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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리릭 칼날이 돌아가면 LED 불빛이 들어오는 개량형 당근칼
 휘리릭 칼날이 돌아가면 LED 불빛이 들어오는 개량형 당근칼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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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유행은 종잡을 수 없다. 한때는 피젯 스피너가 학급을 휩쓸더니 이번에는 당근칼이다. 왜 당근 칼이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어른이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당근칼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묘기를 부릴 수 있는 플라스틱 장난감이 유행을 탄 것처럼 보인다. 당근칼에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플라스틱 칼날을 밖으로 꺼냈다가 안으로 집어넣었다가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아이들에게 당근칼이 어쩌다 인기를 끌게 되었냐고 물었다. 귀여워서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대뜸 칼부림 사건이 튀어나왔다. 언제 어디에서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괴한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각종 호신용구를 갖추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당근칼도 그 일부라는 것이다. 과연 이 조잡한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난동범을 제압할 수 있을까, 다소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불안한 심리는 실체가 있는 것 같았다. 

칼날을 만져보았다. 날카롭지 않고 꽤 단단했다. 칼날에 베이지는 않겠지만 체중을 실어 찌르면 충분히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찌르면 다친다는 식으로 따지면 딱딱한 모든 물건이 흉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텀블러를 가지고서 친구 머리를 내려치지 않는 것처럼 물건에는 그에 맞는 용도가 있고 이름도 용도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근칼은 어떤가. 말 그대로 물건 이름에 칼이 붙어 있기에 학생들은 자연스레 칼을 휘두르고 장난 삼아 쿡쿡 찌른다. 학교에서 총이나 칼 형태의 장난감을 금지하는 이유다. 

"여러 개 사면 할인" 이런 어른이 있다니
 
칼날이 긴 것부터 바나나 모양으로 짧은 것까지 당근칼의 변형 제품을 아이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칼날이 긴 것부터 바나나 모양으로 짧은 것까지 당근칼의 변형 제품을 아이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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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보통 도검류 장난감은 구입 연령이 제한된다. 찾아보니 당근칼도 14세 미만 구입 불가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반 아이들 다섯 명(시골 학교라 다섯 명이 전부다)은 모두 당근칼을 가지고 있는 걸까. 혹시나 싶어 퇴근길에 학교 주변 편의점과 마트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당근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 시내 'ㅇㅇㅇ' 가야 살 수 있어요. ㅇㅇ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구점 있잖아요."

그럼 그렇지, 우리 학교가 위치한 '면' 단위 지역에서는 최신 유행 아이템을 판매하는 가게가 없었다. 적어도 읍내 중심가까지 가야 당근칼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어떻게 초등학생이 14세 미만 구입 불가 장난감을 구한단 말인가. 아이들은 뜻밖의 사연을 들려줬다.

"우리 반 M이 다섯 개 사서 아이들 하나씩 다 나눠 줬어요. 같이 놀자고요."  

도시 초등학생들은 편법으로 당근칼을 사려고 무인 문구점을 이용한다고 하던데, 우리 반 M은 당당하게 읍내 문방구에서 아저씨에게 돈을 건네고 샀다. 한꺼번에 많이 사면 세일을 해 준다고 해서 종류 별로 골고루 스무 개 가까이 질러버렸다.

친구들에게 당근칼을 사준 ㅇㅇㅇ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재미있게 요즘 뜨는 놀이를 같이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틱톡과 유튜브에서 당근칼 묘기 영상을 보았고 호기심이 일어서 시내에 나간 김에 사 왔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1년 가까이 그 아이를 지켜보았고 교실에서 함께 생활해 왔기에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 것만 사가면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용돈을 털어 친구들 몫까지 한꺼번에 사버렸다는 표정에서는 자부심마저 어려있었다. 

"비싸지 않았어?"
"여러 개 사면 주인아저씨가 친절하게 깎아줘요."


