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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포토뉴스

앞으로는 이 텐트가 우리 집이다. ⓒ 이수지
여름 흥이 깨져버린 장흥리 캠핑장엔 아무도 없었다. 널찍한 잔디밭 한구석에 반 평 크기의 텐트를 쳤다. 침낭을 깔고 하루 종일 짐을 나른 가여운 등을 뉘었다. 커다란 모기 한 마리가 얼쩡대다 텐트에 달린 모기장을 뚫지 못하고 달아나버렸다. 오렌지색 텐트천 사이로 저무는 햇살이 스며들었다. 앞으로는 이 텐트가 우리 집이다. 집에 다 왔다. 아늑하다.

샤워를 하고 노트북에 일기를 썼다. 오늘 걸은 거리 17km. 소요시간 7시간 22분. 학수고지 가는 길에 징검다리 위로 물이 넘쳐 난감했지만, 노동당사에서 귀찮다고 매점에 들르지 않은 터에 반나절 동안 마실 물이 없어 고생했지만, 잠시 방향을 잃고 헤매긴 했지만 어쨌든 목표한 곳까지 왔다. 17km. 긴 거리는 아니지만 첫 날 치고는 잘 해냈다.
물이 넘쳐 흐르는 징검다리. ⓒ 이수지
한쪽 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자다 팔이 잘려 나갈 것 같은 저릿함에 잠에서 깼다. 얄팍한 텐트 천과 여름용 침낭은 땅바닥의 딱딱한 질감과 축축한 느낌을 고스란해 전달했다. 머리를 갠 오른팔이 다시 저려왔다. 정자세로 누워 텐트 천장에 달린 어둠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다시 모로 누웠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저릿한 팔의 외침에 눈이 번쩍. 텐트 천장에 달려있던 어둠에 오렌지빛이 조금씩 어렸다. 새벽이다.

"한 숨도 못 잤어."

나의 불평에 더스틴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너라고 잘 잤겠니. 문이 있고 자물쇠가 있고 침대가 있던 '진짜 집'에서도 잘 못 자던 넌데. 미식가의 혀처럼 민감한 넌데. 더스틴의 한숨 속에 그의 지난밤이 묻어났다. 딱딱한 바닥에 몸을 뒤척이다, 야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불안해하다, 앞으로의 잠자리를 걱정하다, 이 여행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급기야는 이 세계와 우주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다 점점 뚜렷해지는 텐트의 네온색을 바라보며 지금처럼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캠핑용 버너에 닭가슴살과 강낭콩 통조림을 들이붓고 끓였다. 통조림째 날로 먹는 것과 끓여 먹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어디 한 입. 음... 우리는 서로를 보며 껄껄껄 웃었다. 너무나 맛이 없는 나머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백마고지 혈전 때 이런 걸 먹었을까. 그래도 어제 배를 곯으며 걸었던 생각이 나 싹싹 비웠다.

밥을 먹었으니 커피를 마실 차례. 각각 20.5kg, 12.5kg이 나가는 배낭안에 커피라고 없을 리 없다. 마트에서 천 원 주고 산 캠핑용 커피 티백을 끓였다. 접이식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따랐다. 훗.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단 말야. 태블릿 PC로 전자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상쾌하게(?) 맞이한 아침, 휴대용 컵에 따라 마시는 커피. 맛은…. 커피향이 살짝 스치는 뜨거운 물?
캠핑용 버너를 꺼내 닭가슴살과 강낭콩 통조림을 들이붓고 끓였다. 정말 맛없는 게 어떤 건지 먹어보고 싶은 분에게 추천. ⓒ 이수지
햇살에 데워진 물에서는 뜨뜻한 나무 맛이 났다

목이 말랐다. 종일을 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 마을에서 물을 사두지 않은 게 낭패였다. 더스틴 배낭에 꽂힌 물병을 빼냈다. 물병 바닥엔 물이 반 모금 정도 남아있었다. 햇살에 데워진 물에서는 뜨뜻한 나무 맛이 났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더스틴이 내 손에서 빈 물병을 낚아챘다.

"딱 한 방울 마셨어!"


더스틴과 나는 물병을 사이에 두고 남은 물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음…. 뭐 그래. 내가 반절 조금 더 마신 거 인정. 물병 벽에 묻은 작은 물방울까지 입안으로 탈탈 털어내려 애쓰는 더스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복잡했다. 물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우리가 한심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어깨의 통증이 느껴졌다. 배낭은 온 세상이라도 되는 듯 내 두 어깨를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배낭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봤다. 배낭. 여행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만 추출해 넣은 압축품. 내 배낭은 과연 온종일 걸으며 들고 다닐 가치가 있는 필수불가결한 물건들의 압축품인가? 사흘 전에 싼 배낭 안 물건들을 곱씹어봤다. 나침판. 대한민국 전도. 휴대용 스피커. 알레르기 치료제. 근육통 파스.

