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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나들이'를 방학숙제로 시켜서, 책 하나 사서 읽은 뒤 자유롭게 읽은느낌을 써 오도록 해 보려고 하는 어느 중학교 선생님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헌책방 나들이'는 방학숙제로만이 아니라 토요일 특별활동 수업으로도 해 볼 수 있어요. 방학이나 남다른 날 수업이 아니라, 여느 때에도 가붓이 즐길 수 있어도 좋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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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1992년부터 헌책방을 다녔습니다. 이에 앞서도 헌책방을 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참고서-교과서-문제집을 값싸게 사는 목적으로만 갔을 뿐, '교재 아닌 다른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보려고 나들이를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책을 그다지 좋아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쯤 되는 나이라면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역사와 사회를 똑똑히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1960년 4월혁명을 일으킨 사람,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다름아닌 너희(고등학생) 나이였다"는 말을 이웃 아저씨한테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가슴속으로 뜨끔했어요. 그러고 보면, 나도 벌써 나이가 열여섯이나 되었는데, 책 하나 제대로 안 읽고 어영부영 살아가는 게 아니냐 싶었지요. 그래서 '시험문제 하나 더 맞는 일에도 마음을 써야겠지만, 시험문제 하나 덜 맞더라도 제 생각과 마음과 눈길을 좀더 다부지게 추스르는 책읽기'에 마음을 좀더 쏟았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살아온 인천에는 도서관이 모두 일곱 군데 있었는데(지금은 더 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거의 날마다 돌면서 틈틈이 온갖 책을 살폈고, 인천 시내에 있는 새책방을 두루 다니면서 마음을 살찌우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던 1992년 여름,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독일말 문제집 하나를 사야 했는데, 독일말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 사오라던 문제집은 시중에서 절판된 것으로, 시내 새책방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한 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일말 선생님에게 따졌지요. '책방에 없는 책을 어떻게 사느냐?' 그러니 이분이 하는 말씀이, '헌책방에는 가 보았느냐? 헌책방까지 가 보고서 얘기하라'였습니다.

 

 이리하여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 골목을 찾아갔고, 책방마다 샅샅이 뒤진 끝에, 딱 한 곳에서, 그것도 두 권이나 그 절판된 독일말 문제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저 하나, 저와 함께 간 동무 하나, 둘이 오붓하게 나눠 가졌습니다. 이날, 독일말 문제집을 사면서 책방을 나오다가 '도서관에도 새책방에도 없던 이 문제집을 갖춘 이곳은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얼핏 뒤를 돌아서 책방 안을 죽 둘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참고서-교과서-문제집은 한쪽 자리에만 꽂혀 있고, 나머지 4/5쯤 되는 자리에는 '참고서-교과서-문제집'이 아닌 책이 꽂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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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책이 이렇게 많나?' 하고 놀랐지만, 이날은 집에 갈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그냥 돌아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쯤 뒤, 바쁜 수험공부 틈을 겨우 쪼개어 이 헌책방에 다시 찾아옵니다. 아마 낮 두 시쯤 찾아갔지 싶은데, 이날 자그마치 다섯 시간 동안 책방 한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잊고 온갖 책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주머니에는 돈이 얼마 없기 때문에 보고픈 책을 다 살 수는 없었고, 되도록 값싼 책을 사고, 조금 비싼 책은 책방에 앉거나 서서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한 주에 두 차례씩 이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토요일에는 자율학습을 빼먹고 찾아오려고 교무실에서 담임선생과 한바탕 말다툼을 한 뒤 겨우겨우 찾아갔습니다. 제가 책을 좀 많이 읽는 편임을 알면서도 '헌책방에 책 보러 간다'는 말을 도무지 믿지 않는 담임과 다른 선생들을 설득시키기 얼마나 어렵던지요.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일에도 하루 짬을 내어 찾아갔습니다. 거의 목요일에 갔다고 떠올리는데, 이때는 학원에 간다고 둘러대면서(실제로 학원에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책 보러 일찍 나가야 한다니 안 보내 주고, 학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보내 주는 게 참 얄궂었습니다) 조금 일찍 나와서, 후다닥 헌책방으로 달려가서 한두 시간 책을 본 다음, 다시 후다닥 학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 2, 3학년 이태 동안 헌책방을 꽤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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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헌책방에 찾아가서 본 책들을 살피면, (1) 문학 (2) 역사 (3) 문학평론 (4) 우리 문화 (5) 영어로 된 소설책 (6) 퍽 알려진 사회운동가나 진보지식인 사상책, 이렇게 여섯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1994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처음으로 치렀고, 저는 이 시험을 보았는데, 이때는 지금하고는 좀 달리, '교과서 아닌 책'에서 언어영역 지문을 낸다고 하는 한편, 논술시험도 준비해야 했는데, 이때 국어 시험에서는 '교과서에 안 실린'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만난 온갖 문학책을 퍽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들 눈치를 안 보고 읽을 수 있었고요.

