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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화순 구암마을에 들어서 있는 김삿갓 동상. 그가 말년을 보낸 압해 정씨의 종갓집 앞이다. 주변에 삿갓문학동산도 조성돼 있다.
 화순 구암마을에 들어서 있는 김삿갓 동상. 그가 말년을 보낸 압해 정씨의 종갓집 앞이다. 주변에 삿갓문학동산도 조성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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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권문세도를 통해 나라의 신하였던 김익순아 들어 보아라. 가산의 정 군수는 문관이면서도 오히려 충사를 하였다.……

임금을 잊어버리고 조상까지 잊어버린 너는 한 번은 고사하고 만번 죽어 마땅하다. 도대체 역사의 준엄한 필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너의 치욕스런 일은 이 나라 역사에 길이 전해지리라. 

어느 학동보다 총명했던 소년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관아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쓴 글이다. 이 소년은 1811년 홍경래난 때 최후의 순간까지 충절을 다하다 죽은 가산군수 정공을 찬양하는 한편,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의 비겁한 죄상을 탄핵하는 글을 지어 당당히 장원을 차지했다.

가혹한 운명이었을까.

공교롭게도 백일장의 시제(詩題)가 김병연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가차없이 매도한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친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듣고 크게 충격받았다. 

그는 하늘을 처다볼 수 없는 천형의 죄인으로 스스로를 단죄하면서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직 창창한 22살 되던 해의 일이다.

김병연은 천륜을 어긴 불효막심한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처자식을 남겨 둔 채 집을 나섰다. 조상을 욕한 후손이라 스스로를 단죄한 나머지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출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국의 이태백·두보와 함께 동양 3대 방랑시인으로 꼽히는 김삿갓의 방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생애는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늘 떠도는 방랑 인생이었다. 초라하고 고단한 그의 방랑벽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매도한 것에 대한 속죄의 고행이고, 삶에 대한 고뇌의 발로였다. 

김병연은 조선 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당시 권문세가로 이름을 떨치던 장동 김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운명은 한 빼어난 민중 시인, 풍류객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그토록 가혹한 시련을 내렸다.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난 때에 관군에 항복함으로써 그의 집안은 풍지박산의 위기에 휩싸였다. 결국 김익순은 처형되고 자손들은 구사일생으로 멸문지화를 모면하게 되었다. 김익순의 노복이 용케 병하·병연 형제를 남몰래 황해도 곡산 땅으로 데려가 거기서 키우며 공부를 시켰다. 

그 후 조정에서는 주죄(主罪)는 김익순에게만 한하고 그 자손은 폐족하라는 명을 내렸다. 비로소 형제는 경기도 땅에 숨어 사는 부모와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홧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어렵게 형제를 키우다가 자식들이 조상의 일을 모르게 하려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이사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병연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글공부를 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뙈기 농사로는 공부를 가르치기가 힘겹기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었던지,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던 김병연은 마을 서당에서 귀동냥으로 글을 깨우쳐 훈장에게 칭찬을 받곤 하였다. 

그러던 중 관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나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시제가 할아버지를 매도하는 내용이었다. 병연은 그런 사연도 모르는 채 만고의 충신을 흠모하는 마음과 비굴한 죄인을 경멸하고자 자신의 의분을 섞어 멋지게 써 내려갔던 것이다. 

환희의 순간은 짧았고 폐륜의 아픔은 길었다.

어머니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게 된 김병연은 삿갓에 지팡이 하나를 들고 정처없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그에게는 온갖 풍상을 겪은 어머니와 자신의 글공부를 도와준 형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갖 태어난 장남 학균이 있었다. 그는 이런 모든 세속의 인연을 끊고 집을 떠난 것이다. 

나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 데
녹수야 너는 어찌 내려오느냐.

김삿갓이 어느 해 여름 금강산의 이곳 저곳을 걸으며 흥에 겨워 즉흥시 한 수를 읊은 것이다. 

꿈틀대는 양심을 꾹 참고, 모른 체 하며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면 될 일이었다. 뒷날의 일이지만 매국노·친일파 후손들 중에는 조상의 죄상을 모른 체 하면서, 오히려 당당하게 변명하면서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더러는 기록(역사)까지 바꾸려 획책하였다. 

김삿갓은 정처없이 떠돌다가 인정 있는 사람을 만나면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날은 배고픔과 추위에 익숙해져야 했다. 백성들의 생활 역시 곤궁하여 막걸리 한 사발,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면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속에서도 김삿갓은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면서 정처없는 발길을 걸었다.

 사각 소나무 반에 죽 한 그릇
 하늘빛 구름 그림자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차린 것 없다 미안해 마오
 나는 물에 비친 청산을 즐기고 있소.

유랑생활 36년, 김병연은 발길 닿는 대로 그야말로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이 떠돌았다. 출가한 지 2년만에 잠시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생활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가눌 길 없는 한과 방랑의 기벽은 어쩔 수 없어 다시 떠나야 했다. 오라고 한 사람도, 딱히 갈 곳도 없었으나 가야만 했다. 

이때 태어난 둘째 아들 익균이 아직 아비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강보인 것을 남겨 두고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전라도 화순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의 시 경향은 해학·서정·관조적 허무가 특징을 이룬다. 특히 해학은 시에 따라 풍자·기지·독설·골계·냉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해학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서당은 일찍부터 알았다고
 방 안에는 모두 잘난 것들 뿐이다
 생도는 다 해야 열도 안 되는데
 선생은 나와 얼굴도 뵈지 않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생도제말십 선생내불알)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서당에 들렸더니 선생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만 앉아서 떠들고 있는데, 아예 걸인 취급이었다. 그는 시 한 수를 지어 훈장 자리에 놓고 훌훌 떠났다. 한자를 우리말로 읽어보면 지독한 욕이 된다. 그는 이처럼 한시에 한글의 음을 달아 상대를 골려 주는 해학을 즐겼다. 

또 어느날 지방의 서당에 들렀다가 훈장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는 시 한수를 지어서 던져 두고 나왔다. 

 하늘 '천'자 관을 벗어 점을 하나 얹고
 이어 '내'자 지팡이를 잃고 띠를 하나 둘렀네.

天脫冠而得一點 乃失杖而橫一帶.
(천탈관이득일점 내실장이횡일대)

하늘 천(天)에서 관을 벗고 점을 하나 얹으면 개 견(犬)이 되고, 이에 내(乃)에서 지팡이를 잃고 띠를 하나 얹으면 아들 자(子)가 된다. 즉 훈장을 '개자식'이라고 욕하는 내용이다. 

김삿갓의 진정한 존재가치는 세속의 규범에 거침이 없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는 데 있었다. 그러면서 시대적 질곡에 저항하면서 학대받고 착취당한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문은 먹물들끼리 주고받는,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공리공담이 아닌 백성들의 소리를 대변하고 저항하는 민초의 외침이었다.

전국을 방랑하며 맘 내키면 즉흥시를 썼던 김삿갓. 풍자와 해학으로 부자와 권세가를 조롱하고, 백성들과 설움과 아픔을 함께한 뛰어난 민중 시인이며 천의무봉의 풍류객이었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김병연,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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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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