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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에 미군기지를 확장하지 말아달라는 서명이 어제(27일) 우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서명에 참여한 1354명 가운데 일부 미국인과 재일교포를 빼고는 대부분이 일본인들이다.

이들은 북한과 중국을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초래하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계획을 철회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또 토지강제수용을 철회하고 농민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계속 농사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도 했다.

서명을 모은 이는 '대추리 작가'로 이름난 일본인 다큐멘터리 작가 나카이 신스케(39)씨다. 그는 지난달 20일에는 같은 내용으로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역시 일본인 1590명의 서명을 보냈다.

▲ 나카이씨가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일본인들의 서명. 그는 "작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행동하고 싶어서 이런 일을 했다"고 말했다.
ⓒ 문만식
그는 올해 1월 평택 대추리에 첫 발을 디뎠다. 그 뒤로 그는 60분짜리 영상테입 200여개에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담았다.

그는 이 가운데 5월 4일 국방부와 경찰의 연합작전인 ‘여명의 황새울’ 전후의 상황을 편집해 상영했다. 지난 7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일본에서 상영했고 그곳에서 공중파를 타기도 했다. 작품명은 '굳세어라 황새울'이었다.

나카이씨가 대추리를 소재로 최종 작품을 내놓는 데까지 관객들은 앞으로 1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서둘러 ‘굳세어라 황새울’을 편집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원래 영화를 만들러 대추리에 왔습니다. 편집기간을 포함하면 2년 또는 길게는 3년이 지나야 결과물이 나오게 되죠. 그때가 되면 이 싸움 자체가 끝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대추리에 와서 정말 많은 신세를 졌어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자체를 주민들이 다 도와줬으니까요. 그래서 뭔가 갚아야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영화만 만드는 것으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상영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접적인 계기도 있었다. 지난 7월 5일부터 9일까지 평택범대위가 주최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및 한미 FTA 협상 저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행사가 그것이었다. 행진단에서 영상 제작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독립다큐멘터리 작가들과 주민대책위, 지킴이들의 도움을 빌어 작품을 완성했다.

그가 새롭게 일본어 자막을 넣은 ‘굳세어라 황새울’을 일본에 가져간 데는 전쟁에 반대하는 그의 소신도 작용했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날을 포함해서 오사카와 나가사키, 오카야마, 히로시마 등지에서 일곱 차례 상영화를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나가사키 사세보시에서 반전시위가 있을 때 사람들에게 서명용지를 돌리는 식이었죠. 그러면 시위 참가자들이 집으로 가져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서명 받은 것을 우편으로 다시 보내왔어요. 물론 오키나와 헤노코 기지 반대처럼 전쟁반대를 호소하는 단체의 집회에서도 작품을 상영하고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굳세어라 황새울’을 굳이 일본에 가져간 데는 평화활동가와 노동자 등 그간 대추리에 다녀간 일본의 시민들의 관심도 작용했다. 나카이씨는 대추리에 잠깐 다녀간 일본인들이 상영회를 도와준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 일본인 독립다큐멘터리 작가 나카이 신스케씨. 지난 1년 동안 대추리 도두리에 머물면서 60분짜리 영상테입 200여개에 주민들의 삶과 싸움을 담았다.
ⓒ 문만식
"그런 분들은 지난 5월 4일에 대추분교가 무너지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고 합니다. 무너지기 전의 대추분교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기 때문이죠. 사태를 목도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정치의 차이를 알아내는 사람도 많았어요. 일본에서도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만 명이 넘는 전경과 군대를 동원해서 학교를 부수거나 철조망을 치는 걸 현대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일본에서도 2차 세계전쟁 직후에는 대추리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군기지와 훈련장을 만들기 위해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고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미군기지는 아니지만 나리타 공항을 만들 때도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나카이씨는 그 당시 농활 온 학생들이 농민들을 도운 것도 대추리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통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 국경을 넘어 시민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군기지가 전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군기지 재편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죠. 그래서인지 국경을 떠나 그런 사람들이 상영회에 많이 왔어요.”

그는 이번 작품으로 뜻하지 않게 인권상까지 받았다. 일본의 재단법인 아시아태평양인권정보센터가 시상하는 ‘국제인권교재장려사업 award 2006’가 그것. 다음달 8일 오사카 ‘인권 오사카’(Human Rights Osaka) 사무실에서 시상식이 예정돼있다.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한 페이지를 펼쳤다. 심사위원 가운데 NHK 방송국 임원인 사사키 카즈오씨의 심사평이 적힌 부분이었다.

“특히 영상교재 ‘굳세어라 황새울’은 교재라는 틀을 넘어서 만든 사람의 강한 마음이 묻어난 작품이고 인터넷시대에 있어서 시민저널리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내게 나름대로 자신의 인권관을 펼쳐보였다.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의 시점에서 봐야 인권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품과 서명모집은 물론 대추리 주민들을 위해 후원금까지 모금해왔다.

“작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하도 커서, 그런데 금전적으로는 은혜를 갚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은 걸 얻었고 주민들이 해줬는데 그걸 직접적으로 갚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나는 일본사람이고 여기 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서명용지를 들고 상영회를 했습니다.”

▲ 대추리에서 다큐 제작 작업을 하고 있는 나카이씨. 그는 내년 봄 미군기지가 아닌 꽃피는 대추리를 보고 싶다.
ⓒ 문만식
그는 지난 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추리 주민들이 싸우는 모습뿐만 아니라 농촌 마을의 사계를 찍고 싶다고 말했었다.(아래 관련기사)

그의 말은 압도적으로 큰 국가권력의 힘 앞에서 일상조차 빼앗겨버린 주민들의 실상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일상을 찍었어요. 같이 일하면서도 찍고, 기지와 상관없는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런데 일상 속에 기지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주민들이 콩 농사를 많이 하시는데, 그렇게 하는 배경에는 쌀농사를 할 수 없게 됐다는 것도 있는 거죠. 그런가 하면 김장을 하면서도 ‘이게 마지막 김장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그가 당장 바라는 것은 지난 9월 정부의 1차 주택파괴 이후 추가적인 파괴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만약 철거가 없더라도 심리적으로는 여러 공격이 주민들에게 가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철거가 다시 이루어진다면 어린이들도 있고 정말 너무너무 심각한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일단 지난 27일 일본으로 가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전날 저녁 촛불행사장에는 내년 봄 돌아오겠다는 그를 환송하는 주민들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내게 대추리에 돌아올 때 미군기지가 아닌 봄꽃이 피는 아름다운 마을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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