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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조니워커'씨의 모습은 1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해 보였다.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과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도 그 안정감을 가릴 수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조니워커씨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오르막에 숨은 차지만 꼭 맞는 등산복을 입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숲길을 오르는 자의 모습과 같았다.

3월 19일, 2024학년도 교육과정 설명회에서 40여 명의 양육자를 대상으로 고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에 관한 발표를 하던 중이었다. 교무부장인 나는 학년 부장인 그녀가 준비한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학교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각 학년에 교육과정의 구성과 시행에 대한 권한을 전적으로 부여하고, 자율성과 동시에 책무성을 지운 체제이기에 그랬다.
 
우리 학교의 철학과 기조를 설명하고 있다.
▲ 교육과정 설명회 우리 학교의 철학과 기조를 설명하고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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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워커'의 탄생

"선생님의 별명은 뭔가요?"
"아... 저요? 조니...워커요."
"예?"


내가 별명을 묻자 그녀는 수줍은 듯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조금 섞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상표명이기에 눈이 먼저 커졌다. 그런데 3초가 채 되기 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앞 두 글자는 그녀의 이름과 관련이 있고 뒤 두 글자는 그녀의 특성과 밀접했다.

"아하.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겠어요. 그런데 walk예요? work예요?"
"둘 다..."


이번에도 같은 눈빛으로 대답하는 조니워커씨의 말에 근처에 있는 사람들 몇과 함께 크게 웃었다. 그리고 동의했다. 지난 1년을 보아하니 등산이나 걷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의 불을 밝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학기 초인 요즘 퇴근을 모르는 사람처럼 일한다.

별명을 만든 이유는 나의 요청 때문이었다. 방학 중 워크숍에서 전체 교원을 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던진 생떼에 가까운 숙제였다. 다음 주 전체 모임에서 모든 교사의 별명과 작명 이유를 듣게 될 텐데 매우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가 직접 지은 이름을 가지신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개명하신 분은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름이란 어쩌면 가장 대표적인 나의 정체성이고 평생 지칭되는 호칭인데 내가 살고 싶은 인생과 내가 원하는 이상향을 담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특히 우리는 아이들에게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람들인데 이곳에서 함께 일할 때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지향과 철학을 담아 만든 별명으로 소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많은 분이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이젠 별걸 다 시킨다며 농을 던졌다. 한바탕 웃고 나서 거듭 부탁을 드렸고,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순간 변하는 선생님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알게 된 별명이 조니워커라니, 30명의 별명을 한 데서 나눌 때 얼마나 화기애애해질지 벌써 기대가 된다.

작년 이맘때의 조니워커씨는 참 어두운 표정이었다.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 하던, 참 열심히 일하는 교사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적응하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반에 15명 밖에 되지 않지만 너무도 다른 15개의 인생이 존재하는 게 우리 학교의 모습이다.

입시라는, 모두가 대동단결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한창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야 하는 나이에 눈 가린 경주마처럼 달려야 하는 아이들은 병들어가겠지만 말이다. 고운 마음씨를 가진 조니워커씨는 색상은 물론이고 채도와 광도가 모두 다른 15개의 인생을 외면할 수 없었고 마음을 다해 상담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삶이 힘들었던 한 학생으로 인해 스무 번이 넘는 위기관리위원회가 열렸다. 그 과정 속에서 담임교사였던 조니워커씨는 성취감과 배신감 사이에 놓인 외줄 위에서 위태롭게 왔다갔다 했다. 오로지 보람만 준 학생도 많았으나 절대적인 감정 소모의 양은 절대로 적지 않았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새로운 교육과정을 짜다 보니 수도 없는 회의가 열렸다. '인턴십을 통한 배움', '낭독', '통합기행' 등 우리 학교가 직접 만든 교과를 구성할 때면 교사와 학생, 양육자들 모두 한데 모여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모두 모여 조니워커씨를 만들었다. 지난해에 1학년부에서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서 신학기에는 오히려 1학년부를 책임지는 부장 보직을 맡게 됐을 때 모든 동료는 그녀를 걱정했다. 신뢰했지만 걱정했다. 잘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걱정했다.

하지만 교육과정 설명회에서 화려한 데뷔전을 마친 조니워커씨를 보고, 이제는 모두의 마음에 순수한 기대심과 경외심이 가득 찬 듯하다. 그만큼 그날 그녀는 멋졌고 단 1년 만에 대안교육(우리는 진짜배기 교육이라고 믿는다) 전문가 냄새가 진득하게 밴 모습을 보여줬다.

조니워커씨가 보여 준 가치와 가능성

다시 교육과정 설명회로 돌아가 보자. 조니워커씨는 약 40분간의 시간을 통해, 지난 1년 동안의 1학년 교육과정을 종합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1년에 대한 전망과 가치를 제시했다. 모든 양육자는 빨려들 듯 그녀에게 집중했고 무언으로 지지했다.

