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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전거질 하다가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출연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녹음을 하려면 O월 OO일 낮 네 시까지 와야 한다는군요. 인천에서 한 시 오십 분에 자전거로 길을 나섭니다. 두 시간이면 넉넉히 마포까지 닿을 수 있으니까요. 동인천부터 신나게 달려서 주안을 지난 다음, 차가 적게 다니는구나 싶은 길로 빙 둘러 가 보기로 합니다. 늘 다니던 46번 국도 말고. 하지만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길가 건물은 자취를 감추고 비닐집이 나오더니 군부대 앞쪽으로 길이 막혀 버립니다. 땀은 머리부터 방울져서 뚝뚝 떨어지고, 이러다가 늦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고.

 

 자전거에서 내려 땀을 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전거로 서울까지 가기에 아무래도 너무 늦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되겠지만 부평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는 수밖에.

 

 오던 길을 되짚어 십정동으로 나왔고 부평역에 닿습니다. 자전거를 전철에 싣고 가방을 내려놓으니 등판은 땀으로 가득. 시간을 헤아리니 십 분 남짓 늦을 지 모르겠습니다.

 


 〈2〉 불교방송에서


 방송국에는 조금 늦게 닿았지만, 녹음시간이 뒤로 조금 미뤄진 덕분에 걱정이 가십니다. 한숨을 놓고 얼굴과 손을 찬물로 씻습니다. 먼저 와 계시는 서울 외국어대 앞 〈신고서점〉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늘 방송은 자그마치 한 시간 동안 ‘사회자 김병조 님 + 헌책방 일꾼인 〈신고서점〉 큰아저씨 + 헌책방 이야기꾼인 저’ 이렇게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습니다. 여태껏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헌책방 이야기를 들어 준 방송이 있었던가 헤아려 봅니다. 없었지 싶습니다. 어쩌면 이 라디오 방송 하나로 그칠지 모르지만, 헌책방 문화를 느긋하고 속깊이 들려줄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대목 하나로도 기쁩니다.


―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들 헌책방을 찾아오시죠 …… 헌책에도 나름대로 다양성이란 게 있잖습니까. 그래서 여러 손님들이 많이 옵니다 ……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 참, 서운하다는 것과 같은 말씀으로 들리고요. 손님들이 책의 진가를 몰라줄 때, 참 서운합니다. 비싼 책도 헌책이고 싼 책도 헌책인데, 모두 똑같은 책 아닙니까. 책이 귀할 때는, 장사를 떠나서 가격이 형성되는데, 어떤 분은 정가만 보고 논하는 수가 있어요. (신고서점 큰아저씨 말)


 방송 녹음을 마치고 〈신고서점〉 큰아저씨와 밥을 먹습니다. 〈신고〉 아저씨는 당신 일터로 돌아가시고, 저는 자전거를 몰고 공덕동으로 옵니다. 공덕동 갈매기살 고기집이 있는 골목 맨끝에 있는 〈굴다리 헌책방〉에서 책을 구경하려고.

 

 〈굴다리 헌책방〉이 있는 갈매기살 고기집 앞쪽으로는 새 아파트를 짓는다며 길이 어수선합니다. 여태껏 지은 아파트도 참 많지 싶은데. 서울 사는 사람들한테 집이 모자라서 또 지을까요. 사람들 살 집이 모자라다면, 집 숫자가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돈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집값 걱정 없이 오래오래 느긋하게 지낼 만한 터전이 모자라지 싶은데.


― 자기 둘레에 있는 작은 가게를 볼 수 있는 눈이라면, 자기 둘레에 있는 소외받는 분과 삶터를 볼 수 있다면, 헌책방 운동을 한다는 저 같은 사람이 없어도, 헌책방은 어디에서나 다 잘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들려준 말)

 


 〈3〉 공덕동 헌책방에서 구경한 책


 〈굴다리 헌책방〉에 닿을 무렵, 하늘에서 가는 빗방울이 듣습니다. 비가 오려나? 자전거를 처마 아래쪽에 바싹 붙입니다. 책방에 들어가기 앞서 책방 둘레 모습을 여러 장 담습니다. 헌책방 옆에 있는 고기집에서는 한창 손님맞을 준비를 합니다. 손님맞을 준비를 어느 만큼 끝낸 곳 일꾼이 제가 사진기 들고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가방을 안에 들여다놓고 책을 좀 구경하다가 밖으로 다시 나와 사진을 찍습니다. 아직 손님이 들 때가 아닌 고기집 일꾼들이 동글뱅이 작은 걸상에 앉아 제 하는 양을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슬쩍 건너다보다가 일꾼들 매무새를 사진으로 몇 장 찍습니다.

