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 제공한 김하일씨의 '설독' 사진 모습. 설독이란 혀를 이용해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으로 한센병으로 시력과 손마디를 잃어 점자해독이 불가능한 김하일씨가 혀를 이용해 문자를 해독하는 모습이다.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 제공한 김하일씨의 '설독' 사진 모습. 설독이란 혀를 이용해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으로 한센병으로 시력과 손마디를 잃어 점자해독이 불가능한 김하일씨가 혀를 이용해 문자를 해독하는 모습이다.
ⓒ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 기관은 무엇일까? 눈? 점자를 읽기 위한 손가락? 그렇다면 눈과 손가락 모두 장애를 입은 사람은 어떤 기관으로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까? 정답은 혀다. 혀로 통해 글자를 해독하는 '설독(舌読)'.

3월 말 소록도의 모태랄 수 있는 일본 '전생원' 자료관에 들러 전시된 '설독(舌読)'사진 한 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고개가 숙여졌기 때문이다.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이 있는 전생원은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아오바초 4-1-13에 소재하고 있다.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개관하지만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 날은 휴관한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한 만성 감염증이다. 감염해도 꼭 발병하지는 않고 현재는 발병 자체가 드물다. 또 만일 발병해도 급격하게 증상이 진행되지 않는다.

증상 자체는 반점과 지각마비다. 치료약이 없던 시절에는 변형을 일으키거나 낫더라도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변형된 외모 때문에 사회로부터 꺼려져 왔었다. 현재는 유효한 치료약이 개발되어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에 의해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고칠 수 있게 되었다.

한센인의 명예 회복과 인권 존중을 위한 자료관

한센병자료관은 1993년에 설립됐다. 일본 '토후협회'가 40주년을 맞아 한센병 환자와 회복자가 살아온 증거를 남기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사회에 호소할 목적으로 1993년 6월 '타카마츠노미야기념 한센병자료관'을 설립한 게 그 시작이다.

한센병에 관한 지식의 보급과 이해를 촉진하고 한센병과 관련된 차별 배제의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자료관에는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차별, 특히 잘못된 격리 정책의 역사를 학습하고 고난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체험과 마주하기 위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는 3월 2일부터 9월 1일까지 한센병환자의 그림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센병환자들의 작품집 '그림 그리는 게 우리들의 전부였다'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나타낸 표현이 응축된 말이다.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는 3월 2일부터 9월 1일까지 한센병환자의 그림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센병환자들의 작품집 '그림 그리는 게 우리들의 전부였다'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나타낸 표현이 응축된 말이다.
ⓒ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1층 사무실, 연수실, 영상홀을 거쳐 2층에 올라가면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과 도서실이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한센병의 역사, 환자와 회복자의 생활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시실1 '역사전시'
일본의 한센병을 둘러싼 역사를 정책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 2 '나병요양소'
치료약이 나오기 전을 중심으로, 요양소, 안의 환자들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 속에서 생활했는 지를 아홉 가지 측면에서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3 ' 살아온 증거'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 살아남은 환자와 회복자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방문한 분들이 환자와 회복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것들도 전시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강제격리국 일본

한센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형으로 불렸다. 극심한 신체 훼손과 고통, 피할 수 없는 죽음, 가족 및 사회와의 강제격리, 차별 및 혐오로 인한 낙인으로 한센병자의 삶은 죽음보다 더한 가시밭길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등국', '문명국'을 자처하며 한센병 유병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1904년 일본 통계에 의하면 당시 나환자 수가 3만359명에 달했다. 1906년 법의학자이자 중의원 의원이었던 야마네 마사츠쿠가 '나예방법안'을 제출했고 이듬해인 1907년 '나예방에 관한 건'이라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 법을 근거로 전국에 5개의 격리시설이 세워졌으며 1909년에는 강제격리가 시작됐다. 이 법에는 퇴소에 관한 규정이 없어 종생격리도 가능해졌다. 1915년 공립요양소인 전생원 원장 '미츠다 겐스케'는 결혼을 원하는 환자들에게 단종수술을 시행했다.

1916년 개정된 '나예방에 관한 건'은 나요양소 원장에게 환자들에 대한 징계검속권이 부여되어 소장의 명령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시설 내 감금이나 감식 등의 처벌을 받았다.

부랑 한센병 환자에게만 실시됐던 강제격리는 1931년 '나예방법'이 개정되면서 그 대상이 모든 한센병 환자로 확대됐다. 1936년 내무부는 '한센병 20년 근절계획'을 수립하고 '무라현운동' 즉, 한센병 환자 없는 마을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다.
  
