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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은 이태원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자에게 이태원은 어떤 의미인지, 참사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 기록이 또 다른 이야기를 여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0⋅29 이태원 참사 당시의 경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에 답하는 김원기씨의 모습
 질문에 답하는 김원기씨의 모습
ⓒ 용산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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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원기씨에게 핼러윈은 크리스마스만큼이나 기다려지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날이었다. 어릴 적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장교들의 숙소였던 외인아파트가 집 근처에 있어서 외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핼러윈이 있는 10월만 되면 동네 곳곳에 알록달록 꾸민 호박들이 걸리고, 해골, 유령 장식물들도 심심치 않게 봤다. 핼러윈만 되면 친구들과 사탕바구니를 들고 외인아파트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쳐 바구니 가득 초콜릿과 사탕 들을 받아오곤 했다. 그때의 흥겨움이 좋아 커서도 이태원 지역에서 열리는 핼러윈 축제에 꼭 참여했다. 클럽에서 열리는 핼러윈 파티에도 많이 갔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태원에서만 누리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어요. 자유롭고 설레는 분위기가 좋아서 매년 핼러윈 축제에 참여했지요."

원기씨의 아내, 임민희씨도 결혼 전 연애 시절부터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갔다. 원기씨가 "이건 봐야 한다."고 자랑하며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핼러윈 축제를 지금도 기억한다. 엄청난 인파에도 놀랐지만 각양각색의 코스프레에 입이 벌어졌다. "앞에 우주인이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때 본 우주인 복장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후 영화에서 본 각종 캐릭터들을 다 만났다. 문화충격이었다. 결코 싫지 않은, 다른 세계였다.

"너무 재밌었어요. 사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하고 눈 마주치면 누가 웃나요? 그냥 지나가잖아요. 근데 이태원 축제 때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로 웃으면서 인사하고 사탕 나눠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요. 마치 2002년 월드컵 때처럼요. 너무 즐거운 거죠. 그래서 저희는 말 그대로 사람 구경만으로도 좋아서 해마다 갔어요."

이제 여섯 살, 다섯 살인 두 아들이 더 어렸을 때도 아기 띠를 매고 다녀올 정도로 원기, 민희씨 부부에게 핼러윈 축제는 빠지지 않는 연례행사였다.

"용산은 한번 들어오면 잘 안 떠나는 매력적인 곳"

이태원은 원기씨의 할머니가 터를 잡은 곳이었다. 용산에는 '해방촌'이라는 동네가 있을 정도로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다. 원기씨의 할머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을 간 뒤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원기씨 할머니는 용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용산은 한번 들어오면 잘 안 떠나는 동네예요. 친구 중에도 용산에서 태어나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요. 살다 보면 용산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거든요."

결혼 뒤 남편과 함께 경리단길 근처 이태원동에 정착한 민희씨도 용산의 매력에 푹 빠진 1인이다.

"용산은 삭막하지 않아요.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여긴 서울이 아니다. 시골 같다'라고 해요. 옥상마다 고추 심고 파 심고 꽃화분도 놓은 주택이 많아요. 참 한갓지다고 할까? 여유로운 동네죠.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그냥 여유로워요."

용산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도 중앙에 위치해 강남과 강북 어디든 가기가 편하다. 게다가 거주지역은 고도제한 '덕분에' 빌딩과 아파트 숲에 가로막히지 않는다. 단독주택들이 많다. 대문 밖에 나서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골목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원기씨가 "대한민국 최고의 산"이라고 칭하는 남산이 맑은 공기와 푸르름도 선사한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가 하면 가장 젊은 문화를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기도 하다.

원기, 민희씨 부부가 '애정하는' 용산에는 이처럼 많은 것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다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고,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밖에. 외국인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역이 바로 용산이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원생들 절반은 피부색이 달라요.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고, 국적도 정말 다양하죠. 이렇게 외국인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도 없어지고, 여러 문화에서 배우는 것들도 많지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집에서 부부의 날에 모의 결혼식을 했다. 행사가 끝나고 미국인 친구 아빠가 "너무 이해가 안 간다"면서 "왜 무조건 남자는 아빠고, 여자는 엄마입니까?"라고 불만을 표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른 시각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다른 문화권 주민들과 교류하며 깨우친다. 민희씨는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은 접하기 힘든 문화가 이태원에 있다"고 전했다.
 