 

 책방으로 돌어와 《김정미-배낭 하나 달랑 메고》(햇빛출판사,1988)를 집어 봅니다. 책 사이에 묵은 신문기사 하나 끼워져 있습니다. 스포츠서울 1989년 1월 14일 토요일치. “136만 원 갖고 혼자 떠나 먹고자고 하루 7천 원으로”라는 이름으로 나온 기사로, 성균관대 명예기자가 취재해서 썼군요.


.. 비몽사몽 간에 파리에 도착했다. 같이 온 보조 선생님은 독일이 최종 목적지여서 프랑스 비자가 없다고 입국 게이트 전에 이미 ‘바이바이’하고, 혼자 아기들을 데리고 통과 게이트에 오니, 그 아이들은 이미 프랑스 시민이고 나는 그들의 보호자였다. 입국 도장은 무조건 쾅쾅! 기다리던 부모들에게 아기들을 넘기니 쨘! 입양은 끝났다. 양부모들은 기다리던 아기가 왔다고 꽃다발 세례에 비디오를 돌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잠시 아기들의 부모 역할을 했으니 그들과 같이 깊은 감격에 젖다가 법석을 떠는 그곳을 살짝 빠져나왔다. 아! 이젠 자유다 ..  〈41쪽〉


 책을 쓴, 아니 유럽 배낭여행을 한 김정미 님은 ‘비자를 얻으’려고 ‘홀트 입양아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비자 얻기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홀트 입양아는 앞으로도 그치지 않겠지요.

 


.. 그 후부터 만나는 유럽의 학생들에게선 이런 모습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학생은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주의로, 옷으로 절대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  〈61쪽〉


 좁은 골마루를 왔다갔다 되풀이하면서 위쪽 아래쪽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살핍니다. 《アニメ-ジュ編集部 엮음-The art of Porco Rosso(紅の豚)》(德間書店,1992)라는 큼직한 책이 보입니다. 뭘까? “紅の豚”? 일본책인가? “紅の豚”이면, 우리 말로 〈붉은 돼지〉라는 만화영화와 얽힌 책일까?

 

 빽빽하게 꽂힌 책을 꺼내어 펼치니, 생각했던 대로 미야자키 하야오 님 만화영화 〈붉은 돼지〉 그림책입니다. 이야,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구나. 그런데 책이름을 알파벳으로 적는군요. 그러면서 “紅の豚”은 잔글씨로 밑에 붙이고. 일본은 우리보다 알파벳을 훨씬 사랑하는가 봐요. 그리고 우리들이 “붉은 돼지”로 옮겨적는 말을 일본에서는 “붉음 + の + 돼지”처럼 적네요.

 

 《강경옥-라비헴 폴리스》(서화,1992) 1권부터 4권까지 깨끗한 판으로 보입니다. 책시렁 맨 위쪽에. 집에 이 만화가 있지만, 한 권이 빠졌습니다. 더욱이 집에 있는 책은 다 낡아빠진 판. 이참에 깨끗한 판으로 새로 장만하고, 짝 잃은 판을 맞춰야겠습니다. 〈굴다리〉 아저씨한테 부탁합니다. “사장님, 저 위쪽에 얹힌 책 뽑아 주실 수 있을까요?” “응? 어떤 책? 암, 꺼내 드려야지요.” 아저씨는 사다리를 솜씨있게 타고 올라가서 어영차 하고 꺼내어 책 쥔 손을 아래로 내밉니다. 저는 책을 받아들고, 아저씨는 사다리를 탁탁탁 한 칸씩 밟으며 내려옵니다. 꺼내놓고 보니 더 깨끗해 보이네요. 어느 분이 간수하고 있다고 내놓아 주었는지 모르지만, 참말 고맙습니다. 열 몇 해 묵은 만화책이 이처럼 깨끗하도록 지켜 주셨으니.

