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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영화관에 갔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서울의 봄'은 할 말이 많은 사건이었다. 45년 전의 일이지만, 나에게는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 나의 삶에서 '그 악마의 봄'만 없었다면..."

이 글은 훗날 현대사를 다루는 연구자를 위해 '1979년 10월 26일에서 1980년 5월 20일까지 한 학생이 어떤 생각을 했던가' 회고하는 글이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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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서 들려온 조가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 무렵, 나는 광주 동구 충장로를 걷고 있었다. 그때까지 박정희는 살아 있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이 일어났듯이, 광주에서도 한 판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광주 운동권의 공론이었다.

당시 광주 운동권의 리더 윤한봉은 서광주경찰서에 연행돼 고문을 받고 있었고, 이강과 박형선 등 광주청년들은 충장로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모의하였다. 전남대학생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나는 투석전을 대비해 호박 만 한 돌덩어리를 광주천변에서 주워 날랐다. 정부미 포대에 담아와 충장로 곳곳에 뿌려놓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문국주 형도 이날의 거사에 참여하기 위해 충장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시위는 불발로 끝났다.

그 날 오후 10시 무렵, 우리는 남광주 시장 인근 여인숙에서 다시 모였다. 이강과 박형선 등은 '시위고 뭐고 그냥 다 잡혀가자, 누가 먼저 잡혀 갈래?' 하며 투옥 순번을 정하고선 잠에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누군가 밖에 나가 돌아오더니 그러는 것이다.

"라디오에서 조가(弔歌)를 틀어야. 이상해야."

그 순간까지 우리는 박정희 시해 사건을 몰랐다.
 
1979년 11월 7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1979년 11월 7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 80보도사진연감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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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없이 광주를 떠났지만

1979년 7월, 제헌절 특사로 출옥하면서 나는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학생운동은 나의 과거였고, 노동운동은 나의 미래였다. 왜 공장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무렵, 나는 '학생운동만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 그리하여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10월 26일 충장로 시위가 불발로 끝나자, 나는 미련 없이 광주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광주를 떠나 인천으로 가자."

1979년 12월 12일, 나는 인천의 부평, 백마장 인근의 가구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목재를 자르고, 접착제로 붙이고, 뻬빠로 문지르고, 칠을 하고, 다시 문지르고, 다시 칠을 하고, 닦고, 문지르고, 칠했다. 노동을 스무 번 반복하자 번지르르 광택이 나는 가구가 탄생했다.

동시에 노동자의 몸은 목재의 부스러기며 먼지로 범벅이 된다. 점심으로 고춧가루 한 점 붙어 있는 깍두기를 먹었고, 돼지에게나 주어야 할 시래깃국을 먹었다.

그 무렵 나는 한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면 구로동으로 달려갔다. 구로공단 소재 태평섬유엔 위장 취업한 여대생이 일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내가 구로로 가는 시각에 애인은 부평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태평섬유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외출하고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눈은 내리고, 나는 발걸음을 부평역으로 돌렸다. 부평역을 나오는데 저만치서 눈에 익은, 긴 머리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오는 것이었다.

만만치 않았다. 대학생이 노동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에 붙들려 있는 것은 '시지프스의 고역'이었다. 노동을 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잖은가?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 조직을 하기 위해 들어왔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대학생이 노동자의 의식을 깨우치고,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이 견디지 못하였다. 1979년 12월 하순경, 나는 독감으로 공장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만두고 싶었다.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공장을 나온 내가 부끄러웠다. 마침 긴급조치 9호로 제적당한 학생들에게 복학 조치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는 대학의 문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당시 76학번의 이원주는 77학번의 김명인, 현무환, 채영선 등과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이원주와 77학번의 언더 팀은 복학생들을 경계했고, 나는 학생운동의 의사결정 과정에 낄 수 없었다. 감옥에 갔다 온 77학번들은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는 77학번들에게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우리는 학생운동 지도부가 무엇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지 듣지 못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마이크를 잡은 연사들로부터 시국에 관한 의견을 들었을 뿐이다. '국민을 앞서 가는 투쟁을 자제하고, 국민의 호응을 얻는 투쟁을 벌이자'는 주장과 '대학생들의 끓어오르는 열기에 찬 물을 끼얹지 마라. 광화문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 왔다.

전통적으로 학생운동에서는 투쟁론과 신중론이 상호 대립, 논쟁을 벌여 왔는데, 전자는 신중론이었고, 후자는 투쟁론이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가 견지했던 신중론은 이러하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유신독재체제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앞으로 민주진영과 반민주진영 간의 격돌이 전개될 것이다. 12.12 쿠테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정권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조직은 아직 약하다. 국민대중은 민주정부의 수립을 열망하기는 하나 행동으로 나서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투쟁을 이끌 유일한 세력은 학생운동이다.

학생회의 부활을 추진하되 지하 지도부가 운동의 중심을 잡아가야 한다. 지하 지도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서울역 회군은 누가 결정했나

그렇다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은 누가 결정한 일이었을까?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의 언더를 맡았던 현무환으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들어 보자.
 
서울역 광장의 미니버스가 현장지휘부가 되었다. 그곳에서 심재철 등 10여 명의 총학생회장들이 회의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 언더 지도부들은 학생회 간부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버스 옆에서 맴돌 뿐이었다. 총학생회장단과 협의할 수도 없었고, 어떤 결정을 전달할 수도 없었다.

군부대가 이동하는 중이라는 정보도 들려왔다. 총학생회장들은 행동지침을 마련하느라 숙의를 거듭했다. 중앙청으로 진격하느냐, 여의도 광장으로 후퇴하느냐, 아니면 서울역 광장에서 철야농성을 하느냐를 놓고 격론이 오고 갔다.

오후 7시 50분 신현확 총리가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 일정을 국회와 협의하여 앞당기겠으니 학생들은 믿고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또 격론이 오고 갔으나, 안전귀가와 연행학생 석방을 약속받고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이 그렇게 내려지고 그렇게 발표되었다. 10여 명의 총학생회장들의 토론 과정에 그 누구도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서야 나는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만큼 전두환은 군사반란의 진행과정을 국민에게 철저히 은폐한 것이다. 전두환의 군사반란에 대항해 싸운 장태완 장군이 있었다면, 전두환의 반란에 맞서 들고 일어선 시민이 있었다.
  
1980년 5월 20일, 계엄군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200여 대 차량시위.
 1980년 5월 20일, 계엄군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200여 대 차량시위.
ⓒ 황종건(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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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광주의 민중은 분노했다. 구두통을 던지고, 쇠망치를 들고, 차량을 무기삼아 공수부대에게 돌진하였다. 이날 오후 10시 경 공수부대는 시의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시위 군중에게 포위를 당한 공수부대원들은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새벽 4시, 광주 민중은 시청과 광주역을 장악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대 캠퍼스로 패퇴했다. 지금 광주 시민들은 '서울의 봄' 2부작을 고대하고 있다.

태그:#서울의봄, #박정희, #서울역회군, #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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