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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끼고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섬진강을 끼고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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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의 악양 땅 평사리는 한국 문단사의 최고 역작 중에 하나인 박경리의 대표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섬진강을 끼고 중첩된 산을 지나다 의외로 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 곳이 평사리 앞 들판이다. 넓은 들이 있어 최참판 댁과 같은 부자가 나올 법한 곳이다. 평사리 마을 뒷산에 올라서 보면 오랜 세월 섬진강이 한곳에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항상 부대끼며 살아가는 스토리가 생기는 법이다. 박경리 선생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지>를 통해 그려냈는데 <토지>는 그녀가 25년간 집필한 대하소설이다. 토지의 이야기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하에서 최참판 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사와 민족사를 다루고 있다. 

<토지>는 대지주이자 몰락해 가는 양반인 최참판 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야기로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써 내려가듯 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 사람의 신념으로 이루어 놓은 의지의 결과는 실로 놀랍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박경리 선생은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유방암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이를 이겨낸 것은 토지를 써야겠다는 집념이었다고 한다.

이 <토지>를 원작으로 지난 1987년과 2004년에는 TV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평사리는 소설 속 최참판 댁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살았던 집들이 민속촌처럼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한장의 가족사진처럼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개성있게 잘 묘사하고 있다.
 한장의 가족사진처럼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개성있게 잘 묘사하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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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지난 2016년 박경리 문학관도 들어서 소설가 박경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곳을 많이 찾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고향 충무나 오랫동안 살았던 원주에 비해 이곳 평사리를 찾는 이유는 그의 대표작 <토지>가 주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박경리 문학관에 들어서서 눈에 띄는 그림이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묘사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한 장의 가족사진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출연자가 함께 서있는 듯한 이 그림은 소설 토지의 내용을 잘 함축하고 있다. 박경리 선생이 남긴 유품들 속에서 박경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서사가 담긴 문학의 힘이다.

조선말기 근대한옥 '화사별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조성된 담장이 운치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조성된 담장이 운치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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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에 가면 조선시대 양반가 고택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속 최참판 댁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평사리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실제 최참판 댁의 모델이 되었던 고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평사리 마을에서 악양면사무소를 지나 차로 5분가량 가다보면 성산마을이 나오고 마을 위쪽 비탈진 언덕바지에 고택이 한 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내판에는 '화사별서(花史別墅)'라 쓰여 있다. 별서는 농업을 근간으로 하였던 조선시대에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자신들의 토지가 있는 곳에 지은 별장과 같은 개념이다.

고택은 비탈진 길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곡선을 이룬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높은 석축으로 쌓아 조성한 연지가 눈에 띈다. 단을 이루고 깔끔하게 조성된 정원을 지나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전면 해체보수중이라 볼 수 없지만 세월의 때를 머금은 기와를 얹은 고택이 자리하고 있어 잠시 정지된 시간 속으로 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택은 일부 보수를 한 흔적들도 보이지만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담장과 지붕의 기와들, 안채의 풍경들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대문간에 들어서기 전 경사진 지형을 따라 곡선으로 조성된 기와가 얹혀진 담장이 일품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담장을 겸해 높은 석축을 쌓아 조성한 연지가 나오는데 약간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연지를 자세히 보면 밖에서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석축사이로 물길을 만들고 연지 옆으로 수로를 만들어 흘러 나가게 한 것을 볼 수 있어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설계하여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방형의 연지 가운데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진 작은 섬(석가산)을 만들어 전통정원의 모습을 재현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약간의 경사를 주어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일본식 석축기법 같기도 하여 1918년 완공된 것을 볼 때 일제강점기하라는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석꾼 조재희가 재건한 고택
 
연지를 조성할때 외부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배수로를 만든 조형기술이 뛰어나다.
 연지를 조성할때 외부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배수로를 만든 조형기술이 뛰어나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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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옆으로는 마을 뒤 형제봉 줄기에서 내려오는 한 물줄기가 계류를 이루어 흘러내리고 이 물줄기를 이용해 연지를 조성한 듯하다. 고택 옆으로는 담장을 끼고 석축이 예쁘게 쌓여진 내가 흐르고 있는데 그 모양이 정겹고도 아름답다. 조그마한 내를 건너면 '화사별서(花史別墅)' 라 쓰여 진 각자바위가 있다. 이 고택을 재건한 조재희가 1921년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현재 안채에는 조재희의 직계 후손이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의 정형화된 모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일상생활의 흔적들이 마당 앞과 집 주변에 널려 있어 진짜 최참판 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화사별서는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손인 화사 조재희(花史 趙載禧, 1861~1941)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별서의 이름이 조재희의 호를 딴 것이다.

화사별서는 1890년 초반 경 조성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1894년)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재희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겸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작은행랑채, 초당, 방지형 연못을 16년에 걸쳐 다시 재건하였다.
안행랑채는 상량에 「辛亥四月上四日壬甲巳詩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1년에 완공되었고, 안채의 상량에 「開國 五百二十七年戊午立柱上樑」이라 되어 있어 1918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처럼 근현대기를 이어가는 조선말기 근대한옥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고택의 주인이 살고 있어 아직도 최참판댁의 생생한 삶의 현장처럼 보인다.
 고택의 주인이 살고 있어 아직도 최참판댁의 생생한 삶의 현장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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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25년간 평생을 걸쳐 완성했던 우리 민족의 대 서사시였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25년간 평생을 걸쳐 완성했던 우리 민족의 대 서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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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토지, #박경리, #화사별서, #평사리, #박경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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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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