 

 

 《全國旅行》(昭文社,1976.8.)은 일본 길그림책입니다. 길쭉한 일본 땅덩이 모습을 잘 살려서 엮어냈군요. 길쭉하게 이어지는 사이사이 몇 군데 큰 도시는 두 쪽에 걸쳐서 도심지 꼼꼼그림을 끼워넣습니다.

 

 시모음 《이성부-평야》(지식산업사,1982)가 보여서 고릅니다. 지금은 좀 묵혀 두었다가 나중에 읽어 볼 생각입니다.


 〈4〉 책은 누구한테 집히는가


 “OOO에서 헌책방 다니며 뭐 하던 기자 있잖아. 임 모라고, 임종 뭐였던가. 그 사람 왔을 때 1권이 보이지 않아서 못 팔았지.”

 

 예전에 다른 책손이 사려고 했을 때에는 1권이 보이지 않아서 팔지 못했다는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박재희,곽학송 옮김-하얀 거탑》(청조사,1980) 네 권이 보입니다. 2, 3, 4권만 한 자리에 있고, 1권은 옆쪽 만화책 자리에 있었다고 하네요. 예전 손님이 만화책에도 눈길을 두던 분이었다면, 흩어진 짝을 찾을 수 있었겠지요(만화책 칸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권수가 길게 이어지는 만화책은 으레 이곳저곳 흩어져 있기 일쑤입니다. 만화를 보는 사람(아이든 어른이든)들이 도무지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헌책방에서 ‘흩어진 만화책 짝을 맞추자’면, 이 골마루 저 골마루 누비면서 책시렁 구석구석 들쑤셔야 합니다. 〈굴다리 헌책방〉은 앙증맞도록 조그마한 곳입니다. 크기는 좁다고 하겠지만, 만화책이든 다른 책이든 짝으로 이루어진 판을 보고자 한다면, 옆자리와 아래위 자리를 두루 살펴야 해요. 그래야 자기가 바라는 책을 알뜰히 챙길 수 있습니다. 헌책방 일꾼도 ‘어, 그 책이 짝이 안 맞나요? 저도 어디에 다른 짝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손님들이 책을 보고 워낙 제자리에 안 둬서 말이지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 ‘짝 다 맞는 판’만 바라는 책손이라면 ‘아쉽네요’ 하면서 돌아섭니다. 그러나 헌책방 흐름을 읽는 책손이라면 ‘나중에 짝이 나오면 챙겨 주셔요’ 하고는 ‘짝이 안 맞는 책을 사들’입니다. 짝이 안 맞는 책 몇 가지조차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의료 부조리라든가 병원의 무성의, 불친절 등에 대하여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예가 없지 않은 바, 《하얀 거탑》의 일독을 계기로 상호 신뢰감 등이 더욱 돈독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옮긴이)


 판권을 보니, 책값이 2500원이었으나 스티커를 위에 붙여서 3000원이 되게 했습니다. 책 껍데기에는 ‘특판가격 1000원’이라는 스티커를 따로 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처음에 2500원으로 팔려고 하다가 안 팔린 어느 날, 물건값 오름세에 맞추어 3000원으로 맞추었고, 이렇게 물건값 오름세에 맞추고도 오래도록 팔리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재고를 치운다는 생각으로 1000원으로 외려 값을 내려서 떨이로 치웠다는 소리일까요.

 

 연속극으로 만들어진 요즈음(지난해였나요?) 이 소설이 나왔다면 불티나게 팔렸을까요. 적어도 책이 안 팔려서 재고로 치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5〉 오늘 골라든 책은


 〈굴다리〉 아저씨는 책손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으레, “저는 말예요” 하고 말머리를 엽니다. 책손이 당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라고 해도 쉬 말을 놓지 않습니다. ‘나이로는 당신이 한참 위라고 할 수 있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됨됨이로서는 늘 고개를 숙이면’서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굴다리〉 아저씨가 높임말로 이야기를 하시면, 듣는 저로서는 엉거주춤.

 “오늘도 좋은 책 많이 구경하고 갑니다. 다음에 또 책 구경하러 올게요.” “네, 그러세요. 잘∼ 들어가세요.” 오늘 하루도 제가 아는 만큼 책을 골라서, 가방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덧붙이는 글 | <굴다리 헌책방>은 공덕동 갈매기살 고기집 골목 한켠에 있습니다.


태그:#헌책방, #굴다리 헌책방, #서울, #공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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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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