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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조선후기 천주교가 전래되고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면서 인간평등 사상이 제고되었다. 두 사상(종교)이 하나같이 중인 이하의 백성들에게 어필한 것은 신분과 성별을 넘어선 인간의 평등을 내세운 데 있었다. 주자학의 남성위주의 질서에서 여성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두 종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극심했다. 동학의 교주는 처형당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처형되었다. 무도한 탄압에도 두 종교는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천주교의 첫 여성 순교자는 누구일까?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의 여전도사이고 첫 순교자는 강완숙(姜完淑, 1761~1801)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양반의 서자 집안에서 태어나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다. 남편의 성품이 용렬하여 살뜰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 무렵에 천주교가 내포에까지 전해졌다.

마침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천주교'란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주(天主)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책을 구하여 읽어 보고 마음을 기울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니 매사에 열정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까지 전교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하여 신앙을 갖게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김옥희, <강완숙>, 박성수 외 <한국인의 원형을 찾아서>)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 그 앞으로 순교자 기념 경당이 위치하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 그 앞으로 순교자 기념 경당이 위치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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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은 천주교를 반대하는 남편과 헤어져 딸·시어머니·전처의 아들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에서 교인들과 접촉하면서 전도활동에 열중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기 이전에 벌써 서울에 도착하여 신부 영입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원으로 활약한 것 같다. 그녀는 주신부를 영입하는 데 소용되는 모든 비용의 거출이나 경비를 담당하였다. 주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은 주신부에게 정식으로 영세를 받았다. '콜롬바'라는 영세명을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달례, <한국교회사>)

강완숙은 세례명을 받고 얼마 후에는 여전도회장을 맡아 교세 확장에 나서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금압조처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 배후를 주문모에 두고 체포에 나섰다. 외국인이 불법 입국하고, 거기에 정부가 이단시하는 천주교를 전파하는 수령으로 지목한 것이다.

강완숙은 주 신부를 오래 동안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들통이 나면 목이 날라갈 일인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왕 영조에 비해 정조는 천주교에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으나 탄압은 계속되었다.

주 신부의 체포령은 철회되지 않아서 그의 초상화는 각 지방에 돌려서 현상금까지 붙어있었으므로 활동에 많은 불편이 있었으나 강완숙의 도움을 받는 주 신부의 지하 전교활동은 참으로 놀라웠다.

낮에는 교회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 편찬하고, 밤에는 교회의 사무를 돌보고, 1796년 9월에는 조선교회의 실정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들어간 밀사(황심:덕산출신)는 명주비단에 라틴어로 주신부의 보고서와 한문으로 쓴 조선 교도의 편지는 옷 속에 넣어 꿰매어가지고 이듬해 1월 북경 주교 구베아에서 전달했는데, 모두 강완숙의 내조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며 차츰 그녀의 활약사도 한층 폭 넓고 대담하게 펼쳐져 갔다.(이종수 편저, <한국근세여성사화 상>)

강완숙의 집은 천주교의 본거지처럼 알려지고, 초기 천주교도 황사영·정약용·정약종·황심 등이 드나들었다. 그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적 교류를 할 만큼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게 되고 신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개명군주라 일컫던 정조가 사망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 정순대비가 섭정하면서 나라에 칼바람이 불었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만들어 그 통 안에 천주교인이 들어오면 공동 처벌하는 금령이 실시되었다.

1801년 초부터 신유년 교난이 발발하여 신자들의 체포령이 내렸고 2월 24일 강완숙은 그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천주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잔악한 요녀로 취급되었다. 주신부의 행방을 찾는 관리들은 그녀에게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악형을 가했다. 그녀가 이와 같은 혹형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내하는 것을 목격한 형리들은 그녀를 '귀신'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김옥희, 앞의 책)

강완숙이 투옥되었을 때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많은 신도들이 붙잡혀 수난을 겪은 것을 지켜보고 은신처에서 스스로 나와 결국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옥중에서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강완숙은 열렬한 기도와 신심으로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였다.

드디어 그녀는 신자들, 즉 최인철·김현우·이현·홍정호·김연이·강경옥·한신애·문영인 등과 함께 5월 23일(양력 7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로 몸을 돌려 말하기를 "국법에서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하고 있으나, 여인들은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라고 하고 그 허락이 내려져서 옷을 입은 채 십자성호를 긋고 맨 먼저 머리를 형리들에게 내밀어서 참형이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44세였다.(김옥희, 앞의 책)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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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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