질문에 답하는 임민희씨의 모습
 질문에 답하는 임민희씨의 모습
ⓒ 용산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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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태원에 사는 게 늘 좋지만은 않다. 개발이 안 돼서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개발이 안 돼 불편한 점도 많다. 도로가 좁고 편의시설도 많이 없다. 출퇴근 시간대엔 늘 길이 막히고, 쇼핑을 하려고 해도 용산역까지 나가야 한다. 또한, 이태원이 클럽과 외국 문화의 집결지가 되면서 겪는 괴로움도 많다. 방송 촬영이 잦고 주말에는 사람이 몰려 소음이 심하다.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에선 민망할 때도 있다.

"너무 자유롭다 보니까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도 많지요."

민희씨가 아쉬운 점을 떠올리다가도 "그런 점보다는 재미있는 부분이 더 많다."로 결론을 내린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접하기 힘든 젊은이들의 문화를 누리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골목골목 조그마한 가게에서 젊은 작가들이 하는 전시도 보고, 새로 유행하는 아이템도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이태원 문화를 응축해 놓은 행사가 바로 핼러윈 축제이다. 원기, 민희씨 부부를 비롯해 이태원 지역의 주민, 젊은이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였다. 특히 2022년 핼러윈은 더 많이 기다렸다. 코로나19로 3년 동안 못 하다가 열리는, 마스크를 벗어버린 첫 번째 축제였기 때문이다. 방역지침을 따르며 적자를 감내해 온 상인들에게는 다시 찾아온 해 뜰 날이었다. 이태원 전역이 들썩였다. 원기, 민희씨 부부도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생각에 마냥 들떴다. 몇 주 전부터 아이들에게 입힐 스파이더맨 옷을 주문해 놓고 이날을 맞이했다. 

3년 만에 열린 축제, 너무도 흥겨웠는데…

2022년 10월 29일 오후 6시쯤, 민희씨 가족은 언니 가족과 함께 10분 거리에 있는 핼러윈 축제 장소로 걸어갔다. 해밀턴호텔 주변에 도착해 코스프레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강진역까지 갔다. 민희씨가 "그때 생각을 하면 막 심장이 떨려서"라며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을 덜덜 떨면서 조심스럽게 그날을 회상했다. 

"정~말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람 수는 코로나 전과 비슷했는데 몇 년 만에 많은 군중을 보니까 더 많게 느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사람이 많아서 더 신이 났어요."

군중을 헤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엄청난 코스프레의 물결과 마주쳤다. 

"아이언맨을 봤어요. 우리 아이는 진짜인 줄 알고 정말 신나했지요."  

어린 두 아이가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있으니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다른 마블의 등장인물들을 비롯해 코스프레한 많은 형, 누나들과 사진을 찍었다.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바로바로 SNS에도 올렸다. 이 흥겨움에서 벌써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 아쉽다. 우리 한 바퀴 더 돌고 가자"고 마음을 모아 다시 해밀턴호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태원역 근처에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았어요. 저희는 아이가 있으니까 좀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가는데 앞에서 밀고 뒤에서 밀고... 그래도 사람들이 아이가 있으니 조심하자고 많이 얘기했어요. 그렇게 인도를 걷는데 (눈물을 보이며) 사람이 진짜 너무 많아서 꼼짝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때 원기씨가 말했단다. "안 되겠다. 우리 도로로 나가자." '왜 나는 차도로 갈 생각을 못 했을까?' 스스로를 책망하며 겨우 차도로 빠져 나왔다. 다시 천천히 걸으며 용산구청 앞까지 왔다. 그렇게 이태원역에서 한강진역까지, 다시 한강진역에서 이태원역을 지나 용산구청까지 오는 동안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두 명 봤을까? 교통정리도 새마을부녀회에서 나온 분들이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있기는 힘들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돌아서기 직전, 축제를 취재 온 방송사가 요청해 인터뷰도 했다. 

"사람들이 치여서 들고 있던 사탕을 떨어뜨려 큰아이가 기분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인터뷰할 때 아이가 시무룩하게 있었죠. 우리 아이가 TV에 나올 수도 있는데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너무 속이 상하더라고요."

