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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에 덮여 있는 계룡산 봉우리들.
 비구름에 덮여 있는 계룡산 봉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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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덮인 산봉우리에서 느끼는 외경스러움

'Who'll Stop the Rain'이라는 노래가 있다. 누가 비를 멈추게 할 것인가. 1970년대 내 또래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가운데 하나다. 그 시절 우리들의 의식 속에선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비는 자연현상이기 이전에 퇴폐와 혼돈의 시대를 가리키는 은유이자 상징이었다.

벌써 일주일도 넘게 비가 내리고 있다.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비를 좋아하는 나지만 요즘 날씨는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건 이내 심사" 어쩌고 하는 남인수의 '청춘고백'이란 노래처럼 비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다소 이율배반적이다. 잦은 비를 걱정하면서도 이런 날씨에 등산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난 산행 중에서도 특별히 눈보라가 몰아치거나 보슬 보슬 비가 내리는 날씨 속의 산행을 좋아한다. 비나 눈이 뺨에 와 부딪칠 때마다 느끼는 묘한 쾌감이 좋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신의 각성제라고나 할까. 지난 5일, 우중에 계룡산으로 등산을 떠났다. 등산보다도 절집의 처마 끝에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멀리서 바라보는 계룡산 봉우리들은 흰 구름에 쌓여 있었다. 나 같은 속인에겐 절로 외경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역시 산행을 떠나오기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 있는 대로 까발려 버려서 경건한 것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요즘의 세태 속에서 이 정도의 외경스런 풍경을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충남 유형문화재 제105호 갑사 대웅전.
 충남 유형문화재 제105호 갑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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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이 몰려오는 대웅전 처마.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들어열개문 걸쇠가 인상적이다.
 비구름이 몰려오는 대웅전 처마.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들어열개문 걸쇠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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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길은 인적이 드물어 적이 고요하다. 아름드리 고목들만이 이따금 자신의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느라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낼 뿐이다. '오리 숲에서 가장 수선스러운 존재인 검정 딱따구리들도 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백제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갑사는 하나도 고풍스럽지 않다. 예전에 지은 전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줄지어 선 오리 숲이 있어 그나마 절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 맞은 대웅전이 마치 한 떨기 꽃같이 청초하다. 일찍이 이렇게 정갈한 갑사 대웅전을 본 적이 있던가. 축대 아래 화분 대용으로 쓰이는 함지박에선 백련과 홍련이 피어난 어여쁜 자태로 대웅전을 장엄하고 있다.

대웅전 기단 위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다. 종일 이 자리에 서서 내리는 빗방울이나 바라봤으면 좋겠다.

향적당 옆에 자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55호 삼층석탑. 지붕돌에서 바위솔이 자라고 있다.
 향적당 옆에 자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55호 삼층석탑. 지붕돌에서 바위솔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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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왼쪽 담장 너머엔 향적당이 있다. 몇 년 전, 주지인 장곡 스님과 함께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정면과 측면의 공포 앙서 부분이 물고기 조각으로 장식돼 있어 매우 이색적인 건물이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담장으로 슬쩍 넘겨다 본다. 향적당 우측엔 충남 문화재자료 제55호인 중사자암지 삼층 석탑이 있다. 원래 갑사의 부속암자인 사자암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3층 석탑 맨 위 지붕돌에선 바위솔이 자라고 있다. 바위솔은 기와지붕에서 많이 자라는 까닭에 와송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녹색을 띤 피침형이지만 때로는 자주색이나 하얀 분을 바른 듯한 백색을 띠고 있기도 하다.

9월에 백색의 꽃이 피는데 아직 피어나지 않았다. 지붕에서 자라는 바위솔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탑 지붕돌에서 자라는 건 처음이다.

계곡 옆에 있는 전통찻집과 폭포.
 계곡 옆에 있는 전통찻집과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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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대적전 영역으로 본래의 갑사가 있던 자리로 추측되는 곳이다. 대적전으로 가려면 계곡을 건너야 한다. 이른바 '갑사구곡' 이 흐르는 곳이다.

'구곡'이란 중국 복건성 무이산 무이구곡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서 자연에 은둔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그럴 듯한 경승지에 '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자에 대한 흠모의 정을 표했다.

이곳에 '갑사구곡'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친일파 윤덕영(1873년 - 1940년) 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당시 드러나지 않게 막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순종황제의 두  번째 정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였다. 치마 속에다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를 위협해서 옥새를 강탈한 후 순종에게 합방늑약에 옥새를 찍도록 강권했던 사람이다. 그 공으로 나중에 그는 중추원 부의장까지 역임하는 등 영화를 누린다.

윤덕영은 갑사 옆을 흐르는 계곡을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나서 간성장이란 별장을 짓고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현재 전통찻집이 있는 곳이 바로 별장이 있었던 자리다.