분명히 쓸모가 있을 물건, 당장은 쓸모가 없겠지만 언젠가는 꼭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물건들로 배낭을 채웠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걸어본 후의 결론은 이러하다. 내 배낭 속 물건들은 딱히 없어도 되는 게 분명하며 당장에 쓸모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물건들의 총집합이다.

나침판? 신대륙을 찾아 항해를 떠난 콜롬버스도 아니고 동서남북을 왜 알아야하지. 대한민국 전도? 국토종단 계획 단계에서라면 모를까, 측량비율이 터무니없이 커서 걸어다닐 땐 아무 소용이 없을걸 알면서도 가져온 이유가 뭐였더라. 휴대용 스피커는 대체 왜…. 첩첩산중 오지를 몇날 며칠 걸을 것도 아닌데 알레르기 치료제는 필요할 때 시내 약국에서 사면 되는거 아니니? 파스…. 근육통을 걱정할 게 아니라 애초에 근육이 덜 아프도록 해야하는거 아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딴 물건들, 딱히 없어도 살 수 있고 앞으로 쭉 쓸 일이 없을 쓰잘데기 없는 짐들이 아니야. 진짜 필요한 건 물이야. 물, 물이 필요하다고!
승일교. 노동당사처럼 철원이 북한이었을 때 북한에서 건설을 시작한 다리다. 다리가 반쯤 완성되었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다리는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한의 소유가 되었고, 58년이 되어서야 남한의 자본으로 완성되었다. ⓒ 이수지
한탄강에서 물고기 구경 중인 해병대 할아버지와 점심 준비 중인 아주머니들. ⓒ 이수지
물집 잡힌 더스틴과 먹을 거리가 없는 우리

더스틴 발에 물집이 잡혔다. 물집이 잡힌 왼발이 땅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려는 더스틴의 몸짓은 탭댄스 첫 수업을 듣는 사람처럼 어색하고 애처로웠다. 아무리 뒤뚱거려봐도 발에 난 물집이 땅에 닿지 않게 하는 건 무리였다. 물집이 땅과 마주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자그마한 바늘 삼백개가 온몸 전체를 찔러대는 느낌이라나. 더스틴은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트레킹화와 양말을 벗어 양 손에 들었다. 그리고 쪼리를 신었다.

"쪼리 신으면 더 아프지 않아? 등산화랑 양말을 신어야 그나마 쿠션감이 있지."
"더 아프라고 신는 거야. 물집과 신발, 신발과 도로 사이 간격을 최소화해서 물집이 가능한 한 땅에 더 많이 디디도록 해야해. 그래야 계속 아파. 계속 아프면 익숙해지겠지. 익숙해지면 아픔에 무뎌질테고."


걸을수록 더스틴의 등허리는 조금씩 굽어졌다. 등산화를 쥔 두 손이 공중으로 펄쩍펄쩍 뛰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내 등짝이 다 짜릿짜릿하다. 계속 아프면 무뎌진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더 큰 고통을 줘서 상대적으로 작은 고통을 잠시 잊게 한다면 모를까. 긁어내는 고통으로 간지러움을 덮어버리는것처럼.
더스틴 발에 물집이 잡혔다. 물집이 잡힌 왼발이 땅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려는 더스틴의 몸짓은 탭댄스 첫 수업을 듣는 사람처럼 어색하고 애처로웠다. ⓒ 이수지
문혜리를 나와 1시간을 걸으니 문혜사거리다. 그리고 문혜 2리. 그 다음은 문혜 3리. 문혜4리…. 문혜리 한 번 오지게도 크다. 어제는 그래도 17km를 걸었는데. 오늘은 걸어도 걸어도 GPS앱의 거리측정량이 좀체 늘어나질 않는다. 문혜 2리와 3리를 걷는 사이 더스틴의 물집은 두 배로 자라났다. 걷기는커녕 발을 딛고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인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항의라도 하듯 시커먼 하늘을 노려봤다. 문혜 4리 버스 정류장으로 가 비를 피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오늘 밤 몸을 구길 곳을 구해야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조금 더 걸었다. 작은 교회가 보였다.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물집 환자 더스틴을 교회 앞 마당에 앉혀두고 교회 윗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자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가 등장했다. 여자의 어깨 뒤로 푹신한 소파가 보였다. 집 안으로 달콤한 믹스커피 향내가 돌았다.

"무슨 일이세요?"


