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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아들이 1월 2일 입대했다.
ⓒ 엄태현
큰 아들의 입영통지서를 받아들던 날,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이의 외할머니-나의 친정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치맛자락으로 눈물부터 찍어내는데도.

눈시울이 붉어진 친정어머니는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저것도 에미라고, 세상에 저런 에미도 없을 거다"라며 손주를 징발해 가는 국가 대신 애꿎은 딸을 원망했다.

그깟 욕에 배 터지랴. 내 기쁨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제 만세, 만세, 만만세다.

"이런 에미가 있을까? 쯧쯧"

더 이상 큰아이의 방 앞을 지날 때마다 멧돌을 가슴에 올려놓은 듯한 중압감을 느끼지 않아도, 방안 가득 굴러다니는 그 지긋지긋한 판타지 소설 나부랭이를 치우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온종일 껌처럼 눌러 붙은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군에 간답시고 일찌감치 휴학하고, 오로지 게임, 만화, 판타지소설의 삼각지대만을 오가는 큰아이에게 질릴 대로 질린 나였다. '일어나라, 세수해라, 밥 먹어라' 유치원에서 다 배웠어야 하는 일을 놓고 여태껏 잔소리해야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큰 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이 아이가 크기 전에 통일이 되든지 평화협정을 맺든지 강제징집제가 없어져야 할 텐데 기원했었다.

그러나 아이의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언제면 저 놈이 군대라도 가서 기초생활교육을 다시 받고 오나, 간절하게 군 입대를 바라는 쪽으로.

그러던 차에 날아 온 입영통지서는 구원과 희망의 메신저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두고 '비정의 모정'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슬프긴 뭐가 슬퍼, 나라에서 용돈까지 준다는데'

@BRI@국가가 지정해준 소집일인 2007년 1월 2일.

직장생활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식 이후에 학교행사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논산훈련소 가는 길만큼은 동행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에미 노릇도 할 겸, 딴 길로 새지 않고 군문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도 할 겸. 방학 중인 둘째아이와 아이의 외할머니도 다 따라나섰다.

용산역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친구 영선이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무리 쿨한 너지만 오늘은 눈물이 나지?"

나는 즉각 회신을 날렸다.

"무슨 말이니. 지금 기분이 날아 갈 것 같은데."

친구는 또 재회신 메일을 날렸다.

"이런 에미가 또 있을까? 쯧쯧."

친정어머니랑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논산에 도착해 연무대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안내 방송에 따라 이동하는 순간까지도 여유있게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야야, 슬프긴 뭐가 슬퍼, 고마운 일이지. 국가에서 말썽꾸러기 맡아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용돈까지 준다는데."

군악대에 이어 기수단이 입장하고, 마침내 입소 장병은 다 운동장으로 모여 줄을 서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순간 옆에 있던 큰아이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이젠 진짜 가야 해."

얼른 안아주었다. 아이는 운동장으로 튀어나가면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할머니 울지 마세요, 엄마도 울지 말고."
"야야, 울긴 왜 울어!"

습관처럼 말하려는데 눈물이 퍽, 그야말로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둘째가 보더니 "엄만 안 운다면서 왜 울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순식간에 터진 울음보 '엉엉'

나를 더 크게 울린 건 남의 집 아들이었다. 한눈에도 씩씩하고 사회생활을 무척 잘할 것 같은 활달한 인상이었다.

그는 주변에 다 들릴 만큼 큰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열심히 군복무하고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외친 뒤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리고서는 배웅 나온 가족을 한 명 한 명(그중엔 여자 친구도 있는 듯했다) 끌어안았다.

여기까지는 의연했다. 준비된 의식을 마친 그는 부동자세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마침내는 엉엉 울었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그를 보면서, 가족 앞에서 울 만한 배짱도 없는 소심한 큰아이를 생각했다. 달려가면서 속으로 울었겠지.

운동장에 집합한 '빡빡머리' 청년은 무려 1700명. 첫날은 소집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임시 편성된 부대 점호도 하고, 군가 '사나이로 태어나서…'를 반동을 넣어 부르기도 하고, 복창 소리가 적다는 지적에 구령을 다시 붙이기도 하고. 지휘관의 어조는 정중하고 깍듯했지만, 명령은 어디까지나 명령이었다.

'좌향좌 우향우도 구분 못하는 아이, 보이스카웃 캠프를 갔다가 교장선생님의 지시에 반발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아이, 중학교 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존다고 45분 수업한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해보라니까 끝까지 버틴 아이……'

그런 아이가, 병사끼리의 명령을 금지하고 언어폭력 등 가혹행위를 금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이뤄지고는 있지만, 상명하복과 집단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군 생활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을까.

청년 1700명과 그 가족들의 눈물겨운 보편성

▲ 가족들이 앉아서 줄 서 있는 입영병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엄태현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유사시에는 이 한목숨을 바쳐…"

'이 한목숨'이라, 참 무섭고 무거운 단어다. 대여섯 개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둘도 없는 게 한목숨이다. 그 하나뿐인 목숨을 '유사시'에는 바쳐야 하는 게 군대다.

'유사시'는 반드시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무장공비 침투 방어작전에서부터 대민지원활동에 이르기까지 집단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유사시' 아닌가. 고 노충국 상병의 아버지도 훈련소 연병장에서 늠름한 아들을 기꺼이 떠나보냈을 것이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출신지역도, 가정사정도, 관심사도 다 다른 청년 1700명과 가족들은 그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의 아들도 장군의 아들도 아닌 인간의 아들이라는 눈물겨운 보편성!

고속버스 시간 때문에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뜬 우리 가족은 입소 장병들이 운동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인사를 하기에, 허겁지겁 운동장 쪽으로 돌아내려가서 아이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내 어깨를 둘째아이가 감싸 안으며 말했다.

"걱정 마, 엄마. 형, 군대 생활 잘할 거야. 고참들 무서워하는 말 무지 많이 했거든. 무서워하는 사람은 개기지 않아."

둘째 놈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신기해서 아이를 올려다봤다.

태그:#입대, #서명숙, #입영통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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