자화자찬으로 가득 찬 뻔뻔스런 명문

계곡 건너 대적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공우탑.
 계곡 건너 대적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공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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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건너가면 아주 작은 삼층석탑이 보인다. 공우탑이라 부르는 탑이다.  백제 비류왕 연간에 갑사에 속한 암자를 건립했는데 건축 자재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죽자 그 넋을 위로하고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탑이 본래 어디에 쓰러져 있었는지 모르지만 윤덕영이 후천세계의 영화를 기대하며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탑 몸돌 1층 정면에는 '와탑기립 인도우합 삼혜을을 궐공거갑 (臥塔起立 人道偶合 三兮乙乙 厥功居甲)'이라 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은 아주 얕게 새겨져 있다. 글씨가 치졸해서 전문 각수(刻手)가 새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건립 당시부터 새겨진 게 아니라 근래에 누군가 새겨 넣은 게 분명해 보인다.

세운 어느 기관에서 세운 안내판일까. 탑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은 마치 '친절한 금자씨'라도 되는 듯이 이 명문을 풀이해 놓고 있다.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합치되었네 세 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라."

예전엔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오늘에야 문득 내용이 전설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문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내가)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사람의 도리에 합치되었네 (내가 무려) 세 번을 수고하고 수고 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로다."

몸돌 1층에 새겨진 명문.
 몸돌 1층에 새겨진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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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이  쓰러져 있던 탑을 일으켜 세운 자신의 노력이 '사람의 도리에 합치" 된 것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내용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번을 수고하고 수고 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라고 다시 한 번 설레발을 친다. 그렇게 해서 공우탑은 소를 기리는 탑이 아니라  윤덕영 개인의 공을 기리는 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몇십 년 동안 이 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롱한 것이다.

올해도 가을이면 '추 갑사'라 해서 아름다운 갑사의 가을을 구경하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놀러 올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저 명문을 지우든가 안내판의 내용을 바꾸던가 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파란 이끼가 탑의 몸돌을 온통 뒤덮을지라도 진실은 결코 왜곡되거나 가려질 수 없는 것이다.

공우탑 앞에는 '금계암'이란 암각이 있다. 아마도 계룡산이 풍수학에서 말하는 '금계포란'과 '회룡고조'의 명당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가 보다. '갑사구곡'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암각문들이 남아 있다. 이것 역시 윤덕영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암각문 가운데 하나다.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이면서 계룡산의 자연을 파괴한 사람이기도 한 윤덕영이라는 존재가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커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대적전과 보물제 257호 갑사 부도.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대적전과 보물제 257호 갑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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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이가 썩 드문 대적전 영역은 전각의 이름 그대로 가히 소리의 무덤이라 일컬을 만하다. 수령이 몇 십 년은 좋이 됐음 직한 배롱나무 한 그루와 모습을 감추기 직전의 상사화 몇 송이만이 지키는 고적한 곳이다.

대적전은 정면 3칸·옆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이곳이 본래의 갑사가 있던 자리라는 걸 떠올리면 대적전은 금당지 바로 옆에 있던 전각이 아닐까 추측된다.

생동감을 자아내는 사자상과 주악천인상

부도 기단 아래받침돌에 새겨진 사자상.
 부도 기단 아래받침돌에 새겨진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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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 가운데받침돌에 새겨진 공양상.
 기단 가운데받침돌에 새겨진 공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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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전에서 보물 제256호 갑사철당간 및 지주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엔 갑사 부도가 있다. 갑사 뒷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에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한다. 부도는 3단으로 된 기단 위에 몸돌을 올리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은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아래 받침돌에는 8마리의 사자와 구름, 용 등이 조각돼 있다. 가운데 받침돌에는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는데 그 사이 사이에는 주악천인상과 공양상을 새겼다.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과 사천왕입상을 교대로 조각해 놓았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그 어느 때보다 부도의 조각이 선명해 보인다. 이곳에 오면 기단 아래 받침돌에 새겨진 포효하는 사자상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한다.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의 화신이다. 설법을 일컬어 사자후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악천인상과 공양상을 바라보노라면 조각을 새긴 각수의 염원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듯하다.

시누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철당간 및 지주의 존재는 이곳이 옛날 갑사의 들머리라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해준다. 대적전 앞에 쌓인 적막이 꽉 닫힌 폐쇄된 느낌이라면 이곳에서 느끼는 고적함은 확 뚫린 듯 시원스런 맛이 있다. 비 맞는 시누대 숲이 이루는 녹색의 물결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생각난다. 비 맞을수록 더욱 싱싱하게 살아나는 녹색의 이파리들. 어쩌면 식물의 저 선명한 녹색은 인간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흐릿하게 살지 말고 자기네처럼 선명하게 살라는…. 이제 갑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 나그네의 산행을 배려하는 것인지 비는 여전히 소강상태다.


태그:#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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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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