동그란 안경 속에 담긴 여자의 두 눈이 나를 훑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여자가 교회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불편하게 텐트에서 자지 말고 교회 방에서 하룻밤 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염치는 없어 마당에 텐트를 쳤다. 비가 쏟아졌다. 지붕 달린 주차장 쪽으로 텐트와 짐을 옮겼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비가 슬라이트 지붕 위로 떨어졌다. 후다닥 후다닥. 빗소리는 우렁찬데 머리 위로는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문혜리 도로변. ⓒ 이수지
객사를 면하고 나니 허기가 올라왔다. 배낭 안에 남은 식량은 에너지바 두 개.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라면이라도 사와야 한다. 상점의 향방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윗집 문을 두드렸다.

"이 근처에는 가게가 없는데 어쩌나…. 뭐가 필요하신데요?"
"라면 같은 거 좀 사려고요."


나는 이불에 오줌을 지린 벌로 소금을 얻으러 온 애마냥 쭈뼛댔다. 서른 넘은 나이에 혼자 힘으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해 쭈뼛거리고 있다니. 여자는 잠시 사라지더니 5분 후 커다란 쇼핑백과 함께 등장했다. 쇼핑백은 묵직했다. 여자는 내일 아침까지 넉넉히 먹으라며 쇼핑백을 건넸다. 공짜 음식을 얻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라면 하나 미리 챙겨두지 못한 건 우리 잘못인데, 해결해주는 사람은 왜 타인이 되어야 하나. 우리의 의지로 걷자고 온 여행인데, 어쩌다 뒷감당은 너그러운 타인의 몫이 되어버렸을까.

우울한 심정이 되어 텐트로 돌아갔다. 더스틴은 엉덩이를 씰룩대며 텐트 안에서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더스틴의 엉덩이를 툭 쳤다.

"이거 봐."
"뭐가 이렇게 많아?"
"근처에 가게가 없데. 내일 아침까지 두고 넉넉히 먹으래."

쇼핑백 안에는 우리의 상황을 짐작해봤을 여자의 사려깊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갈증과 더위를 풀어줄 반쯤 얼린 보리차 한 통. 넉넉한 식량이 될 라면 네 개와 밥 두 덩이, 계란 여섯 개. 곁들여 먹을 갓김치 한 포기. 입가심할 포도 세 송이. 비상식량이 될 초콜릿 한 봉지. 둘이 삼일은 족히 먹을 양이다.
문혜리에서도 옥수수 두 개를 얻어먹었다. ⓒ 이수지
"돌려 드리자. 이렇게 많이 필요 없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동의하는 바이지만, 선뜻 그러지는 못하겠다.

"내일 분명 아쉬울 텐데. 또 먹을 거 못 구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이걸 다 들고 다닐 순 없어. 그리고, 도움은 청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받을 건 없잖아."

네 말이 맞다. 도움을 청할 순 있지만, 폐가 되어선 안된다. 내일의 끼니를 생각한 욕심은 고스란히 어깨 위로 올라와 짐이 된다. 오늘 이상의 시간, 내일과 그 후를 걱정하는 건 지금의 우리에겐 욕심이고 오만이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면서도 윗집 살림살이에 크게 축이 나지 않을 음식, 밥 한 덩이와 갓김치 한쪽만 덜어낸 후 쇼핑백을 돌려드렸다.

"바늘 있지? 이렇게 하래. 바늘을 불에 달군다. 물집 부위를 깨끗이 씻는다. 소독한 바늘로 물집 가장자리를 짼다."

더스틴이 스마트폰으로 물집 제거 방법을 검색했다. 캠핑용 버너로 바늘을 달군 후 손소독제로 닦아냈다. 작은 물집이라면 발을 잘 씻고 누워있으면 되지만 더스틴의 물집은 결코 작지 않고, 우리는 오랫동안 누워있을 팔자도 못된다. 째야 한다.

깊고 깊이 박힌 두꺼운 물집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수십번의 시도 끝에 기어코 터진 물집을 짜냈다. 가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터뜨리는 것보다 짜내는 게 더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아아아아. 더스틴의 신음을 듣다, 주차장 처마 위에서 요동치는 빗소리를 듣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스틴이 드디어 미쳤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네 물집때문에 웃는 거 아니야. 좋아서 웃는거야. 이틀을 걸어서 얻은 거라곤 물집과 허기와 마른 땅바닥뿐이지만 그래도 좋아서. 사정을 봐주지 않는 도로의 비정한 차들은, 물집의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따금 타인의 친절이 단비처럼 내려 우리를 구해준다는 게. 이틀간 고작 27km를 걸었지만 그래도 그만큼의 거리는 우리의 의지였다는 게. 우리는 어쩌면, 의외로 강할지도 모른다는 게. 서울을 떠난 후 처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불안하지 않다. 예감이 왔기 때문이다.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부산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터뜨리고 짜낸 물집. ⓒ 이수지
얻은 음식. 둘이 삼 일은 족히 먹을 양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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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