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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에서 다시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제 더 서쪽으로 향합니다. 기차를 몇 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입니다. 지하에 있는 기차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오자마자 큰 대로가 보였습니다. 도로에 차량 통행이 차단되어 있더군요.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통 춤 공연 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도착한 날이 스페인의 '내셔널 데이(National Day)'였거든요. 잠깐 공연을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셔널 데이 기념 공연
 내셔널 데이 기념 공연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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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데이'라면, 우리로 따지면 광복절이나 정부수립 기념일 정도 될까요. 우리에게 가장 큰 국가적 기념일은 그런 날이니까요. 스페인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스페인의 '내셔널 데이'는 엄밀히 말하면 스페인 정부와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인 10월 12일이 내셔널 데이로 지정되어 있거든요.

물론 콜럼버스의 항해가 스페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자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합쳐져 만들어진 나라죠. 하나가 된 이 나라가 처음으로 이룩한 업적이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법률은 10월 12일을 '내셔널 데이'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0월 12일은 스페인이 문화적・정치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을 마무리하고,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유럽의 경계 밖으로 언어와 문화를 확산하기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 의문이 들었습니다. '유럽 밖으로 언어와 문화를 확산'했다는 말을 썼지만, 이것은 곧 스페인이라는 식민 제국의 수립을 기념하는 날이었던 셈이죠.

이날은 일부 국가에서 기념하는 '콜럼버스 데이'와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날입니다. 미국은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로 기념하고 있죠. 미국과 일부 남미 국가에서는 아직 콜럼버스 데이를 기념하고 있지만, 기념일마다 식민지 과거사를 규탄하는 시위도 이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식민 모국이었던 스페인에서는 이날을 '내셔널 데이'라는 이름으로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카탈루냐의 깃발과 독립세력을 지지하는 노란 리본
 카탈루냐의 깃발과 독립세력을 지지하는 노란 리본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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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바르셀로나 곳곳을 여행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예상대로 스페인의 깃발보다 카탈루냐의 깃발을 더 많이 볼 수 있더군요. 카탈루냐어로 된 안내판도 거의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스페인어와 카탈루냐어로만 안내판이 되어 있어 순간 당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는 오랜 기간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별개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통일 이후에도 카탈루냐의 독립된 정체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고대 로마에는 '히스파니아'라는 속주로 관리되었습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고트 족이 이 땅을 지배했죠. 8세기에 이르면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합니다.

이 시기부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지방은 다른 지역과는 역사의 궤도가 달랐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은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부와 달리, 바르셀로나는 이베리아 반도의 변경에 위치해 있었죠. 그러니 당연히 지브롤터에서 올라온 이슬람 세력의 영향력도 적었습니다.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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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년, 프랑크 왕국이 바르셀로나 지역을 공격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세웠죠.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국토 회복'은 바르셀로나 지역을 중심으로 출발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약화되면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베리아 반도 중북부에서도 카스티야 왕국이나 레온 왕국 등의 세력이 만들어졌죠. 이들도 '국토 회복 운동'에 동참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긴 전쟁과 내분 끝에 이슬람 세력이 거의 대부분 물러난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에는 두 개의 큰 나라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곤 왕국과,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왕국이었죠.

앞서 언급한 대로 1469년, 두 나라의 후계자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두 왕국은 사실상 통합됩니다. 통합 왕국이 된 스페인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1492년에는 그라나다를 정복하며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죠. 처음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뒤 780여 년 만에 '국토 회복'을 완수한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통해 "언어와 문화를 유럽의 경계 밖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한 것도 같은 해였습니다.
 
카탈루냐 광장
 카탈루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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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는 이런 상황에 썩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왕국은 영토가 큰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었습니다. 통합된 스페인 왕국은 카탈루냐의 독립된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카탈루냐는 지금까지도 카탈루냐어아라는 별개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카탈루냐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부심도 강한 편이죠. 카탈루냐에서 카탈루냐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예술가도 많습니다. 여전히 바르셀로나에 여러 작품이 남아 있는 안토니 가우디가 대표적이죠. 호안 미로나 살바도르 달리도 카탈루냐 출신의 예술가입니다.

카탈루냐는 수차례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카탈루냐는 지금까지도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독립하더라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독립 주장도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죠.

30년 전쟁 때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 전쟁이 벌어지자, 카탈루냐는 프랑스군을 동원해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1700년부터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카탈루냐는 신성로마제국 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가져갔죠. 끝까지 저항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군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도 카탈루냐 지방정부는 두 번이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도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언하는 사건이 있었죠.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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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의 깃발을 보며, "문화적・정치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나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문구를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경계 밖으로 언어와 문화를 확산"했다는 말도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식민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몰락했습니다. 표현대로 스페인어와 스페인의 문화는 그들이 경영했던 식민지에 짙은 영향을 남겼죠. 하지만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스페인이라는 하나의 왕국 안에는 여전히 분열의 목소리가 남아 있습니다. 카탈루냐의 독립 세력을 스페인 정부는 강력히 탄압했습니다.

20세기 초 카탈루냐 지방정부를 이끌었던 루이스 쿰파니스는 결국 체포 후 총살되었습니다. 2014년 스페인 정부는 계엄령을 운운하며 독립 주민투표를 강경 진압했습니다. 자치정부 수반이었던 카를로스 푸지데몬은 망명 생활을 거쳐 체포되었습니다.

스페인 정부가 반드시 특정 지방의 독립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식민 제국은 무너졌고, 단일한 왕국은 분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내셔널 데이'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이 '내셔널 데이'에서 무엇을 축하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내셔널 데이'는, 스페인이 마주하고 있는 모순된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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