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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에는 국립소록도병원에 살았던  음성 나환자들이 자립하기 위해 오마도에서 간척 공사를 하던 모습을 조각해놨다.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에는 국립소록도병원에 살았던 음성 나환자들이 자립하기 위해 오마도에서 간척 공사를 하던 모습을 조각해놨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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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목),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학술대회에 초대받아 소록도로 가던 중 한센인들이 자립하기 위해 피땀흘렸지만 무산됐던 오마도 간척 현장을 방문했다. 여기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전남 고흥 소재)엔 과거 국립소록도병원에 있던 음성 나환자들이, 당시 오마도간척지 공사를 하던 모습이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 형태가 말(馬)의 모습을 닮아 오마도(五馬島)라 불린 간척지는 소록도에서 직선거리로 5.5㎞ 떨어져 있다. 오마간척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봉암리), 도덕면(봉덕리, 오마리), 풍양면(매곡리, 안동리, 고옥리, 봉양리)에 걸쳐 있는 간척지다.

국립소록도병원 조창원 원장(20대 원장)이 "환자들의 자활 정착 사업에 도움이 되고 고흥지역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1962년 시작한 공사는 26년(1962.7~1988.12.30.)만에 완공됐다. 사업비 129억 5천만원이 들어간 간척 사업은 매립 면적이 1,070,4㏊(경지 714.5㏊, 시설부지 355.9㏊)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다.

1961년 5.16 군사정변(군사쿠데타) 이후 음성 치유자들의 사회 복귀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던 당시 정부와 소록도 당국에서는 음성환자 중 노동력이 있는 환자를 약 2천명으로 파악했다. 이들 1개 작업대 1천명을 2개조로 편성하면 사업 진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입구 모습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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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간척지 모습으로 왼쪽 바다 너머에 소록도가 보인다.
 오마도간척지 모습으로 왼쪽 바다 너머에 소록도가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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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공사 규모는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에 이르는 총 2753m를 중간에 있는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해 둑을 쌓는 것이다. 기대효과는 1천 정보(330만평)으로 소록도의 2배 크기의 농토가 새로 생겨나는 셈이었다.

당시 이곳에 음성 나환자 1500세대 및 일반 영세농가 1500세대를 입주시키면 벼 3만석, 보리 2만석 등 총 5만석의 양곡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자립 터전 마련할 희망에 열심히 일했던 환자들

간척공사는 먼저 가장 물살이 세게 흐르고 수심이 16m나 되는 풍남반도와 오동도를 잇는 제1호 방조제(843m) 공사에 300명, 폭이 가장 넓은 봉암반도와 오마도 사이의 제3호 방조제(1560m) 공사에 600명을 15일 동안 투입하고 대기조인 제2 작업대와 교대하는 2교대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말을 닮아 오마도라 불린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 앞에 5마리의 말이 세워져 있다. 오마도는  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을 말하며 간척 공사로 다섯 섬이 육지로 변했다.
 말을 닮아 오마도라 불린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 앞에 5마리의 말이 세워져 있다. 오마도는 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을 말하며 간척 공사로 다섯 섬이 육지로 변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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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력화차와  배에 돌과 흙을 싣고와 바다를 메우고 있는 인부들 모습으로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에서 촬영했다.
 무동력화차와 배에 돌과 흙을 싣고와 바다를 메우고 있는 인부들 모습으로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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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방조제 공사는 풍남반도의 백석리 뒷산을 헐어 레일을 깔아 무동력 화차로 토석을 실어 날랐다. 제3호 방조제 공사는 무인도인 만제도를 헐어 배로 실어다가 바다를 메워 나갔다. 양쪽의 토석 채취장에서는 다이너마이트의 폭음과 레일 위를 구르는 무동력 화차의 굉음이 조용하던 오마도를 뒤흔들어 놨다.

처음 이 공사가 헛수고가 될 것이라며 수수방관하던 오마도 주민들은, 공사가 본격 궤도에 이르자 자기들의 생활 터전을 나환자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며 공사를 중지시키려 들었다고 한다.