 

 역사책은 '나이만 성년이 아니라 머리도 성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읽었고, 문학평론은 문학을 바라보는 여러 눈길을 살피고 싶어서 읽었습니다. 우리 문화를 다룬 책은, 한국사람이지만 저나 동무들이나 또 둘레 사람들이나 우리 삶터와 문화를 너무 모르기도 하지만,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고 느껴서 혼자서 알아보려고 읽었습니다. 나중에 통역이나 번역 일을 하고 싶었기에 영어로 된 소설책을 즐겨읽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살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중심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눈길과 생각을 가다듬고 싶어서 진보지식인들이 쓴 책도 곧잘 찾아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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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를 즐긴다고 해서 꼭 우리 마음이나 머리를 살찌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시험점수를 잘 받아서 이름있는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는 친구들이라 해서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든지 '옳고 그름을 똑똑히 가릴 줄 안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점수 잘 받는 일하고, 사리판단 또렷이 하는 일하고는 그다지 가깝지 않다고 느껴요.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가슴에 와닿도록 느끼느냐에 하나가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얼마나 세상과 몸소 맞닥뜨리고 부딪히면서 경험을 쌓아나가느냐에 둘이 있으며, 나보다 어리든 또 나이가 많든 가리지 않고, 둘레사람들이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얼마나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곰삭일 줄 아는 한편,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일 줄 아느냐에 셋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남들이 많이 읽는' 책을 보기보다는 '나한테 참말로 재미있는'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하며, '잘 알려진 사람들' 책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어떠한 이야기를 온몸 바쳐서 알뜰하게 엮어나간 사람들' 책, 그러니까, 글쓴이나 그림그린이나 사진찍은이 땀방울이 알알이 배어 있는 책을 찾아서 읽을 수 있어야 좋다고 느낍니다.

 

 책읽는 마음은 따로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더 많이 읽지도 않으며, 공부 못한다고 책 못 읽으란 법도 없습니다. 책읽는 마음이란, 세상을 어떻게 부대끼려 하는가 하는 마음가짐과 이어진 일이라고 느낍니다. 세상을 올바르며 아름답게 부대끼면서 자기한테 가장 즐거울 일을 찾고 다부지게 살아가려는 마음이라면 책 한 권 안 읽어도 참말 착하게, 또 즐겁게, 게다가 멋있게, 나아가 사랑스럽고 살뜰하게 자기 삶을 펼쳐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지 않고 대충대충 명문대학교-돈 잘 버는 일자리-고생 안 하고 몸 가벼이 놀고먹기만을 바란다면 '훌륭하다고 하는 책'을 100만 권 읽든 1000만 권 읽든 바보 멍청이에다가 남을 등처먹는 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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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보다는 새책방이, 또 도서관이 좀더 찾아보기 쉽도록 책을 나누어 놓았다고 볼 수 있고, 좀더 볼 만한 책이 많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이면 다 똑같은 책이기 때문에 '헌책'을 보든 '새책'을 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돈을 주고 사서 읽는 책이든, 남한테 빌려서 읽는 책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책을 내 주머니돈을 털어서 산다는 일은, '앞으로도 내 방에 고이고이 모셔 두면서 언제까지나 이 책을 읽으며 배우고 싶고, 되새기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요. 이 글을 읽을 친구들한테 돈이 좀 넉넉하다면, 보고픈 책을 모두 새책으로 사서 읽을 수 있겠지요. 돈이 좀 넉넉하지 못하다면, 헌책방에서 좀 값싸게 사 읽을 수 있습니다. 돈이 넉넉하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더 많은 책을 즐겁게 사서 볼 수도 있고요.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은 껍데기가 좀 낡거나 지저분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헌책방에 있는 모든 책이 낡거나 지저분하지는 않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이 낡거나 지저분해 보인다면, '그 책을 처음 사서 읽었던 분이 책간수를 형편없이 했기 때문'입니다. 라면을 먹으며 책을 읽다가 라면국물이 튄다든지, 밥먹으며 읽다가 김치국물이 튄다든지, 커피 마시며 읽다가 커피를 쏟는다든지 하는 일이 흔합니다. 비에 맞아서 퉁퉁 불 수도 있고, 어느 창고 구석에 처박아 두어서 곰팡이가 슬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책이 낡고 지저분할 수밖에요.