아쉬웠던 인터뷰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벌써 밤 10시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온 게 아쉬워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는 유튜브를 틀었다. 잠시 후 핸드폰을 보던 민희씨 언니가 "압사사고가 났나 봐"라고 소식을 전했다. 엄청났던 인파를 생각하니 "사고 날 만하지"라고 응수했다. 그때만 해도 두세 명이 넘어져 다친 줄 알았다. 다시 언니가 "아닌 것 같아. 진짜 사고인가 봐"라고 해 심각성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민희씨 가족을 인터뷰했던 기자가 사고 현장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민희씨 가족이 현장을 떠나고 얼마 뒤부터 참사가 벌어진 것 같았다. 

'아차 했으면, 우리도 저기서 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겠구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우리 아이들과 사진 찍은 젊은이들이 참사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신나서 올렸던 SNS를 바로 다 삭제했다. 밤새워 뉴스를 지켜보며 부부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잃었다.
 
참사 당일 임민희씨가 촬영한 이태원 거리
 참사 당일 임민희씨가 촬영한 이태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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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당사자… 유가족과 슬픔 나눠

"제가 해밀턴호텔 골목을 정말 많이 다녔거든요. 다닌 지 20년은 됐을 거예요. 그렇게 많이 다녔던 골목에서 그런 참사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원기씨의 말처럼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민희씨도 믿기지 않았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집 밖에 나갔다. 핼러윈을 맞아 동네 집집마다 걸려 있던 사탕 바구니와 호박 모형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아, 사고가 진짜였구나.' 그와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울먹이며) 우리는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자세한 사건 보도를 접하고서는 '그때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우리가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겠구나'란 생각에 사로잡혀 무섭고 힘들었다. 한동안 원기씨는 참사 당일의 꿈을 꾸다가 잠에서 벌떡 깨는 날을 반복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그랬다면… 아내가 저쪽으로 밀려가 나와 떨어졌다면….' 자신이 데리고 간 축제에서 가족이 잘못 됐을 경우를 가정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해밀턴호텔 옆 골목도 참사 후 오르지 못했다.

"솔직히 한 달 넘게 너무 힘들었어요. 힘들면 아내랑 추모하는 곳에 가서 한참 울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조금 좋아졌던 것 같아요."

의류 도매업을 하는 부부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해밀턴호텔 앞 추모공간에 들르곤 했다. 원기씨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갈 때마다 한 젊은 친구가 소리치며 울고 있더라고요. 다섯 번은 연속으로 봤을 텐데 친구를 잃은 것 같더라고요."

함께 슬퍼하는 것으로 서로를 위로해 온 시간이었다. 원기씨가 해밀턴호텔 옆 골목을 다시 오르게 된 것도 함께하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희생자들의 49재 행사가 그곳에서 있었다. 반찬 봉사를 하며 알게 된 용산시민연대 회원들과 함께 갔다. 해밀턴호텔 옆 비탈길을 오르는 참가자들 옆에 원기씨도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기 전엔 조금 무섭기도 했었거든요. 그랬는데 잘 올라왔다 싶더라고요. 왜냐하면 같은 당사자거든요. 같이 있었던 우리도 어떻게 보면 희생될 수 있었으니까요. 당사자로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원기씨는 시간을 내어 합동분향소 지킴이 활동도 했다. 떠나보낸 자식들이 더 힘들어할까 봐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유가족들을 보면서 함께 아파했다. 유가족들의 슬픔이 전해져 마음이 울컥할 때면 멀리 도망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유가족들이 아들, 딸이 좋아하던 파워에이드, 빵 같은 걸 항상 갖고 오시더라고요. 아이들이 먹는다고 생각하겠죠. 같은 부모로서 그 마음이 이해되더라고요. 물론 아픔은 짐작도 못 하지만요."

지킴이 활동을 할 때면 영정 사진들을 유심히 보려고 애썼다. 개인으로서 할 일은 "이 친구들을 기억해 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다. 만났던 유가족의 말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태원 참사를 주변에 더 많이 알려주세요. 아이들이 잊히지 않도록……."  

"질서 잡지 못한 정부의 잘못… 6명 보석 석방은 말이 안 돼"

참사로 이태원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젊음의 열기로 가득 찼던 이태원이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바뀌었다. 지난겨울에는 두세 달 동안 아예 문을 닫은 가게들도 많았다. 민희씨가 그때의 풍경을 들려줬다.

"참사 한 달쯤 돼서 밤에 경리단길에서 이태원역까지 갔는데 시골에 온 것 같더라고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너무 적막이 흘러서요. 보통 때는 밤거리가 시끌시끌하고 사람들도 엄청 많거든요.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적이 처음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장사하는 분들도 많이 힘들었겠죠."