2020년 WHO 가 발행한 전세계 한센병 발병국 현황으로 시커멓게 칠해진 국가에서는 아직도 1만명 이상의 환자가 있다.
 2020년 WHO 가 발행한 전세계 한센병 발병국 현황으로 시커멓게 칠해진 국가에서는 아직도 1만명 이상의 환자가 있다.
ⓒ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근대국가는 우생학의 이름으로 국민의 신체를 관리했고 한센병자는 열성 신체, 비정상 신체로 여겨 국가가 관리하는 요양소에 격리되었다. 요양소의 본질은 수용소였고, 격리의 실체는 강제 영구 격리였다. 한센병자는 세상과 유리되어 죽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불온한 존재, 즉 비인간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나병증세를 보인 한반도 환자만 하더라도 3천명에 이르렀다. 1916년에 세워진 소록도 한센병요양원도 일본의 법제도와 강령을 그대로 따랐다.

일본국립한센병 자료관에는 재일교포 3세인 김귀분씨가 근무하고 있다. 북해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박물관 학예연구원을 목표로 대학원을 마친 후 한센병 자료관에 2005년에 취직했다.

대학원에서는 한국의 서예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박물관 입소자의 문화 활동이나 미술 제작에 대해 관여했고 입소자분들 중에 한국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국인 입소자분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일본 전국에 산재한 14개 한센병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한국인 한센병 자료를 조사하던 중 출판사에서 이 주제로 책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책을 출판했다. 그녀가 쓴 책은 <재일조선인 한센병>이다.

그녀의 책에는 전국에 산재한 일본한센인요양소에 입소한 한국인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일본어로 발간된 책 속에는 한국인 한센병자들의 절절했던 사연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귀분씨가 한국인 환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경에 있는 일본국립한센병에는 재일교포 3세인 김귀분(좌측)씨가 근무하며 자료관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해설하고 있다. 올해 80세인 기무라씨는 필자를 위해 3일 동안이나 동행하며 통역과 안내를 맡은 양심적 지식인이다. 두분 옆에 세워진 모녀상은 과거 한센병이 불치병이라고 두려워하던 시절 시코쿠 순례를 떠난 한센병 환자의 동상이다. 모녀상은 한센병 환자들의 고난의 역사를 사회에 알리고 다시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바램으로 1991년 다마전생원 진언종에서 발원해 전국에서 기부 받아 완성됐다.
 동경에 있는 일본국립한센병에는 재일교포 3세인 김귀분(좌측)씨가 근무하며 자료관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해설하고 있다. 올해 80세인 기무라씨는 필자를 위해 3일 동안이나 동행하며 통역과 안내를 맡은 양심적 지식인이다. 두분 옆에 세워진 모녀상은 과거 한센병이 불치병이라고 두려워하던 시절 시코쿠 순례를 떠난 한센병 환자의 동상이다. 모녀상은 한센병 환자들의 고난의 역사를 사회에 알리고 다시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바램으로 1991년 다마전생원 진언종에서 발원해 전국에서 기부 받아 완성됐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재일교포 3세  김귀분씨의 저서  <재일조선인 한센병> 모습. 한국어판이 없어 아쉬웠다.  책에는 일본 전국에 산재한 14개 한센병요양소에 입소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재일교포 3세 김귀분씨의 저서 <재일조선인 한센병> 모습. 한국어판이 없어 아쉬웠다. 책에는 일본 전국에 산재한 14개 한센병요양소에 입소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일본 전국에 요양소가 생기고 나서 지금까지 700여명의 한국인 환자가 입원했었고 현재는 30명 정도가 입원해있어요. 이미 입소자의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어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적었기 때문에 과거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해서 집필했습니다."
 

일본에서 한많은 생 마감한 김하일의 기구한 삶

김귀분씨가 선물해준 <재일조선인 한센병>책을 받아 들고 필자를 안내해준 기무라 선생님과 함께 밤10시 까지 글을 읽던 중 김하일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둘 다 눈시울을 적셨다. 

1926년 경상북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하일은 1939년에 일본에서 노무자로 일하던 부친의 편지를 받고 모친, 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겨우 13살이었다. 낮에는 과자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며 조선에서 할 수 없었던 공부를 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5살에 한센병이 발병해 1941년에 전생원에 입소하게 됐다. 1945년 공습에서 불길의 습격으로 실명하게 되었고 일본 문학 형태인 '단가'를 배웠다.

