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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밭. 딱 30주 심었다.
ⓒ 조명자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이 무농약·유기농 농산물의 생산과 판매에 열심일 때도 나는 시큰둥했다.

농약 범벅인 쌀 사먹을 돈 마련하기도 버거운 서민들이 천지인데 아무리 몸에 좋다지만 그 비싼 유기농 농산물 판매에 정열을 쏟는 게 말이 되는가? 취지는 좋다만 현실적으로 돈 걱정 없는 중상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생협 운동'인 것 같아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비웃듯, 아주 우연찮게 유기농 야채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유가 발생했다. 90년대 중반에 찾아온 병마.

싱크대에서 야채를 씻던 남편의 구부정한 어깨

▲ 제법 맛이 든 풋고추를 막된장에 푹 찍어먹는 맛이란...
ⓒ 조명자
암 수술을 하고 난 뒤 그 많은 명약 처방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환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식단 구성이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충분히 섭취하고, 육류 대신 식물성 지방이나 단백질을 섭취하는 처방은 그 중에서도 기본이었다.

돈은 어디 가던지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 남편은 생협에서 공급하는 유기농 야채와 과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유기농 야채를 깨끗이 씻어 녹즙을 만들고, 불려놓은 콩을 살짝 삶아 하루 먹을 콩물을 준비해 놓았다. 어머님이 하시겠다고 했지만 싱크대 근처에도 못 오시게 하고는 자신이 직접 씻고 삶고 갈았다.

구부정한 어깨를 뒤로 하고 싱크대 앞에서 야채를 씻던 남편 모습. 아들의 완강한 거절에 이도 저도 못하고 뒤에서 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쓸쓸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장마 뒤끝에 초토화된 상추밭...
ⓒ 조명자
항암제 독성을 이길 수 없어 주사도 못 맞는 내겐 남편이 아침마다 갈아 대령한 녹즙과 콩물이 유일한 치료약이었다. 생야채와 콩을 좋아하지 않는 마누라를 어르고 달래며, 남편은 억지로 한 컵을 먹이고선 소나무 숲 무성한 북한산으로 산책을 데리고 나갔다.

기력이 없어 걷다 쉬다를 반복하면서도 북한산 오솔길에서 보던 들꽃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뺏겨 힘든 줄 몰랐던 매일의 산책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일등 공신인지도 모르겠다.

생야채는 싫어했지만 다행히 과일은 좋아했다. 퇴비를 듬뿍 준 토질에 농약 없이 키운 제철 과일. 그 때 맛을 알았다.

비료와 농약으로 때깔 곱고 탐스럽게 키워 낸 과일들은 종류 불문하고 맛도 싱겁고 과육도 부드러웠다. 반면에 유기농 과일은 작고 못생겼지만 탱글탱글하고 단단하며 질긴 살집을 자랑했다. 맛도 일반 과일보다 훨씬 향기가 있고 새콤달콤한 것이 입맛에 짝짝 붙는 것 같았다.

더구나 껍질째 먹는 과일, 예컨대 딸기나 토마토, 포도 같은 것은 그 차이가 더 심했다. 나중엔 사과나 배처럼 껍질을 까먹는 과일들도 겉에 밴 농약 냄새를 예민하게 느낄 정도였으니 무농약·유기농 과일 맛에 얼마나 길들었는지 알 만 하지 않는가.

유기농 식생활 10년 만에 완치 판정

▲ 호박은 아직... 예쁜 꽃만 함초롬히
ⓒ 조명자
나는 형편상 생으로 먹는 야채나 과일 정도만 유기농을 선택했고 쌀이나 기타 부식들은 아무거나 되는 대로 먹었다.

그러나 남편의 지극정성과 싱싱한 유기농 야채를 많이 먹은 덕인지 마의 10년 문턱을 넘어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촌으로 이사한 뒤 비교적 기르기 쉬운 야채는 직접 텃밭에 심어 키워 먹는다.

특히 날것으로 잘 먹는 풋고추는 매년 잊지 않고 키우는데 그 이유는 고추만큼 농약을 많이 치는 채소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열매가 달리면서부터 거의 마지막 추수 때까지 어찌나 약을 많이 치는지 저런 걸 먹어도 괜찮을까 위기 의식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 씻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오이, 꼬부라진들 어떠리...
ⓒ 조명자
전 주인까지 합쳐 거의 15년이 넘게 내 집 담장 안 텃밭은 비료도 농약도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유기농 토질이다. 얼마나 토질이 비옥한지 땅만 슬쩍 건드려도 지렁이가 우글거리고 개구리도 완전히 제 세상이다.

비록 손바닥만 한 텃밭이지만 그 안에 종류는 솔찮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절대로 벌레가 끼지 않는 상추를 비롯해 쑥갓·케일·당귀 등 쌈 채소. 그리고 약간의 파와 부추·아욱·호박·가지가 있다.

고추는 사계절 먹을 풋고추를 위해 30~40주를 심는다. 김장거리는 못하더라도 한겨울까지 먹을 풋고추를 저장하려면 그만큼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년 무관심해도 잘만 자라는 취나물·민들레·씀바귀까지 합하면 웬만한 손님 서너 명 정도는 일도 없이 대접한다.

도시민도 살고 농민도 사는 유기농법

▲ 이번 농사는 별 볼 일 없다. 작년 가지나무는 거목이었는데...
ⓒ 조명자
생야채는 유기농, 과일과 배추 정도는 저농약, 그리고 나머지는 제멋대로 먹고 살지만 갈수록 오염되는 환경 때문에 온갖 질병이 발생하고 있으니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다. 가장 중요한 물과 땅 그리고 공기가 오염됐으니 무슨 수로 건강을 지킬까?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은 강구해야 할 터. 내 가족과 친지, 지인들을 위해 은퇴한 노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소일거리 텃밭을 알뜰하게 가꾼다면 일정 부문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농산물 앞에서 우리 손으로 정성껏 가꾼 유기농 농산물을 직거래한다면 국민 건강에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민도 살고, 농민들도 살 수 있는 데다가 일할 수 있는 노인들의 노동력까지 보장해주는 유기농법. 판매 시장이 넓어진다면 승산이 있는 생업이 될 것도 같다.


태그:#유기농 밥상, #채소, #야채, #고추, #무농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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