 

 책겉이 좀 지저분하다면 달력이나 신문지를 오려서 책싸개를 씌워 줄 수 있습니다. 책은 줄거리를 읽으려고 사지, 껍데기가 보기 좋냐 나쁘냐를 보고 사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잘생기고 멋있고 예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면 즐겁고 살갑고 따뜻하며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겠지요?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읽으면 즐겁고 살갑고 따뜻하며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책을 만나는 헌책방 나들이입니다.

 

 오늘 헌책방에서 만날 책 하나를 기꺼이 자기 돈을 들여서 사서 읽었을 사람 손때를 느끼면서 '이분이 책을 애써 사서 읽은 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책방에 내놓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값싸게 이 책을 살 수 있구나' 하면서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헌책방에 쌓인 책들은 '누군가 읽거나 자료로 쓰려고 산 책'이기 때문에 '검증된 책'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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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사라져 버리는 책이 많고 잊혀져 버리는 책도 많습니다.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 가짓수는 퍽 많은데, 이 가운데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들에 소개되는 책은 1/10도 안 됩니다. 나머지 9/10는 책손들이 알음알이로 사서 읽거나 안타깝게 묻히거나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곳을 가 보면, 날마다 새로 나온 책들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도 어느새 다 사라져 버리곤 합니다. 이런 큰 책방은 '많이 잘 팔리는 책'을 중심으로 진열하거든요. 그러면 많이 잘 팔리지는 못하지만, 친구들 마음을 애틋하게 움직이거나 따뜻하게 해 주는 책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직 제대로 제값을 못하면서 잊혀져 가고 있으나, 언젠가 값어치를 알아줄 사람(책손)을 기다리는 책들이 쌓여 있는 곳이 헌책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차츰차츰 자기 값어치를 빛내고 자기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친구들처럼, 앞으로 자기 값어치를 빛내고 싶고 널리 사랑받으며 속살을 나누고 싶은 헌책방 헌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권을 읽어도 좋고, 한 주에 한 권을 읽어도 좋으며, 한 해에 한 권만 읽어도 좋습니다. 좋은 책을 많이많이 읽는 일도 좋지만, 자기가 읽은 좋은 책에 담긴 줄거리 한 가지만이라도 잘 붙잡고 곰삭이면서 늘 이 좋은 이야기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도 참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자주 떠날 수도 있으나 어쩌다가 한 번 떠날 수 있고, 한 번만 떠나 볼 수도 있겠고, 아예 안 가 볼 수도 있겠지요. '책을 읽는 일'보다 '자기가 읽은 책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느끼고 깨달은 것을 제대로 붙잡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책을 읽든 말든, 헌책방 나들이를 해 보든 안 해 보든, 친구들 자기 줏대와 마음가짐을 알뜰히 다스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책 많이 읽는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반갑습니다. 책도 즐거이 읽으며 착한 사람이라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책만 많이 읽고 나쁜 사람보다는 책은 하나도 안 읽어도 착한 사람이 참으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자기 나름대로 꿋꿋하게 가면서, 둘레에 조그마한 동네 헌책방 한 곳에 눈에 띈다면, '어, 헌책방이 이런 데도 있네?' 하면서 스스럼없이 구경해 보고, 아직 친구들이 모르는 온갖 책들을 한번쯤 느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는 글 | 서울 경서중학교 아이들이 쓴 생활글을 모은 학급문집에 실렸습니다.


태그:#헌책방,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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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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