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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원주로 가서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뵈었다. 또 이날 오후에는 '원주선언 30주년' 행사에 참석해 그날의 의미를 많은 지인들과 더불어 되새겨보기도 했다.

박 선생님을 만나뵈러 갈 때마다 젊은 사람들도 당해낼 수 없는 선생님의 끈질기고 도전적이기까지 한 문제 제기를 느끼게 된다.

왜정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분단시대에 정면으로 대응해 오신 당대의 작가이자 큰 어른으로서 무디어질 만큼 연치가 팔순을 넘기셨는데도 오히려 더욱 푸르르다.

갈수록 더 푸르른 자연과 하나되는 삶

쌀쌀하지만 쾌청한 대한 추위 날씨 속에서도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시는 선생님의 건강은 지난해 11월 29일 서울에서 치르셨던 팔순잔치 때보다 더 좋아 보이셨다.

텃밭에서 채소 키우고 풀 뽑고 나무 심고 또랑 치고 그리고 토지문화관에 들어와 글 쓰는 손자 같은 작가들에게 손수 키우신 푸성귀로 반찬 만들어 먹이시는 일들이 선생님을 더 건강케 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런 마음 쓰심이 팔순답지 않은 건강을 지켜드리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지만 원보, 세희 두 손자들이 이제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 열중하는 것에 흡족해 하시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박 선생님과의 이날 대화는 오전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는 댁에서 그리고 이어서 원주 시내의 식당에서 계속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님께 점심 대접을 하면 절대로 출타하시지 않겠다신다. 당신께서 대접해야만 한다고 고집하시면서 다짐을 받으시고서야 차에 오르셨다.

▲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박경리 선생님. 사진 속 뒷모습은 박 선생님의 사위인 시인 김지하 선생님.
ⓒ 이부영
"새만금 물막이 공사는 지구생명 죽이기"

박 선생님을 만나 뵐 때마다 언제나 먼저 오르는 화제는 생태환경 문제다. 지구 자체가 하나의 큰 생명이라는 것. 그런데 20세기 들어서부터 자행된 인간들의 지구생명 죽이기 때문에 지구는 중병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박 선생님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자행된 가장 큰 지구생명 죽이기 사례가 새만금 물막이 공사라고 강조하신다. 그 드넓은 새만금 갯벌에서 나오던 소출이 그곳을 농지나 다른 용도의 땅으로 개발하여 얻는 소득보다 더 많을 텐데도 굳이 갯벌을 없애겠다는 계산법을 이해하지 못하시겠단다.

오래지 않아 물막이 안의 민물이 시화호의 경우처럼 다시 썩으면 또 물막이를 트려는지, 갯벌은 죽이고 예산은 바닷물에 흘려 보낸 채 또 물막이를 트려는지, 그러고도 시화호 때 그랬듯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나가겠다는 것인지, 한심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고 하신다.

북반구에서 매년 남반구로 가거나 이곳 한반도에 와서 겨우살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철새들의 삶의 터전은, 아니 그보다도 그 갯벌에서 누대에 걸쳐 고단하지만 행복하게 살아오던 어민들의 삶의 터전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 차오른다고 하신다.

새만금 갯벌과 그곳의 뭇 생명, 철새들과 어민들, 이 모든 새만금 생명들이 지구라는 큰 생명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헤일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제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 사라지려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 생명에 치명상을 입히고도 인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신다.

저렇게 엉성하게 엉망으로 복원해놓은 청계천을 보고도 감격해하는 서울시민, 우리 국민들이 정말 우리 강토를 제대로 살려놓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말씀하신다. 청계천도 앞으로 제대로 다시 손질할 때가 와야 할 것이란 말씀이다.

"청계천도 제대로 다시 손질할 때 올 것"

이 정부에 대한 비판도 가차없다. 이 정부의 생각 속에는 생태의 '생'자도 환경의 '환'자도 아예 없다는 말씀이다. 원칙, 원칙 하지만 생명살리기 만한 원칙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하신다.

오히려 이 정부 아래서 박정희 시대의 무자비한 자연파괴가 재연되는 것을 보면 철학과 가치관에서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또 요즘의 환경운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잊지 않으신다. 환경운동이 환경을 살리려는 일반시민들의 참여 마당으로 역할하기보다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나 그들의 대리인들의 대변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환경을 파괴하는 자들의 검은 손길에 환경운동이 파괴당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모름지기 어떤 이념이나 이론도 자연과 인간이 함께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 이념이나 이론을 위해 자연이나 인간이 봉사하거나 희생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씀하신다.

요즘 각종 시민운동들이 시민들의 외면으로 시들해지고 있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라며 내게도 그 점을 새기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주인이 구경꾼 처지로 밀려나고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 어떤 운동이든지 볼장 다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경계해야 할 이웃나라 일본

박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일본 문제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 즉 헌법개정과 재군비 기도는 일본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말씀이다.

고이즈미가 대표적인 개혁으로 내세우는 우정 민영화는 350조 엔에 달하는 막대한 우정기금이 매년 약 5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보이는 미국의 재정위기를 지원하는데 쓰일 수 있도록 미-일 양국 사이에 조율되어 추진되는 합작품이라는 내 설명에 선생님께서는 그렇다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헌법개정과 재군비를 돈으로 구입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어느 때엔가 핵무장도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보이셨다.

일본 역사에는 유전인자처럼 한반도를 지향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일본의 지배층이 된, 도래인으로 기록에 나오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은 한반도를 돌아가야 할 고향이면서 동시에 원한과 복수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한때 한반도를 거쳐 만주를 본거지로 삼으려 기도했던 일본의 구상이 좌절되었지만 지진과 화산 활동으로 불안한 지질환경에 놓인 일본국민은 본능적으로 한반도를 바라본다는 것이 선생님의 풀이시다.

냉전시대, 이념대결시대가 지나고 남북해빙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본격적인 남북해빙시대를 맞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과 중국이 다시 한반도를 놓고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

남북 사이의 증오와 의심이 주변 나라들의 쟁패를 앞에 두고 하루 속히 풀리려는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의 태도는 지난 날처럼 해양세력으로서 대륙세력을 적대하고 봉쇄하는 과정에 한반도를 희생제물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와 연계하여 패권다툼을 벌이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도 우리의 대응자세를 놓고 고민을 하고 계셨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자주 긴 말씀을 나눠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밖에도 일본의 상고사 문제와 집필에 따른 고민을 말씀하셨다. 원고 쓸 힘이 없다는 말씀이셨다. 집필 메모라도 남겨놓으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말씀드렸다. 일제 식민지시대를 청년시절에 겪은 마지막 세대로서 역사적 소명감 같은 것을 느끼신다는 말씀이다.

박 선생님은 대화하면서 녹음기를 놓거나 사진 찍는 것을 기피하신다.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는 대로 듣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한동안 말씀을 모아놓으셨다가 풀어놓으시니 체증이 내려가신 듯 후련해하시는 것 같다.

댁에 모셔다드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데 손수 심으신 소나무를 올려다 보시면서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원보, 세희 두 손주에게 말씀하시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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