한센병으로 손마디가 잘리자 '설독'을 통해 자신의 한많은 생을 그려냈다. 해방 후 이산하게 된 어머니와 형제들, 병에 걸린 자신 때문에 귀국도 못하고 일본에 머물다 타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것들도 그의 시세계에 포함되었다. 다음은 김하일의 '단가' 중 한편이다.
 
한국에 함께 돌아가자 말하는 형이지만 나병 걸린 이 몸은 언제나 말이 없네
어머니 태운 기차소리 멀리서 울려오는데 나는 홀로 병실로 돌아오누나
고원의 추위 견디라고 솜넣어 만들어주신 버선에서 어머니 생각이 나네
어머니 생각 잊지 않기 위해 조선식 버선 신어보고 다시 또 가방에 넣네
 
'인간이 죽어야 생명이 산다'는 한센병환자 호조다미오의 소설<생명의 초야>

필자가 전생원을 방문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한센병문학의 최고봉'으로 꼽았던 '호조다미오'의 소설 속 배경을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조다미오'는 육군 경리부 하사관이었던 부친의 부임지 조선의 경성(서울)에서 1914년 출생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성(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돌아가 20세에 발병해 21세에 전생원에 입원해 24세에 생을 마감한 '호조다미오' 모습.  일본 문학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호조다미오를 '한센병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칭찬을 했다. 필자는 그의 저서 <생명의 초야> 배경을 알고 싶어 전생원을 방문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성(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돌아가 20세에 발병해 21세에 전생원에 입원해 24세에 생을 마감한 '호조다미오' 모습. 일본 문학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호조다미오를 '한센병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칭찬을 했다. 필자는 그의 저서 <생명의 초야> 배경을 알고 싶어 전생원을 방문했다.
ⓒ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호조다미오는 20세에 한센병 확진 판정을 받고 21세에 전생원에 입원해 24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한센병은 한센병자에게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타자의 영역이다. 그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고 한센병자로서 살아가기까지의 비극적 과정이 <생명의 초야>에서는 생생히 그려져있다. <생명의 초야>는 호조다미오가 전생원 입소 첫날 자살을 시도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일본은 1996년까지 한센인을 강제 격리시켰고, 이에 일본 한센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정부로부터 끝내 사과와 보상을 받았다. 일본 한센인과 소송 변호단 그리고 시민단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서 행해졌던 한센인 강제격리에 대한 일본의 책임까지 물었다.
 
한국 -대만 소송지원 현수막. 2005년 재판 결과 한센병보상법이 개정되어 한국과 대만사람들도 보상을 받게 됐다. 이 현수막은 재판을 지원하던 일본 한센병요양소에 사는 재일교포 입소자 단체가 제작한 현수막이다.
 한국 -대만 소송지원 현수막. 2005년 재판 결과 한센병보상법이 개정되어 한국과 대만사람들도 보상을 받게 됐다. 이 현수막은 재판을 지원하던 일본 한센병요양소에 사는 재일교포 입소자 단체가 제작한 현수막이다.
ⓒ 일본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맨 오른쪽이 나가사키에서 동경까지 비행기를 타고와 3일간 안내를 맡은 기무라씨고 기타를 들고있는 분은 기무라씨 여동생 남편으로 50년간 지인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하는 전직 건축설계사이다. 동경에사는 기무라씨 여동생 부부는 이틀간이나 필자에게 맛있는 음식과 쾌적한 방을 제공해줬다. 올해 80세인 기무라씨는 소설 <태백산맥>을 두번이나 읽고 합천에 있는 원폭희생자 마을에서 한 달간 봉사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한국인 징용희생자 유골 반환운동을 하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한 분이다.
 맨 오른쪽이 나가사키에서 동경까지 비행기를 타고와 3일간 안내를 맡은 기무라씨고 기타를 들고있는 분은 기무라씨 여동생 남편으로 50년간 지인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하는 전직 건축설계사이다. 동경에사는 기무라씨 여동생 부부는 이틀간이나 필자에게 맛있는 음식과 쾌적한 방을 제공해줬다. 올해 80세인 기무라씨는 소설 <태백산맥>을 두번이나 읽고 합천에 있는 원폭희생자 마을에서 한 달간 봉사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한국인 징용희생자 유골 반환운동을 하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한 분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일본과 대만은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차별 역시 국가의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국가가 인정했지만 한국은 국가 책임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대한 성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한센병환자로 낙인찍히면 국가와 가족, 사회에서 버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취업과 학업에도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한센병에서 치유된 사람을 '회복자'라고 칭한다. 반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해 낙인을 찍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한센인이라고 부른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전생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