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지리산 자락의 화엄사 각황전. 웅장함을 뽐내는 각황전이 터를 잡은 자리엔 60권의 화엄석경으로 장식된 장육전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화염에 휩싸여 장육전 건물이 소실되며 석경 또한 조각나고 유실됐다. 1만4천여 점으로 흩어진 석경 파편에서 천 년 전의 웅장함을 떠올려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런 우리 문화유산이 소실돼 잊히지 않게끔 보존하고 되살리는 사람을 만나봤다. 문화재 보존과학자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화재도 병원이 필요해
하삼마을, 중삼마을, 상삼마을 순으로 이어지는 충북 옥천읍 삼청리의 끝자락. 삼청 저수지 위에 자리잡아 용암사를 지붕 삼은 상삼마을의 새벽을 깨우는 이가 있다. 지난해 5월, 상삼마을의 새 주민이 된 김지영(44)씨다.
새벽 4시부터 달칵, 불이 켜진다. 가족이 있는 대전에 들렀다가 새벽께 다시 옥천으로 돌아온 김지영씨가 어두운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집을 잠시 비운 사이 바깥과 다를 것 없어진 집안 온도에 얼른 난방을 올린다. 거실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따뜻한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그의 하루가 시작된다.
"저는 문화재 보존, 그중에서 보존 상태를 진단하는 일을 해요.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가장 먼저 맨눈으로 주변환경과 문화재를 살펴보고, 지난 이력을 조사하죠. 그리고 나선 장비를 이용해 세밀한 상태를 진단하고서 결론을 내요. 어떤 게 문제니 이런 방식으로 치료·보존하면 된다, 이렇게요."
진단과 예방, 보존방안 제시까지가 그의 일. 진단 이후는 문화재 수리 기술자들의 영역이다. 언뜻 들으면 퍽 낯선 분야 같지만, 알고 보면 문화재 보존 일은 우리 주변에 늘 있었다. 최근 경복궁 낙서를 지우는 복원 작업도 김지영씨의 동료들이 했다.
"문화재 보존 분야는 문화재 소재의 다양성만큼 많아요. 나무, 섬유, 금속 등 소재마다 손상 양상도 다르니까요. 저는 돌, 석조 보존을 전공으로 하고 있어요. 얼마 전 경복궁 낙서 사건에 투입된 분들도 문화재 보존 일을 하는 분들이죠. 저랑 같이 공부한 동료들도 현장에 투입됐더라고요."
문화재 진단 작업은 짧게 잡아도 8개월은 걸린다. 문화재 크기와 개수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보존환경까지 고려해 진단하는 경우에는 사계절을 모두 관찰해야 하기에 최소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적잖은 인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문화재가 오랜 세월을 견뎌내 우리에게 닿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인 수많은 손길이 있었다.
8세기 신라 석공의 마음으로
김지영씨의 전공은 석조 보존. 돌로 된 문화재는 야외에 놓인 경우가 많기에 그의 현장은 주로 푸른 하늘 아래다. "사실 문화재 보존과학자로 일하다 보면 책상 앞에서 연구하고 글 쓰는 일이 대부분"이라는데, 직접 문화재를 볼 수 있는 현장이 더 즐거운 그다.
김지영씨가 석사과정을 시작했을 무렵인 2000년대 초반. 이 시기에 학계에서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모여 현존하는 석조 문화재 전수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또한 지도교수, 선배들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석조 문화재 조사에 참여했다.
"5년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에 2년 정도 참여했어요. 아침 7시부터 해지기 직전까지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부속 하나 빠트리지 않고 조사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저는 이제 막 대학원 입학한 상황이었으니까 지도교수님과 선배들한테 과외받듯이 다녔어요. 덕분에 공부가 정말 많이 됐죠."
박사 학위 취득 이후 업무로 만난 문화재 중 당시 조사했던 문화재를 재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화재 특징과 환경은 어떠했고, 암석은 어떤 종류가 있었는지 등 조사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문화재 진단 작업에 도움을 받았다.
문화재 보존과학자로서 많은 문화재를 마주해왔을 김지영씨. 그래도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은 매번 새롭다.
"문화재라는 게 단순히 오래된 물건 이상의 의미가 있잖아요. 우리나라 문화재 중 대부분은 불교문화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당시 살던 이들의 신앙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고요. 진단할 때 문화재를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와닿아 감동하곤 해요."
최근 그가 연구하고 있는 문화재는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 60권의 화엄경을 새겨넣은 화엄석경엔 무려 49만7천여 개의 글자가 조각됐다. 글자의 동형반복을 피해 심미성까지 고려했다는데, 지금 같은 기술 발전이 없던 8세기 신라에서 이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그렇게 완성된 화엄석경이 장육전 벽면 가득 둘러싼 풍경은 이를 바라보는 이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21세기의 김지영씨에게 생경한 감상을 불러낸다.
문화재 전달자로서의 사명
"제가 다루는 문화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우리가 문화재를 향유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미래의 사람들까지도 누릴 수 있도록 전달해 줘야 하기 때문이죠."
김지영씨는 박사 학위 취득 이후 영국 옥스퍼드에서 기후변화를 주제로 연구(국내 석조유산의 기후변화 영향: 연구동향과 미래전망, 2016)를 수행했다. 2010년 전후 문화재 보존과학계에서도 기후변화가 잠시 조명을 받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랬기에 김지영씨가 기후변화 연구를 수행했던 2014년은 문화재 보존과 기후변화의 연결이 아직은 낯선 시기였다. 그가 기후변화를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미래세대가 문화재를 향유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기후변화 100년 후엔 정말 어떤 상황일지 모르잖아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질 거예요. 그렇기에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죠."
기후재난 상황이 이어지면서 최근 들어 문화재 보존 영역에서도 그 중요성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지난해 7월 문화재청이 기후변화로부터 국가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종합계획 '풍수해(호우·태풍·강풍 등) 등 기후변화에 선제 대응 위한 3개 전략과 6개 핵심과제'를 발표한 것도 그 예.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재 기후변화 연구가 시작될 것"이라는 김지영씨의 얼굴에서 안도와 함께 기대감이 물씬 풍긴다.
그는 기후변화에 대응한 문화재 보존이 국내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유럽의 경우 2010년대부터 기후변화 관련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경우 여전히 이에 대응할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 "한국은 이제라도 기후변화에 대응하려 하니 다행이지만, 아직 경제발전에 바쁜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관심 밖의 사안"이라는 게 김지영씨의 우려 중 하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이라면 수십 년 후에도 살아남는 건 서구권 문화재가 대다수일 거예요. 후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줄 수 없을지도 몰라요. 사실 지금의 기후위기를 초래한 건 선진국이잖아요. 그러니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서는 국제협력이 더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대의 사람들에게 풍부한 문화재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요."
커다란 책상 위 김지영씨가 꾹 눌러쓴 글씨 가득한 노트와 문화재 사진이 인쇄된 종이가 차곡히 놓였다. 그 위로 바삐 움직이는 건 펜을 쥔 그의 손이다. 지질학, 생물학, 미술사 등 공부할 것이 산적한 문화재 보존과학. "쉴 때도 미술사 관련한 책을 자주 본다"는 그의 말에서 학문과 현장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난다. 김지영씨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낸 문화유산은 앞으로 또 어떤 세월을 보내게 될까. 그의 소망처럼 오래도록 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길 바라본다.
월간옥이네 통권 80호(2024년 2월호)
글‧사진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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