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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은 관광객들로 좁은 골목안은 북새통을 이룬다
ⓒ 유창하
항일독립 운동가이며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존경하는 인물 1위인 백범 김구 선생과 상하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 의사를 비롯하여 <조선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박은식(임시정부 2대 대통령 역임), 신규식 선생, 노백린 선생의 중국 상하이에서의 흔적을 찾았다.

잘 알려진 옛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홍커우공원(현재 이름은 루쉰공원)과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묻힌 분들이 있는 홍차우 만국공묘(萬國公墓)를 찾아갔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선생 등 대한독립 운동가들의 유해는 당시 화이하이루와 정안사 인근의 공원묘지를 묻혔다가 최종적으로 홍차우 만국공원묘지(현 송칭링 능)에 모두 이장됐다.

3·1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의 기폭제

▲ 당시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로 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이 방문하면 여기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한다.
ⓒ 유창하
스산한 겨울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시작된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흔적 찾기는 차가운 상하이의 날씨를 더욱 차갑게 느끼게 했다.

먼저 관광차 들리는 한국인들로 언제나 넘쳐나 1인당 15위앤(한국 돈 2천 원) 입장료 수입을 챙기는 상하이 루완구 유적관리사무소의 즐거운 비명을 상상하며 상하이 임시정부기념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3·1절이 다가와서인지 평소보다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관람하려고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고 임시정부 청사 주변은 관광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들릴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 수에 비해 공간이 협소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좁은 옛 청사 건물과 옆 건물까지 확장해 조성한 전시관시설에 주말이면 한꺼번에 많은 참관인이 몰려 시장처럼 소란하기만 하다. 이때는 너무 소란스러워 제대로 볼 사람만 방문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 지난 11월 박은식 서거 80주년을 맞아 개최된 박은식 서거 80주년특별전 포스터.
ⓒ 유창하
하지만 비교적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평일에도 상하이 3박4일 관광코스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대충 보고 횅하니 나가버린다. 때문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한 관광지에 불과한가?"라고 못마땅하기도 하고 중국 투어 한국 여행사들의 겉핥기 상하이 관광 일정을 탓하기도 한다.

1층 시청각실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이 임시정부를 소개하는 제작된 비디오 영상물을 보고 나서 구 청사안에 마련된 집무실, 침실, 부엌 등 당시 김구선생이 집무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을 본다.

그 다음 바로 옆 건물 방을 헐어 조성한 임시정부기념관에 들어서면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입구에 임시정부의 이동 행적 지도와 임시정부의 결성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윤봉길 의사가 의거 실행에 앞서 "이제 전 새시계가 필요 없으니 바꿔 차시죠"하며 김구 선생과 바꿔 찬 시계.
ⓒ 유창하
일제의 식민지 폭압에 저항하는 1919년 3·1독립운동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독립의지를 더욱 북돋워 한국의 13도 대표들은 한성(서울)에 비밀리에 모여 한성임시정부를 발족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 국내에서의 항일독립 운동이 어려워 해외로 활동 지역을 옮겨가게 된다. 그리하여 러시아령인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회의가 구성되고 중국 노령에서도 노령정부가 결성된다.

당시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조차지역으로 망명가들이 정치 활동을 하기에 좋아 대한민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이곳을 찾았다. 또 3·1운동 이전에도 신규식 등 많은 교민이 이주해 상업활동과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대한독립운동의 전초 기지가 되기에 적합했다.

3·1운동 일어난 이후에는 여운형, 이광수, 이동녕, 이시영 등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대거 속속 도착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정식 발족은 더욱 활기를 띄고 박차를 가하게 된다.

비밀 회합을 몇 차례 가지던 중 마침내 1919년 4월 13일 프랑스 조계지인 김신부로(金神父路, 지금의 瑞金2路)에서 이동녕을 국무위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온 국민이 민족의 자주성을 찾고 나라의 독립을 찾는 데 매진할 것을 호소한다.

국민대 한국학 연구소 김승일 교수가 쓴 <중국 역사여행>에 의하면 "최초의 임시정부 청사는 프랑스 조차지인 하비로 321호를 사용하다 중경중로 18호로 이주하였으나 일본 영사관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테러집단이다'라며 프랑스 조계당국에 압력을 넣어 프랑스 경찰의 철수 통고에 의해 다시 이주하여 현 터인 마당루 306호(원래 김국 선생의 거주지) 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때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3년간 상하이에 존속한다. 그리고 1932년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일본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자 이를 피하기 위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가흥,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를 거쳐 중경에 안착하기까지 긴 여정의 보따리 식 이주를 계속한다.