159명이란 꽃 같은 생명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지역은 초토화됐는데 책임지는 이가 없다. 참사 후 1년이 되도록 정부는 책임을 회피한다. 하지만 원기씨는 이태원 참사의 본질은 "질서를 잡지 못한 정부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 때 제가 광화문에서 빨간 티를 팔았어요. 그때 모인 사람이 200만  명인가 그랬는데 다친 사람이 없었어요. 경찰들이 요소마다 있더라고요. 그땐 질서가 잘 잡혔다고 느꼈어요. 이태원도 경찰이 10명, 아니 5명만 있었어도 그런 사고가 안 일어났을 거예요."

코로나 전에 열린 핼러윈 축제 때는 있었던 경찰을 2022년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국민이 세금을 내면 정부가 그만큼은 해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날 정부는 이 친구들이 세금 내는 만큼도 안 해줬어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선 정부가 의미가 없었던 거죠."

여전히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도 정부의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유가족들과 대화도 하지 않고 단절하는 건 책임지기 싫다는 표시"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용산구청장 등 구속 됐던 6명을 보석으로 풀어준 건 문제가 있었다, "유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풀어주는 건 말이 안 되는" 처사였다고 본다. 

민희씨도 정부가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안타깝다.

"49재 행사 때 희생자들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면서 사진이 나왔는데 다들 너무 예쁘고 어린 거예요. 길 가다가 바로 어제도 봤을 것 같은 아이들을 보면서 그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또, 유가족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는데 사람 같지가 않고 (울컥하며) 하얀 나무토막이 이야기하는 것 같은 거예요. 저분들께 힘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부가 시시비비 따지지 말고 이런 유가족과 희생자들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주면 좋겠어요." 
 
참사 당일 임민희씨가 촬영한 이태원 거리
 참사 당일 임민희씨가 촬영한 이태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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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추모 공간 원해

무엇도 해결된 것도 없이 10월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도 핼러윈 축제가 열릴까? 원기씨는 열려야 한다고 답했다. 

"문화를 즐기러 왔다가 보호해주지 않은 정부로 인해 희생된 거잖아요. 그런데 그 문화가 끊기면 희생된 친구들이 속상할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열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들과 함께 무조건 갈 겁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오버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안전을 빌미로 작년과 달리 경찰들을 수백 명 동원해서 줄 세우면 축제가 축제 같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민희씨는 이태원에 대한 선입견부터 사라지길 희망했다.

"이태원 참사는 핼러윈을 즐겼던 사람들한테는 소소한 즐거움을 빼앗아간 사건이에요. 다시 놀고 싶은 이태원을 만들려면 사람들에게서 이태원에 대한 안 좋은 색안경을 벗기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피해자들이 피해자임에도 색안경 때문에 그 사실 자체를 숨기고 있잖아요.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부끄럽지 않은 일이 돼야죠.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상을 힘써서 밝혀야 되겠죠."

앞으로 추모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공간이면 좋을까? 원기씨가 소박하면서도 큰 바람을 말했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모두 하나가 되어 추모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참사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정부 관료들, 놀러가서 죽은 거 아니냐고 했던 사람들까지 모여서 같이 추모하면 희생된 친구들이나 남아있는 가족들도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아요."

원기, 민희씨 부부는 이태원 참사 이후 좀 더 공동체를 생각하게 됐다. 아이들과 나눔 활동을 하고 싶어서 참사 몇 달 전부터 시작한 홀몸어르신 반찬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우선 2개월만 해보자고 시작했는데 벌써 1년을 넘어섰다. 또, 집회 같은 것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웬만하면 시간을 내 이태원 참사 추모제, 관련 집회에도 간다.  

"참사 이후 저희가 많이 변했어요. 대외활동을 많이 하게 됐지요. 어찌됐든 용산에 계속 살 테니 용산을 더 좋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함께하면서 참사 후 일상 회복으로 나아가고 있는 원기씨가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얼굴을 꼭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59명을 다 기억 못 해도 그중 한 명이라도요."

- 인터뷰어 : 신정임 / 인터뷰이 : 김원기, 임민희

태그:#이태원, #이태원참사, #1029이태원참사, #다시놀고싶다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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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에서 주민들과 마을방송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주요 현안을 콘텐츠로 제작하고 지역주민과 청소년 대상 라디오 교육을 통해 라디오방송 DJ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용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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