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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기자는 지난 1994년 2월 <한겨레21> 창간팀에 합류해 <한겨레>에서만 30년 일했다. 지금은 사회부 현장기자로 일한다.

그는 지난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해 언론과 학계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25년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취재와 연구를 바탕으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내기도 냈다. 이밖에도 그는 <대한국민 현대사>, <유혹하는 에디터>, <글쓰기 홈스쿨>, <굿바이 편집장> 등의 책을 썼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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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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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최근 <본 헌터>라는 제목의 새로운 책을 펴냈다. '본 헌터'는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이메일 주소에서 저자가 따왔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봐도 나오지 않는, 한국어 조어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런 새로운 단어를 저자가 박 교수의 양해를 구한 뒤 책의 제목으로 썼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본'(Bone, 뼈)에서 시작한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성재산에서 발굴된 유해 중 하나가 독백 하는 형식으로 저자는 첫 글을 썼다. 식별번호 A4-5로 분류된 이 유해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 유해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유해를 발굴한 사람은 누구인지를 하나씩 밝히면서 저자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결국은 한국전쟁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뒤늦게 시작한 유해발굴이 어떤 경로를 밟게 됐는지가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다음은 이 책과 관련해 지난 11일부터 12일까지 저자와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쪼그려 앉은 채 발견된 유해
 
고경태 기자
 고경태 기자
ⓒ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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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9년부터 25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대한 연구를 하고 글을 썼는데, 어떤 계기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베트남 전쟁과는 오래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기의 학살지 지명보다 베트남 전쟁기의 학살지명이 익숙할 정도다. 그래도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은 더더욱 모르고 지내왔고.

'본 헌터'를 쓰게 된 것은 지난해 4월 사회부 현장기자로 간 뒤 긴 호흡의 논픽션을 연재할 생각을 하면서부터다. 그때 생각한 아이템이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전쟁기 유해를 추적하는 글이었다.

충남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결과를 기자단에 공개한 행사가 지난해 3월 29일에 있었는데, 그 보도에서 접한 사진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나중에 A4-5라는 이름이 붙은 그 유해는 쪼그려 앉은 채 나왔는데 표정까지 살아있는 듯 했다. 아마 유해발굴의 역사에서 그런 형태로 나온 경우는 최초일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 저렇게 생생하게 세상에 나왔는데, 법의학적인 방법을 통해 저 사람의 신원을 밝힐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걸 따라가다 보면 전쟁 이야기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거였다.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힌 사람은 법의학자가 아니라 체질인류학자였다.

그리고 내가 사회부에서 일하면서부터 출입한 곳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아래 진화위)였다. 그 유해 발굴에 책임을 진 곳이 바로 이 진화위였으니,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진화위 출입하며 여러 한국전쟁기 사건을 접한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발굴 유해
 발굴 유해
ⓒ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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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비슷한 점은?

"전쟁에서의 학살을 논할 때 자꾸만 양민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을 들이댄다는 점이 비슷한 것 같다. 그 전쟁들로부터 각각 70여 년(한국전쟁), 50여 년(베트남전쟁)이 됐는데도, 아직까지도 그 죽은 사람들이 양민이냐 아니냐 갖고 시시비비를 따지려고 한다. '양민'이라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 2000년 베트남전쟁 보도할 때도 처음에는 '양민학살'이라는 말을 무심코 쓰다가 '민간인 학살'로 바꿨다. 민간인이 법적 개념이다.

'선량한 사람'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일까? 불량한 사람은 죽여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적법한 절차를 밟았느냐 아니냐인데, 어떤 사람이 설사 죽을 죄를 진 범죄자라 하더라도 아무런 절차 없이 산에 끌고 가 총 쏴 죽이고 함부로 묻어서는 안 되는 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법이다.

전시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시에도 법이 존재한다. 그것이 불가피했든 안 했든 사후에라도 바로잡아야 하고, 그래서 현재 진화위라는 기구와 사법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죽였다.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을 마을 한복판에 끌고 와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족이기에 더 잔악한 묻지마 학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에 비하면, 한국전쟁에서는 아는 사람들을 철저히 골라 죽인 셈이다. 어느 편이냐도 중요했지만, 사적 감정이나 이해관계도 많이 작용했다. 때로는 혐의자 한 사람 뿐 아니라 젖먹이를 포함해 딸린 가족들까지 다 죽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는 사람들을 골라 죽인 일이 베트남에서의 묻지마 학살보다 오히려 더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 같기도 하다.

아무튼 베트남전쟁이든 한국전쟁이든 베트콩에 협조를 했느니 안 했느니,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부역을 했느니 안 했느니, 그래서 죽일 만 했느니 안 했으니, 뭐 이런 걸로 유치한 시비를 거는 점에서는 판박이로 똑같다."
 
발굴된 유해
 발굴된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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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가장 힘들었던 일은?

