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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구슬 서 말인 인생은 말과 생각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구슬은 넘쳐난다. 그 구슬을 어떻게 잘 꿰느냐가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인 것이다.

 

구슬이 넘쳐나는 선거철,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슬의 가치는 달라진다.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인 양극화 해소의 구슬을 누가 잘 꿸 것인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한다.

 

올해 회갑을 맞는 선한 싸움꾼이다. 회갑잔치, 우리사회에서 남부끄러운 일로 가족끼리의 잔치가 된지 오래다. 남부끄러운 잔치에 무려 700여명의 축하객들이 모였다. 대중 집회도 200명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한 개인의 잔치에 그렇게 많이 모일 수 있을까.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아름다운 삶이었기에 그리도 많은 축하객들이 모인 것일까.

 

 

자신의 처지에서 성자처럼 묵묵히 일하는 이 땅의 선한 사람들. 그늘지고 소외된 곳, 억압과 착취가 있는 현장에 자신을 투신한 많은 양심인들, 사회와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지도자들이 한 운동가의 회갑잔치를 빌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10월 19일(금) 오후 6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 모인 이 땅의 선한 사람들. 이석행 씨의 사회로 "선한 싸움꾼 박순희 아녜스" 출판기념과 회갑연은 진행되었다. 성당의 제단에는 현장을 제대 삼고 노동을 제물로 세상의 미사를 봉헌한 박순희 씨와 어머니와 큰 오빠가 자리했다. 세상의 변혁을 위해 40년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약력이 소개되었다.

 

"1947년 3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모방에 입사해서 1967년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부지부장이 되어 동일방직, 와이에이치, 청계피복 등의 동지들과 여성해방노동자 기수회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80년 사회정화 조치로 강제해고 되고 수배 생활하는 동안 원풍모방 노동조합 강제해산 싸움에 관여하여 제3자 개입으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83년부터 익산의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일하면서 전북지역 노조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 후 전노협 공동대표, 가노협 회장,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 부회장, 천주교 정의구연전국연합 상임대표 등 여러 사회단체장으로서 평택미군기지, 한미FTA 반대 운동 등 여러 사회문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평화의 한 길을 전력 질주한 운동가, 선한 싸움꾼으로 현장을 지켜온 영상물이 상영되었다.

“이름만큼이나 선한 여자 ‘순희’를 선한 ‘싸움꾼’의 삶을 살게 해주시고,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 대열에 육십을 살도록 이끌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의 사랑을 제 마음과 영혼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눈물로 씨 뿌린 사람들이 기쁨의 곡식 단을 들고 환호하는 그 날까지’ 살아 움직이는 그 순간까지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우리 서로 힘이 되어 살아갑시다.”

 

 

자서전의 고백처럼 그녀의 영상물은 현장의 소리였다. 코믹한 각본과 연출까지 삽입된 영상물은 축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축하공연의 첫 무대는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와 70년민주노동자회 회원들이 열었다. 함께 부른 투사의 노래는 치열하게 현장을 지켜온 ‘선한 싸움꾼’의 삶을 고스란히 표현해 주었다. 삶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없다는 것을 축하객들이 목청껏 외친 무대였다.

 

다음은 원풍모방 노동자였던 자매의 축하 부채춤이 이어졌다. 멀리 전주에서 올라온 전북지역 사회단체들의 공연은 축하공연의 절정이었다. 화려한 무대의상과 춤과 노래는 선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한 무대였다. 축하객들의 박수와 함께 부른 노래는 출연자와 관객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판타지였다.

 

마지막 공연은 민주노총의 영상물이었다. 한 지도위원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저희들의 희망입니다. 지쳤을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고, 꾀를 부리고 싶을 때 단호하게 꾸짖어 주시는 선배님이십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투쟁의 현장에서 건강하게 만날 수 있기를 두 손 모읍니다."라며 고백했다.

 

 

사회자는 다음 말로 선한 싸움꾼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과 사회운동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자주 고백하며 단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현장을 지켜온 주인공의 인사말을 듣겠습니다."

 

"제 삶의 여섯 기둥, 열 살씩 끊어서 촛불 하나씩 밝혀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0대까지는 제 출생이고요. 20대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알게 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신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노동청년회를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의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며 열심히 활동하던, 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분신했습니다.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노동운동을 더 하다보면 나도 저렇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그만 둘까, 결혼을 할까, 어떻게 살까. 많은 고뇌를 하다가 수녀원에 가야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기둥인 촛불에 불을 밝힌 그녀는 사회운동가로 접어들게 된 동기에 대한 뜨거운 고백을 이어갔다.


"수녀원에 입회하려고 이불 짐을 싸들고 나와서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 신부님께 인사차 갔습니다. 근데 지도신부님이 수녀원을 가지 말라는 거예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는데 수녀로 사는 것이 좋은지 평신도로 사는 것이 좋은지 하나씩 따져 보았어요. 근데 글쎄, 수녀로 살면 노동과 사회운동을 하는데 너무도 많은 제약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살 수 있는 노동과 사회운동과 결혼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기로 성소를 결정했어요.

 

80년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으로 활동할 때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 사회정화차원에서 해고당했습니다. 노조해산에 맞서 싸우다가 제3자개입금지법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니까 블랙리스트가 되어 더 이상 취직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동현장을 떠나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활동했습니다. 태창, 쌍방울, 백양 등의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조직하는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북지역 민주노조는 대부분 노동자의 집을 통해서 조직되었습니다. 명절에도 특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떡국이나 송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집에 가지 않자, 노동자들이 제가 고아인줄 알았어요."

 

끝으로 그녀가 40년 동안 사회운동을 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부끄러운 고백이라며 말을 마쳤다.


"운동에서 가장 힘든 게 회유의 유혹이더라고요. 노동운동을 하다가 안기부에 끌려갔죠.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와 사회를 위해 일해 왔으니까 이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라며 보건복지부 3급 공무원 자리를 제시하는 거예요. 그래, 눈 한번 딱 감고 여생 편하게 살까. 결혼도 하고 부모님께 효도도 할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때 만큼 기도를 많이 한 적이 없었어요. 차라리 잠안 재우기 고문을 당하는 게 났겠더라고요. 가장 무서운 적이 회유책이었어요. 그 싸움은 나와의 싸움이니까요. 정말 피를 말리는 고뇌를 기도로 이겨냈습니다. 그런 회유를 물리쳤기에 지금 제가 이런 축하를 받고 있는가 봅니다."

 

노동가수 박준 씨의 축하공연으로 1부를 마쳤다. 로비까지 접시를 들고 오순도순 정감어린 잔치를 즐겼다. 2부는 지하식당에서 저녁식사 후에 이루어졌다. 축하 떡 케이크를 자르고 최종수 신부의 축시가 낭송되었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 아리랑과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를 함께 합창했다. 더덩실 춤을 추는 흥겨운 자리는 밤이 새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40년 동안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을, 3급 공무원 출세보다는 박봉의 활동가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부귀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현장을 지키는 고난의 구슬을 꿰어 '선한 싸움꾼' 보배를 만든 박순희, 그녀는 희망대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훈훈하게 품어주는 가슴이 될 것이며,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 정의와 평화의 깃발로 펄럭하는 활동가가 될 것이다. 60년 삶이 말해주듯이 그녀야말로 우리 시대의 양심, 선한 싸움꾼이다.

 


태그:#선한싸움꾼,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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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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