그 공간에 있는 분들의 눈빛은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돼 있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빛깔이었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주중에 학교에서 살고 주말에 귀가한 아이들이 쏟아놓은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평가인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통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1학년 교육과정은 '나를 사랑하기'에 집중되어있다.
▲ 발표 자료 1학년 교육과정은 '나를 사랑하기'에 집중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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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가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
▲ 발표 자료 우리 학교가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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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워커씨는 지난 1년 동안 교사들이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과정을 걸어왔는지에 대해 신나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알고 있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는지 말이다.

매주 월요일 방과 후에 모여 3시간에 가까운 협의를 했다. 목요일 1교시에는 사감 선생님과 상담교사, 학생부장 교사까지 함께하는 관망회(관계안전망회의)를 진행했다.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 하나하나 세세한 이야기를 모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비단 작년 한 해만의 것이 아니다.

지금은 전체적인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니 이렇게 시간을 투자하고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 시기를 지나 안정적인 순환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매년 이렇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직면할 수는 없다. 새롭게 맡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일정한 틀이 완성되면 좋겠다.
 
회복적 정의를 기반으로 한 생활교육
▲ 발표 자료 회복적 정의를 기반으로 한 생활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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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료를 보면 조니워커씨를 비롯한 1학년부 교사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점쟁이처럼 아이들을 대했던가. 지난 학교에서 어떤 선배 교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교사는 사기꾼이 돼야 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얘기해야 애들을 휘어잡을 수 있어"라고

물론 그분의 말씀도 아이들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교사가 학생을 만날 때 가져야 할 철학과 기준이다. 1대 다수의 만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면 우리는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이 일대일로 만나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위 교육 자료에서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1학년 통합기행 시간별 기록
▲ 발표 자료 1학년 통합기행 시간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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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료는 2023년 1학년 통합기행 교과의 시간별 기록이다. 우리 학교는 수학여행이 없다. 대신 학년별로 통합기행이라는 교과가 존재한다. 1년짜리 수업이 3년 동안 있는 것이다. 일회성의 여행이 아닌, 다양한 교과와의 융합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 생태적, 자율적 여정을 기획하는 수업이다.

지난해 1학년 통합기행은 우리 교육과정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3월부터 교사와 학생들은 만경강 탐사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구간별로 나누어 사전답사를 진행하고, 교사는 그에 앞서 사전답사를 위한 사전답사를 했다. 목적은 아이들이 직접 여정을 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구간마다 직접 걸으며 보고 들을 것과 익힐 것들을 구성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9월에 있었던 [영화 <수라> 감상] 과정이었다. 만경강 탐사 종착지인 군산에서 일어난 세계 최대의 생태파괴 현장을 알아버린 것이다. 동시에 '아름다운 것을 본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수라 갯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그 아름다움에 갇혀버렸다.

10월 중순에 떠나야 할 통합기행의 활동 내용에 많은 것이 추가됐다. 환경을 사랑하는 예술가를 모시고 솟대를 만드는 과정을 진행했다. 기행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마지막 남은 갯벌에 손수 제작한 솟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남겼다.
 
전문가가 제작한 틀에, 아이들이 직접 만든 바다 생물 모형을 부착하고 있다.
▲ 솟대 설치 전문가가 제작한 틀에, 아이들이 직접 만든 바다 생물 모형을 부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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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같은 목적의 장승이 많지만 유일하게 밝은 모습의 구조물 덕에 최근 명소가 되고 있다고.
▲ 솟대의 모습 주변에 같은 목적의 장승이 많지만 유일하게 밝은 모습의 구조물 덕에 최근 명소가 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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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 개발 중 어떤 것이 옳은가도 중요하겠지만 학교 교육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갈 지구와 주변의 생명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함께 겪었지만 현재 2학년으로 올라온 아이들의 마음이 다 똑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상생을 원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출세를 원한다. 조니워커씨를 비롯한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억지로 주입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다양한 생각 속에서 자라난다.
 
양육자들에게 하는 당부
▲ 발표 자료 양육자들에게 하는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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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워커씨는 마지막으로 양육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더 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양육자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나 자신으로서 나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기'라는 과제를 비단 학생에게만 주지 않고 양육자들에게도 드린 것이다.

대안학교는 학생들만 성장하게 두지 않는다. 교사, 학생, 양육자가 모두 함께 성장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조니워커씨가 바로 그 증거이다. 또한 1년 만에 부쩍 어른티가 나는 우리 아이들과, 그들을 믿고 지지해주는 양육자들의 변화된 모습도 그러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교육언론창>에도 실립니다.


태그:#교육, #미래교육, #공립대안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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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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