이에 병원 측에서는 환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공사의 빠른 진척을 독려하기 위해서 한하운의 시 <세월이여!>를 새긴 시판(詩板)을 세웠다. 이어 그 맨 마지막에 환자의 손가락 없는 장갑 모양을 검게 찍어 오마도 개척단 본부 사무소 앞과 중앙공원 입구와 녹동 선착장에 세웠다. 다음은 한하운의 시 일부분이다.
    
"이제, 깡통을 들었던 손은
이제, 씨앗을 뿌리는 손이 되고
이제, 문전걸식에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굽어 하늘을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오마간척한센인 테마관 뒷벽에 세워진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구 모습
 오마간척한센인 테마관 뒷벽에 세워진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구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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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원 원장이 직접 도안한 오마도 개척단 단기에는 바탕 중앙에 일부 손가락이 없는 손을 그려 넣고 그 위에 가로로 자루에 5개의 말발굽이 걸려 있는 곡괭이를 그렸다.

방조제 침강, 연이은 인명사고... 실의에 빠진 작업단

환자들은 작업 강도를 연일 높여 갔지만,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돌에 다쳐 손발이 짓이겨진 부상자가 날로 늘어났단다. 1963년 1월 8일에는 제3호 방조제인 봉암리 구간에서 흙더미가 무너져 1명이 압사하고 6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지 열흘도 안 되어 작업선이 뒤집히는 사고가 발생해 인부 한 사람이 익사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사고가 계속 발생하여 40여 명 중경상자가 생기고 공사에 투입된 환자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오마도 개척단기가  걸려있는 작업선에서 바다에 돌을 메워가는 인부들 모습
  오마도 개척단기가 걸려있는 작업선에서 바다에 돌을 메워가는 인부들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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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 간척지 공사모습.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에서 촬영했다.
 오마도 간척지 공사모습. 오마간척한센인 추모공원 테마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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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크고 작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2,3호 방조제의 투석공사가 모두 끝났다. 이어 성토공사가 한창이던 1963년 12월, 사흘 동안 돌풍이 불어닥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제1호 방조제는 10m나 침강했고 제2호 방조제와 제3호 방조제 공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물속에 잠겨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또다시 발생해 인부 한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방조제의 침강은 계속되는데 반해 당시 하루에 30원씩 지불되던 임금도 예산 부족으로 제때 주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오마도 공사는 주민들의 반발과 공사비 부족, 그 밖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그토록 애쓴 환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1964년 7월 25일 전라남도에 이관되고 말았다. 오마도 개척사업이 전라남도에 이관되자, 개척단 부원장 김형주는 1964년 5월 25일 국립소록도병원 5천 원생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국립소록도병원 음성 나환자들이 오마도 간척사업을 시작한 지 2년만에 전라남도에 이관되자, 국립소록도병원생 5천 명을 대표하여 개척단 부원장 김형주씨가 쓴 시구가 보인다
 국립소록도병원 음성 나환자들이 오마도 간척사업을 시작한 지 2년만에 전라남도에 이관되자, 국립소록도병원생 5천 명을 대표하여 개척단 부원장 김형주씨가 쓴 시구가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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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슬프도다! 오호 통재라! 5천 원생은 곡하노라! 우리의 비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를 1962년 7월 10일에 착공하였으나 세계적인 대 기만극으로 1964년 5월 25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소록도에서 치유된 후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있는 정착촌에는 아직도 7800여명의 한센인들이 살고 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남긴 구술록을 읽어 보면 이들은 정착과정에서 엄청난 차별과 멸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추모공원에서 오마도간척 현장을 떠나 소록도를 향해 가던 중 안타까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오마도간척지가 이들의 손으로 완공돼 불하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관련 기사: 정부의 대국민 사기극, 이 섬의 사연을 아시나요).

이들은 "우리 손으로 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남은 시간에 훨씬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오마도간척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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