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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
 구미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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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에서 만난 항일열사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여름, 독립지사 후손인 김중생(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 선생과 이항증(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선생의 알뜰한 안내를 받으면서 중국 대륙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항일 유적지를 답사할 때였다.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간 뒤, 그곳과 상하이 일대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다음, 중국의 동북 삼성(3省, 옛 만주 일대) 일대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가장 먼저 답사한 곳은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 의거지였다.

그곳에서 하얼빈 동포 사학자 서명훈 선생의 현지 안내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하얼빈 역 플랫폼을 둘러본 뒤, 다음 답사지는 옛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이었다. 그곳 지하실에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고문을 당한 곳으로 일송 김동삼 선생도 일경에게 체포 후 여러 날 고초를 겪었단다. 우리 일행이 들린 1999년까지도 지난날의 일제 악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동북열사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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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열사기념관

다음 답사한 곳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북열사기념관(東北烈士紀念館)이었다. 그곳은 일제 총칼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항일열사를 모신 곳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합방한 후, 중국의 동북 삼성에도 침략하여 무수한 백성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물자를 수탈해 갔다.

당시 동북의 군벌 정부는 부패·무능하여 일제에 방관 또는 도망치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고는 그 세력에 빌붙어 살았다. 하지만 당시 동북의 의로운 인민들은 스스로 항일 전선을 만들어 일제에 맞서서 가열찬 투쟁을 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며칠씩 굶어가며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처절한 대일 항쟁을 펼쳤다. 항일 빨치산으로 일제 총칼에 죽어간 사람, 철창 속에서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

해방 후, 중국 인민정부에서는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자 항일 열사들이 고문을 당했던 하얼빈 경찰서를 동북열사기념관으로 만들어 항일 열사들의 영정을 세우고, 그 영정 아래에 열사들의 유품과 행적을 기록해 모시고 있었다.

서명훈 선생은 여기에 모셔진 일백여 분 항일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차순덕… 등 32분이 우리 동포 항일 열사들이라고 일러주었다. 동행한 이항증 선생이 나에게 귀띔했다.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에요."
"네?"


나는 순간 몹시 놀랐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했는데, 먼 이역 북만주에서 고향 어른을 만나다니...

솔직히 나는 '허형식'이란 함자를 그때까지 몰랐다. 뒤늦게야 문헌을 들춰보니, 허형식은 1909년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난 바, 항일 의병장으로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의 조카였다.
 
왕산 허위 13도 군사장
 왕산 허위 13도 군사장
ⓒ 허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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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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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움

경북 구미 임은동 허씨 집안은 왕산 허위 선생을 비롯하여 범산(凡山) 허형(許蘅) ·방산(舫山) 허훈(許薰) · 성산 허겸(許蒹) 등 여러 독립지사들이 활약한 쟁쟁한 항일 가문이었다. 특히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도로 명을 '왕산로(旺山路)'라고 명명한 얘기를 듣고, 그 순간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 왕산로를 대학 재학 중 날마다 지나다녔다. 그러면서도 동대문 옆 창신동 뒷산이 왕산이라서 그렇게 도로명을 붙인 줄로만 알았다. 더욱이 내 고향 구미는 박정희가 태어난 친일 고장이라는 친구들로부터 험담을 들을 때마다 내 고향은 충절의 고장이라고 항변하였지만, 그들은 내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내 고향 구미 금오산이 낳은 수많은 충절의 인물 얘기를 귀에 익도록 들으며 자랐다. 영남학파의 우두머리 야은(冶隱) 길재(吉再)·사육신의 하위지(河緯地)·생육신 이맹전(李孟專)·그밖에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등 숱한 선비들이 금오산 자락에서 자란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라고 들려주신 바, 이를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겨 왔다.

그런 충절의 고장이 왜 근현대사에는 충절의 인물이 없을까 의문으로 지냈다. 그런 가운데 한국뿐 아니라 중국(만주)에서도 절세의 항일 투사가 순국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치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만난 듯 반가웠다.

귀국 후 그 부끄러움과 반가움에 이화여대 중앙도서관을 뒤지면서 관련 서적을 대출받아 골똘히 의병사 및 독립운동사를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기념관 발행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호에 실린 당시 성균관대학 동아시아학술원 장세윤 교수가 쓴 '허형식 연구' 논문과 신주백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를 읽었다.
  
그에 따르면 허형식 장군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라는 점,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 전술 분야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 북한의 최용건 · 김책 · 김일성 등과 대등할 정도로 항일 전선에서 고위 간부로 활약했다는 점으로 높이 평가했다.

장 교수는 특히 허형식 열사는 1941~42년, 그 무렵 다른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러시아로 월경했으나, 허열사는 단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든 적이 없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만주 땅과 동포를 지키다가 일제 토벌군에 장렬히 산화했다면서 정신면에서는 다른 어는 항일연군 지도자보다 오히려 앞섰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다음 회 계속)
 
허형식 장군이 황동한 만주벌판
 허형식 장군이 황동한 만주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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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순국> 2024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항일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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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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