발굴 경비가 부족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월의 날씨는 언 땅이 서서히 녹아 질퍽질퍽하다. 얼어붙은 토양에서는 유해가 잘 부서진다. 심지어 용산고개는 토양이 질고 묘지 조성으로 파헤친 상태였으며, 훼손도 많이 돼 유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뼛속에 흙이 가득 차 있어 유해의 형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유해 표피에 묻어있는 흙을 조심스럽게 솔로 쓸어냈다. 그래야 유해가 도출되면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한 유해는 결국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번 4차 발굴지에서는 부서진 유해들이 많았다. 특히 '사지(四肢) 뼛조각'들이 많이 나왔다.
 
노출된 유해들
 노출된 유해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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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된 유해들
 노출된 유해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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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때 잔뼈 부스러기 처리 방법을 처음 보았다. 안경호 발굴팀장(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이날 구덩이를 사각으로 판 후 그 속에 화선지로 싼 유해 조각을 넣어 고이 묻었다. 이어 흙을 덮고 꼼꼼히 발로 밟았다.

안 팀장은 주변 여기저기서 받침대 돌 4개를 주어와 세운 후 넓적한 돌을 그 위에 얹었다. 이어 작은 비석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세워 '자그마한 돌비석'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돌비석에 깍듯이 절을 했다. 

형태가 정확한 유해는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 위령제를 지낸 후 컨테이너에 안치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마저도 누리지 못한 채 자그마한 돌비석 아래 묻혔다. 억울한 죽음도 슬픈데 사지가 갈기갈기 흩어져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9년이 지난 지금, 조그만 돌비석은 아직도 있을까? 아마 무성한 풀숲으로 뒤덮여 흔적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을 것이다.
 
조그마한 돌무덤
 조그마한 돌무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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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장에 궂은일 하는 사람들

발굴단이라고 해서 발굴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발굴 장소를 결정했다면, 먼저 산속에 사무실 천막을 설치하고 임시 화장실을 만든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베어와 난간을 만들고 사방에 기둥을 세워서 천막지로 막는다. 다음 할 일은 계단씩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 궂은일을 누가 하는지 궁금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필자의 눈에 한 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강원도에서 자원봉사 차 왔습니다."

강원도에서 경남까지 봉사를 위해 오다니, 순간 15분 거리에서 온 필자가 부끄러워졌다.

유해 발굴은 어떤 봉사보다 쉽지 않다. 70여 년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학살된 분들이 '어둠에서 밝은 빛을 보게 하는 순간'이기에 혼신을 다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의미와 보람이 크다.
 
4차 발굴 현장 모습
 4차 발굴 현장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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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성실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쯤에서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피학살자 강종호씨의 가족은 진주중앙시장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0년 음력 6월 18일, 외사촌 부부가 찾아왔다.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외사촌 부부와 함께 집에 들어온 강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 두 명에 의해 끌려갔다. 군인들은 가족들에게 보도연맹 관련 조사가 끝나면 돌려보내 준다고 했지만, 강씨의 모습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가족들은 강씨가 건국준비위원회(아래 건준위) 활동과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강종호씨는 20살 때 결혼해 1남 1녀를 낳고, 진주시 평안동 237번지에서 살았다. 아버지 강종호씨가 잡혀갈 당시 아들 강성헌은 1살이었고, 누나는 4살이었다.

당시 강씨는 친구의 권유로 건준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건준위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해방 후 정국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전국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당시 강씨는 단체에 가입해 서북청년단과 싸움도 하고 살벌한 전투도 했다.

당시 당숙들은 가정을 돌봐야 한다며 강씨의 건준위 활동을 반대했고, 강씨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뜻을 굽히기로 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유족 강성헌
 유족 강성헌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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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남겨진 가족의 삶

아들 강성헌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큰고모(강달순)는 시집을 가고 작은고모(강종순)는 도립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주변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면서 지내던 작은고모는 착하고 성실한 오빠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해 버린 남한 정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로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인민군에서 간호사로 종사하던 작은 고모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여 소식이 두절 되었다.

시집 간 큰고모는 어느 날, '삶이 괴로워 더는 살 수가 없다'는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이후 남강에서 경찰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남겨진 가족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학살지를 찾았다. 어머니가 본 장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구덩이에 시체가 가득했고, 땅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오뉴월이라 시신 썩는 악취도 진동하였다. 어머니는 그 많은 시신 더미에서 아버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중앙시장에서 노점상으로 겨우 생활하였다. 강성헌이 7살이 됐을 때, 어머니는 주위 권유로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겠다는 임아무개와 재혼한다.

의부는 결혼 전 약속대로 누나와 강성헌에게 잘해주었다. 두 오누이는 마산 진동에 있는 태봉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집에서 10리(4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두 오누이는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을 보고 경치가 아름다운 산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강성헌씨는 그 시절이 유년기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어느 날, 의붓동생(임○○)이 밤새 경기 하다가 병원도 못 가 보고 그만 죽고 말았다. 풍수 일로 자주 집을 비운 의부가 집에 돌아와 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자식이 죽은 것은 우리 아버지 귀신 때문'이라며 누나와 강성헌을 외가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네 새끼,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키워야 한다'며 다시 어머니께 돌려보냈고, 그 길로 의부는 누나를 남의 집 가정부로, 강성헌은 보육원으로 보내버렸다. 홀로 삶을 책임지던 강성헌은 26살이 되어서야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세월 잘못 만나서 그렇지,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강성헌은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다.

강성헌씨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할까 호적에도 혼자 올려져 있었다. 강씨 문중에서도 친인척들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아버지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는 현재 부산에서 외식업을 한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한 것을 보니 필자의 마음이 기쁘다.  

7회 관지리(화령골)가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용산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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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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