이렇게 3·1 운동은 불과 1달여 만에 멀리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포를 가능케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어 국내외 단체와 연계한 독립운동, 중국 내 군사조직 결성 등을 전개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 매원에는 매화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 윤봉길 의사 호인 매헌을 따 매정에는 매화나무가 많이 조성되어 있다. 비가 보슬보슬 오는 가운데 꽃망울 터트리는 매화 꽃을 바라보고 있다.
ⓒ 유창하
1932년 의거 현장인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있는 홍커우 공원(현 루쉰공원) 내 매원에서 윤봉길 의사 흉상 앞에 고개 숙여 잠시 묵도를 했다.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에서 따와 기념관 입구에도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고 기념관 뒤에 가면 작은 매화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찾은 지난 25일에는 매화동산의 매화가 보슬비를 맞으며 막 꽃망울을 퍼트리고 있다. 붉은 매화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윤봉길 의사의 화사한 얼굴을 보는 듯하다. 불현듯 왜 '매헌'이라고 호를 붙였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처럼 강직한 분이 호에다가 매화꽃을 붙이다니…. '윤 의사처람 강인한 사람이 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섭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전시관 자료에 따르면 스승인 성주록 선생 호 매곡과 이율곡 호 매죽헌에서 따 왔다고 한다).

▲ 일본육군형무소에서 사형집행되어 운명 직전의 윤 의사 사진.
ⓒ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 의사가 중국으로 넘어오고 나서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상의 꽃을 피우고"라는 구절이 있다. 청년 시절의 농촌운동과 야학운동 등 그의 24세 짧은 생을 들여다보면서 '한 청년의 욱하는 감정이 아닌 한 지식인의 애절한 나라 사랑'에 존경심이 들고 숙연해지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30년대에 변절자가 속출하고 독립운동을 포기하는 국내외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임시정부에 활력을 띄게 하며 중국과도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국 땅 만국공원에 묻힌 독립유공자들

▲ '박은식 선생 묘가 1993년 이장되었다'라고 표식이 남아 있다.
ⓒ 유창하
19세기 말부터 한국인들은 상업 활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합방 이후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더 늘어나 수백 명이 모여 최초의 한인 집단사회를 구성한다.

상하이에 넘어온 사람들 중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분들은 상하이의 만국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장소가 상하이 곳곳에 있던 공묘(公墓)였다.

화이하이루와 징안스(靜安寺) 인근에 있던 독립유공자들의 묘는 훗날 상하이 시에 의해 외곽 지역인 홍차우 만국공묘로 이장하게 됐다. 그래서 현 홍차우 소재 외국인 공묘에 가면 당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의 이장된 묘 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또 아직 누군지 확인되지 않아 이장하지 못한 이름 모를 분들의 묘도 아직 있다.

한국 정부와 독립운동가 유족들의 노력으로 1993년에는 박은식, 노백린,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선생 등 5인의 유해가 봉환되었고 윤현진, 오영선 선생 등 2인의 유해는 1995년 봉환 이장됐다.

▲ 노백린 선생의 묘비에 이전되었음을 알리는 문구가 표기되어 있고 주위에는 다른 분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 유창하
1993년 유해가 봉환된 분들은 이승만에 이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잠시 동안 맡은 <한국독립지혈사>를 쓴 역사학자인 박은식 선생,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지기 전부터 활동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지재한 영향을 미친 신규식 선생( 고려대 전 총장 김준엽 선생 외조부)이다. 그리고 서북파의 대표 인물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 선생, 안창호, 이동휘와 함께 민족계몽운동을 하다 상하이에 와 활동을 한 안태국 선생이다.

아직도 홍차우 만국공묘(萬國公墓)는 아직도 이국땅에서 묻혀 송환되지 못한 한국 국적의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를 곁에 두고 있다.

▲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가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비치되어 판매되고 있다.
ⓒ 유창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 찾기는 쉽지 않다. 얼마 전 상하이 총영사관으로 김구 선생의 친손자인 김양 총영사관이 새로 부임했다. 김양 상하이 총영사관가 임명을 받고 상하이에 오자마자 바로 상하이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해 김구 선생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임시정부청사는 중요한 상징 장소이다.

또 한국 정부는 올해 안으로 상하이 시내에 한국문화원을 정식 개설할 예정이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교민이든 한국에서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인이든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행적 그리고 남은 유적 관리, 뿌리 찾기, 숭고한 정신 계승 등은 한 번 들리는 관광차원이 아닌 보다 면밀한 조사와 프로그램으로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유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http://cafe.daum.net/shanghaivillage 운영자이다.중국 상하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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