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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28일까지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공동 주최한 '2007피스&그린보트'가 진행됐습니다. 한일 대학생과 시민 등 600명이 승선한 피스&그린보트는 요코하마→하치노헤→쿠시로(이상 일본)→캄차카→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이상 러시아)→부산까지 항해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STOP!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한 이번 항해에 함께한 강인규 시민기자의 승선기와 기항지 체험을 담은 글을 연속해서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7살에 고향을 떠나 사할린으로 간 정순이 할머니. 평생 고국을 그리며 타국 땅에서 살아 온 사할린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다.
 7살에 고향을 떠나 사할린으로 간 정순이 할머니. 평생 고국을 그리며 타국 땅에서 살아 온 사할린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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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이 할머니.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손등과 이마에 놓인 거친 주름살이 지난 세월의 고뇌를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을 떠올리는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는 소녀처럼 빛난다.

"한국에 돌아가면 전국을 다 돌아다닐 작정이야."

정순이 할머니는 일곱 살에 이곳 사할린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이미 두 해 전 일본에 의해 광산 노동자로 징용되어 온 상태였다. 애초에는 2년 뒤 아버지를 한국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못 돌아간 일곱 살 소녀의 고향

정 할머니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사할린행을 결심한다. 가족이 간곡히 부탁하면 휴가라도 줄 것이며, 그것을 핑계 삼아 귀국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일곱 살짜리 어린 딸도 어머니의 긴 여행에 따라 나섰다. 열 살짜리 아들도 있었으나, 남매를 모두 데려올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곧 돌아올 터이므로, 오빠는 친척 집에 잠시 맡겨두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모녀가 아버지를 데려오기는커녕, 둘 모두 사할린에서 발이 묶였다. 이렇게 어머니와 딸은 고국에 아들과 오빠를 떼어놓고 반세기를 살아야 했다.

정 할머니의 고향은 진주다. 할머니의 말투에는 여전히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났다. 하지만 7살에 떠난 고향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다 기억해요. 집으로 가는 골목길 하나하나가 생생히 기억나요."

가능한 일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60년 이상 지켜낼 수 있을까? 할머니의 놀라운 기억력, 그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머리에 새겨 놓은 사진일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한 결과로서.

끌려갈 때는 일본인으로, 버려질 때는 한국인으로 

사할린은 한국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저주받은 땅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낀 이 섬은 늘 논란과 분쟁의 대상이었으며, 이 험하고 낯선 땅으로 강제 유배된 비자발적 개척자들은 혹독한 날씨와 질병, 그리고 배고픔으로 처참한 삶을 이어갔다. 1890년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사할린을 방문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은 "러시아 땅 가운데 가장 비참한 곳"이라고 썼다.

그리고 얼마 후 체홉이 묘사한 참담한 생활은 고스란히 한국 동포의 몫이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사할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일부 지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혹은 '취업' 명분으로 사할린에 이주시켜 사할린에 매장된 석탄을 캐도록 했다. 

탄광에서 목숨을 건 힘겨운 노동이 계속되었지만, 일본은 이들에게 약속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강제저축의 형태로 빼앗기도 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국민들은 '일본인'의 이름으로 징용되었으나, 사할린 땅에 도착해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라를 잃은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할린 한국교육원 앞에 서 있는 추모비 조각과 위령탑. 광부로 징용된 한국인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차별 속에서 숨져갔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 앞에 서 있는 추모비 조각과 위령탑. 광부로 징용된 한국인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차별 속에서 숨져갔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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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사할린은 다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배를 보내 사할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귀국시켰다. 그러나 사할린의 한국인들을 책임져 주는 나라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냉전이 찾아왔고, 남한 정부는 사할린 동포를 '적국'의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모든 이의 무관심 속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그러나 사할린의 한인들은 고국의 무관심 속에서도 사할린에서 가장 존경받는 소수민족 사회를 일구어냈다. 그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사할린 한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러시아에서 널리 존경받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한인 1세들은 힘겨운 삶 속에서 2, 3세의 교육과 문화유산 전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민속춤을 공연하는 한인 3세들의 모습.
 사할린 한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러시아에서 널리 존경받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한인 1세들은 힘겨운 삶 속에서 2, 3세의 교육과 문화유산 전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민속춤을 공연하는 한인 3세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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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문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할린의 한인 어린이들은 수준 높은 공연으로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문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할린의 한인 어린이들은 수준 높은 공연으로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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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풀리지 않은 한과 그리움

전쟁 후 사할린 땅에 남겨진 동포는 4만5천명이었다. 1세대 가운데 다수가 고국을 그리며 숨져갔고, 생존자들은 대부분 고희를 넘긴 나이가 되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 후반부터 귀국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한은 러시아와 수교했고, 한일 양국의 협의를 통해 일부가 한국으로 영주 귀국했다.