"글을 쓰기 전 한국전쟁에 대해 무지했다. 기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논문과 책을 읽었고, 진화위의 각종 보고서, 유해발굴 보고서 그리고 국가기록원을 통해 받은 여러 자료들을 읽었다. 그리고 박선주 교수님을 10회 가량 인터뷰했고, 전쟁기 학살을 몸소 체험한 당사자와 유가족을 인터뷰했다. 글을 쓰면서 정말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글을 완성하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글의 포인트를 어떻게 정하고, 어떻게 중심을 잡을지를 정한 뒤 거기에 맞게 내가 습득한 정보들을 재구성하고 배열했다. 하나의 글을 쓰면 그 글이 어떤 계기가 되어 또 다른 글감을 물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몰랐던 역사를 많이 배웠다. 자료에는 존재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그 자료를 가지고 글을 쓰면 최초 보도가 되는 경우였다. 가령 충무공 종손 이응렬의 이야기가 그렇다. 충무공의 후손들이 전쟁 직후 부역 혐의로 대거 희생된 이야기들은 한 번도 공식 보도가 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내가 배우면서, 내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는 점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힘든 점은, 글쓰기 자체다. 글쓰기는 언제나 어렵고 힘들다."

- 한국전쟁기에는 왜 같은 민족인 남북한 모두가 어른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고 보나?

"한겨레 선배이시기도 한 홍세화 선생님을 인터뷰해 아산에서 어린 시절 겪은 경험을 이번 책에 넣었는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일부가 나오긴 했으나 자세히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거기에 보면 '새지기'라는 곳에서 그야말로 마을 사람들이 또 다른 마을 사람들을 '멸족'을 시킨다. 죽은 사람 집을 차지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에 책을 쓰면서 한국전쟁기에 이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전쟁과 함께 기존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바뀌는 무중력 상태에서 모든 이성의 불이 꺼지고 증오만이 폭발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공주 상왕동 실구쟁이 한국전쟁 중
 공주 상왕동 실구쟁이 한국전쟁 중
ⓒ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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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 중엔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 현재도 인터뷰를 거절한 분들이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 분이 그랬다. 이 분은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신 분인데. 나는 당연히 응하실 줄 알았는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동안 심경의 변화를 겪으신 것 같은데, 대학 다니는 전도유망한 손주가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는데, 가족들의 학살을 직접 겪으신 분들은 굉장히 민감하다고 한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주의 전체세력 운운하는 발언을 할 때 이 분들이 많이 위축됐다고 한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가해자 다수가 지금도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거나 사과에 아주 인색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가해자 개개인에게는 가해에 대한 인정과 사과가 자기 인생을 부정하고, 자신의 관계망을 파괴하는 일일 것이다. 또 사과를 하려면, 그것이 정말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설령 잘못되고 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 기저에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고, 게다가 지금은 그 흐름이 주류 권력층에 있다고 본다. 개인을 넘어 국가가 사과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고."
 
박선주 교수가 연구실에서 유해를 정리하는 모습
 박선주 교수가 연구실에서 유해를 정리하는 모습
ⓒ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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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이 되어가고 있는 진화위

- 수많은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그 유족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은?

"진화위에 사건을 신청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족 및 신청인들로 한정해 말씀을 드린다. 매듭지어지지 못한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아직도 고통 받는 분들께 처음에는 경외의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갈수록 실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지난해 6월 김광동 진화위 위원장이 영락교회에서 한 발언을 상기해보면 된다.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은 '전쟁상태를 평화상태로 만들기 위해 불가피하게 초래된 희생'이었다. 그때는 말만 했는데 지금은 이 말을 적극 실행에 옮기면서 한국전쟁기 사건 진실규명이 안 되거나 늦춰지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목소리를 내야 할 유족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은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더 치명적인 결과를 당할 수도 있는데 아직 정확하게 인지를 못하시는 듯하다. 이 부분이 안타깝다."

- 한국전쟁이 오늘 우리들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나?

"미움과 혐오겠다. 예전에는 반공을 넘어 멸공이라는 말을 썼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미워하고 혐오하라'가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이었다. 그게 한국전쟁의 결정적 유산 아닐까?"

- 대통령 윤석열이 임명한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 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진화위 위원장이 해야 하는 일은 위원회 설립 취지에 맞는 공정한 법 적용이라고 생각한다. 위원장이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보수 인사가 균형을 잡고 더 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합리적인 보수 인사가 위원장 자리에 온 적은 없다.

김광동 위원장에 대해서는 책에서 별도의 챕터로 한 편의 글을 썼다. '네 이름은 광동이다'로 글이 시작한다. 지금은 진실을 밝히는 기관이 아니라 수사기관이 돼 가고 있다. 조사와 수사는 다른데, 지금의 진화위는 수사를 하고 싶어 한다. 진화위가 부역자수사위원회로 탈바꿈하고 있다."
 
박선주 교수 왼쪽과 저자 오른쪽
 박선주 교수 왼쪽과 저자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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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은이), 한겨레출판(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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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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