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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9년 이래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만 쭉 교사 생활을 해왔으며,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삼척 탄광촌 벽지 학교에서 4년을 지내기도 했고, 지금은 양양 하조대의 작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삼척 산간 지역과 양양 해안 지역. 같은 영동 지역이라고 해도 기후와 위치, 문화, 일자리 등이 다르다. 그렇지만 내가 담임을 맡은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 조퇴해야 할 것 같아요. 강릉대 치대 예약 했어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순 충치 치료가 아니라 교정이나 어금니 신경치료처럼 아이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치료는 부모님들이 기꺼이 직장 휴가를 내고 다녀오셨다. 물론 삼척시에도, 동해시에도, 양양군에도 치과는 있다. 그럼에 유명한 어린이 치과나 소아청소년과는 강릉에 몰려있다 보니 학부모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삼척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교사는 거주지가 삼척 시내였지만 강릉 시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고 같은 건물에 위치한 조리원을 이용했다. 혹시라도 분만이나 몸을 추스르는 중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 군복무를 인제군 가리산리에서 했다. 교사 생활을 1년 반 하다가 입대한 탓에, 부대에서 야학 비슷한 걸 1년 여 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야학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인제에는 규모 있는 산부인과가 없어서 인제군 토박이라고 해도 태어난 도시는 모두 외지였다. 화천군이나 고성군 등 인제군과 규모가 비슷한 지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훗날 부모가 된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동해시에서 8년 간 거주할 때 큰 아이의 아토피 관련 알레르기 검사를 위해 강릉 아산병원을 찾았다. 가까이서 가능한 곳이 있나 싶어서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고, 아내가 지역 맘 카페에서 의견을 구해보았지만 모두들 영동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만 추천했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병원 피라미드 같은 개념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약한 병은 동네에서, 중한 병은 큰 도시로.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갈수록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도시에 사는 분들도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겠지만, 지방에서는 그 경계가 훨씬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좀 위중하다 싶으면 서울의 대형 상급 병원부터 떠올리고, 고속버스나 KTX 예매를 서두르는 패턴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소아응급실 없는 강원도 영동 지역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고속철도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상경 뒤 서울 강남 일대 대형 종합병원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 등 이용객들이 병원 셔틀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고속철도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상경 뒤 서울 강남 일대 대형 종합병원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 등 이용객들이 병원 셔틀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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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신혼이었던 이십 대 무렵에는 둘 다 젊고 건강했기에 지방의 의료 공백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부모로서 우리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다. 영유아의 면역력은 어른에 비해 상당히 약했기 때문이다.

"여보, 애가 축 늘어졌어. 열도 펄펄 끓고."

환절기의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아이는 자주 병을 앓았다. 감기는 다반사고 기관지염까지 악화되는 일이 잦았다. 드물게는 급체를 하기도 했다. 아이가 아플 때마가 우리 부부는 번갈아 조퇴를 신청하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변에만 소아과가 있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강릉으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소아청소년과 병원 접수도 치열해졌다. 다행히 근처에 병원이 한 곳이 있는데, 독감 시즌이나 학기 초면 주말 접수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주중에는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가정상비약으로 버티다가 토요일 오전 진료를 이용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전 8시 30분부터 진료를 보는 병원이 8시 50분에만 가도, 이미 그날 오후 1시까지 예약이 마감돼 있기 일쑤였다. 

운 좋게 접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때부터 기다려야 하는 대기 시간이 너무 길었다. 강릉 시내 권역에 살아도 접수 시간 오전 8시 30분을 맞추기 힘들었으니, 주변 소규모 지자체에서 원정 진료를 보러 온 분들은 훨씬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강원도 영동 지역에는 소아응급실이 없다. 나는 그 사실을 학교 업무로 평창 현장체험학습을 준비하다가 처음 알았다. 계획서를 작성하며 안전 관련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는데, 혹시라도 야간에 소아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원주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야했다. 거리상으로 원주보다 가까운 강릉에는 소아응급실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동료 교사에게 문의해 보니, 속초나 인제 쪽에서 밤에 소아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춘천 강원대 병원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응급실 뺑뺑이'는 시골 농어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름 영동 지역의 거점 도시라 불리는 곳에서도 의료 공백은 이미 진행 중인 사안이다. 같은 강원도 내에서도 영서 지역에서는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이 강원대학교병원과 함께 소아중환자 24시간 의료 제공 협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영동 주민으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올해 속초의료원에서는 응급의학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다섯 차례나 공고를 냈다. 파격적인 억대 연봉에도 지원자가 구해지지 않아, '응급의학과'로 한정되었던 전공 제한을 없애고 연봉을 4억 원 대로 끌어올려서야 겨우 자리를 채웠단다. 4억 연봉은 당장에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렇지만 인근 지역민 입장에서는 의료 공백의 공포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 뉴스였다. 

강원도에는 의사 수가 적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강원도민 1000명당 의사 수는 2.65명으로, 같은 기준 서울의 4.7명과 비교하면 절반에 그치는 수준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더 가슴이 답답해지는 소식도 있다. 강원도의 유일한 국립 의대병원인 강원대 병원은 지난 2019년과 2020년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충원하지 못했고, 올해도 마찬가지란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어린이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이기적이게도 우리집 두 아이가 영유아기를 큰 병치레 없이 넘겼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의료 환경이 잘 갖춰진 곳에서 지내시는 분들은 쉽게 공감하기 힘든 감정이지 않을까.

내 건강을 내가 지켜야 하는 슬픔
 
지방에서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도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활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지방에서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도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활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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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인 나에게 지방소멸이라는 단어가 뫼비우스 띠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지방에서는 왜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없냐고 묻는다면 큰 수술이나 진단을 받을 만한 괜찮은 병원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 병원이 충분치 않냐고 물으면 환자와 의사 모두 서울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다. 

답답한 점은 직장 근무나 교통 등 여러 이유로 지방 병원에 가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지방민이 양질의 진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상경 이외는 뾰족한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사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방 근무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방에서 필수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악화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나는 십 오 년 간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면서 이러한 흐름을 여실히 체감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행정력이 작동하는 시 단위 도시에 살면서도 의료 공백을 걱정하는 것은, 인구 소멸 시대의 숙명인 걸까. 대한민국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 안에는 필수 의료 서비스를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조건 하에서 누릴 수 있는 환경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우며 제때 치료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말이다.

야간과 주말, 공휴일에는 급성심근경색 환자가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강원도 중소도시에 살고 있으면 저절로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병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병원이 열악한 곳이니 강제로 건강 관리를 하게 되는 자구책이라고나 할까. 웃지 못할 자구책을 지방민들이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분명 정상은 아닌 것 같다.

태그:#의료공백, #지방의료, #병원, #응급실뺑뺑이, #소아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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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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