그러나 과정은 더뎌, 영주귀국이 시작된 1992년부터 15년 동안 귀국한 동포 1세대는 1685명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달까지 600여명을 더 귀국시킬 예정이지만, 여전히 3000명이 넘는 1세대 동포가 사할린에 남아있다. 이들 가운데 다수가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고령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에게 여유 있게 기다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할린의 모든 동포에게 영주귀국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를 '사할린 한인 1세'로 규정하고 그들에 한해서만 영주귀국과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출생한 한인들 가운데도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1세대의 가족 가운데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본인이 원해도 귀국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이 비극이 일본 정부의 징용과 한국 정부의 무능 또는 책임회피의 결과라는 점을 생각하면, 1세대 이후 세대의 한인들에게도 보상과 지원이 따라야 한다. 사할린에 정착한 가족들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보조하는 것은 물론, 영주귀국자들이 사할린의 가족을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도록 여행경비 지원도 필요하다.

피스&그린보트 방문자들을 맞는 사할린 한인 3세들. 한국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들에 한해서만 영주귀국 자격을 주고 있다.
 피스&그린보트 방문자들을 맞는 사할린 한인 3세들. 한국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들에 한해서만 영주귀국 자격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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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그린 보트 참가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사할린 징용한인에 대한 책임 있는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일본적십자를 통해 한인 1세들의 영주귀국을 위한 재정을 일부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피스&그린 보트 참가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사할린 징용한인에 대한 책임 있는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일본적십자를 통해 한인 1세들의 영주귀국을 위한 재정을 일부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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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한인들은 일차적 책임을 일본 정부에 묻는 가운데, 그들에게 적정 수준의 생활보조금과 여행경비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에 대한 보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일본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이후에도 한국정부가 국가차원의 보상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정부가 책임져야 할 몫이 적지 않다. 

나라를 잃은 결과로 국민이 당한 고통은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할지라도, 세계 12위 경제대국이 된 후에도 이들을 외면한다면 그 나라는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고국과 이산가족 사이에서

이희자 할머니는 몇 년 전 영주귀국을 했지만, 러시아에 정착한 가족들 때문에 사할린을 자주 찾는다. 사할린 한인 지원은 영주귀국 뿐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가족들과의 만남과 현지생활비 보조 등으로 폭넓게 확대되어야 한다.
 이희자 할머니는 몇 년 전 영주귀국을 했지만, 러시아에 정착한 가족들 때문에 사할린을 자주 찾는다. 사할린 한인 지원은 영주귀국 뿐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가족들과의 만남과 현지생활비 보조 등으로 폭넓게 확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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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자(67) 할머니는 몇 년 전 영주 귀국했다. 젊은 시절 곱디고왔을 할머니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새겨졌다.

꿈속에서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갔지만, 마음 한 편은 여전히 사할린에 머물러 있다. 그곳에서 러시아인으로 성장한 아이들 때문이다.

가혹한 운명은 이 할머니에게 '타향살이'와 '이산가족' 가운데 하나를 고르도록 강요했다.

타국 땅에서도 잘 커준 아이들이 대견스럽지만, 비싼 항공료 때문에 마음만큼 그들을 자주 찾지 못한다. 할머니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틈틈이 가꾸어 온 꽃밭을 보여 주었다.   

정순이 할머니의 얼굴은 밝았다. 얼마 후면 다시 밟게 될 고향땅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도 있었다. 한국에 갔다 돌아오기만 하면 깊은 향수병을 앓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본다.

"<완전한 사랑>도 보고 <장밋빛 인생>도 봐요. <장밋빛 인생>, 그거 좋아요. 그거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할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나 보다. 반세기의 설움 속에서도.


태그:#사할린, #징용, #영주귀국, #한일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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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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