싸게 샀다며 웃는 M을 보며 누구를 탓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도 일단 친구를 배려한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5학년 눈으로 보기에는 당근칼이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고 알록달록 색깔도 예쁘니 학교에 가져가도 되는 장난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담임 선생님 앞에서 당당히 당근칼 묘기 자랑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다음 날까지 집에서 가지고 있는 당근 칼을 모두 학교에 가져와 보라고 했다. 내 말을 듣자 아이들은 짐짓 움츠러들었다. 선생님이 꾸중을 하시려나 보다 하고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나는 집에 갈 때 반드시 돌려줄 것이고, 같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니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그리고 하루 뒤, 내 책상에는 스무 개 가까운 장난감 칼이 올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집에 있는 장난감 칼을 싹 다 들고 와버렸다. 겨우 다섯 명이 있는 교실이니 기껏해야 대여섯 개를 예상한 나는 당황했다. 당큰칼이 이 정도의 영향력을 지녔을 줄이야. 어린이에게 유행하는 장난감이라는 존재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거대한 것 같았다. 

말이 당근칼이지 이미 시중에는 온갖 종류의 칼이 활개치고 있었다. 색깔이 다른 것은 물론, 칼날의 길이도 다르고 led(엘이디) 불빛이 들어오는 개량형도 존재했다. 바나나 모양 칼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잭나이프 형상의 칼은 척 보기에도 칼끝이 날카로웠다. 나도 모르게 감탄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저... 정말 굉장하구나. 어떻게 구했어?"
"다 샀어요. 전부 같은 문방구에서요."


대리 구매나 무인 문구점이 아니라 우리 반 아이가 직접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매한 물품이 확실했다. 세상에는 돈이 되면 어린이를 상대로 서슴없이 영리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도 중학생 담배 심부름을 해주고 푼돈을 받는 어른을 편의점에서 보았다. 그러니 아주 새삼스러운 세태는 아니다. 세상의 비참함과는 별개로 학교에서는 학교 나름대로 아이를 가르쳐야 할 영역이 있다. 

골판지 '훅' 뚫는 모습 보고 놀라... 안 갖고 오기로 약속한 아이들
 
장난감 칼에 쉽게 구멍이 뚫린 상자
 장난감 칼에 쉽게 구멍이 뚫린 상자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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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칼 참 귀엽고 예쁘게 생겼지? 그런데 이거 진짜 칼이야 볼래?"

나는 과학 실험에 사용한 검은 어둠상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장난감 칼을 거꾸로 손에 쥐고 상자를 내리찍었다. 제법 두꺼운 골판지 상자가 순식간에 뚫렸다. 아이들 눈이 보름달만 해졌다. 잭나이프 칼보다 뭉툭해 보이는 당근칼도 꺼냈다. 아까보다 더 세게 힘을 주었더니 마찬가지로 상자를 관통했다. 구멍 난 상자를 들어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다.

"상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 명씩 나와서 직접 상자에 구멍을 내 보라고 했다. 퍽퍽, 5학년 힘으로도 상자는 쉽게 뚫렸다. 내가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칼이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칼을 학교에 들고 오지 말자는 약속을 만들었다. 

축구화를 가까이 두는 아이는 점심시간에 공을 십 분이라도 더 차고, 우쿨렐레가 곁에 끼고 사는 아이는 짬이 생기면 뚱가뚱가 코드를 연주한다. 사람은 결국 어떤 복장과 어떤 물건을 곁에 두느냐에 따라 행동이 많이 바뀐다. 칼 앞에 당근이 붙었다고 해서 칼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나도 안 좋은 물건을 멀리하려 며칠 째 스마트폰을 교실 서랍에 박아두고 책을 읽었다. 내가 꼼짝 않고 책을 읽자 아이들도 덩달아 책을 읽으려 했다. 견물생심, 당근칼이 좋은 교훈이 될 것 같다.

태그:#당근칼, #칼부림, #장난감, #유행,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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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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