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3. 당분간 싸이 접는다.
수능 끝날 때까지 초(超)폐인.
 
고3이라고 '초 폐인'을 선언하고 칩거에 들어갔던 딸 친구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수능'이라는 무서운 호환마마(?)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동안 개점휴업 상태로 폐쇄되어 있던 고3 친구들의 싸이월드도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메신저에도 수험생 친구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평가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하는 가혹한 수능 시험. 이 시험을 끝낸 학생들의 홀가분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인 것 같다. 모두가 '앗싸'를 외치면서 그동안의 구속을 지긋지긋해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직 수능 결과가 나오기도 전인데 자살한 학생의 슬픈 소식도 들리고 곧장 재수를 선언한 학생의 기운없는 소식도 들려온다.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도대체 수능이 무엇이기에, 대학이 무엇이기에 어린 청춘들을 이토록 궁지로 몰아넣고 또 다시 같은 시험 준비를 하느라 1년을 허비하게 만드는지 안쓰러울 뿐이다. 
 
이런 안타까운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그릇된 '학력지상주의'가 크게 한 몫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입시철만 되면 서울대부터 거론되는 언론의 대학 한 줄 세우기식 보도, 고등학교 교문 위에 나붙은 ‘서울대 O명 합격’ 등의 플래카드, 명문대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와 기업 조직. 지난 번 광풍이 불었던 학력 위조사건.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류병과 일그러진 학력 지상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공부 잘 하고 있냐고 확인까지 했대, 미친 학교"
 
"근데 (서울대 가라고) 계속 달달 볶아가지고;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걔가 서울대 합격할 수 있게 공부하긴 하겠대. 어제는 막 담임이 집에다 전화해서 공부 잘 하고 있냐고 전화로 확인까지 했대. 미친 학교.

"내 친구 포항공대 붙었는데 축하해 주는 선생님이 없대. 서울대 안 썼다고."

"카이스트 5명 붙었다고 좋아라 하고. 사관학교 안 가는 애들한테 다 시험 보라고 한 다음에 25명 1차 합격시키고 (2차 합격자는 1명 ㅋㅋㅋ)."
 
 
 
 
수능 시험을 며칠 앞둔 지난 11월 초. 딸아이가 한국에 있는 친구와 메신저를 하면서 기사 제보(?)를 했다. 딸 친구가 다니는 어떤 고등학교의 ‘서울대 지상주의’를 비난하는 제보였다. 기사 제보가 고맙긴 했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수능이 바로 코 앞이라면서 넌 지금 수험생이랑 한가하게 메신저를 하고 있니? 그 애도 공부해야 할 텐데. 그 애 엄마가 아시면 걱정하시려고.”
 
“엄마, 얘는 OO대 수시에 붙어서 이제 해방된 아이야. 수능 스트레스를 받는 다른 애들하고는 달라. 수시에 붙은 애들은 수능 시험 걱정 안 해. 아주 여유만만이야. 그 애들은 이제 운전 면허 딴다고 자동차 운전 면허 시험 공부한다잖아. OO이는 벌써 과외 알아본다고 하고."
 
 
딸아이는 이번에 명문대 수시에 합격한 OO이가 명문대 프리미엄을 이용해 돈 잘 벌리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 소식까지 전했다. 
 
그런데 딸과 메신저로 연결된 그 친구는 자기네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입시와 관련된 갖가지 비리(?)를 딸에게 제보했다. 
 
▲ 서울대 간판보다는 학과를 보고 다른 대학을 가고 싶은데 담임 선생님은 학교 명예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서울대를 가라고 달달 볶는다(?).
▲ 사관학교에 갈 생각이 없는 학생들을 회유하여 대외 과시용으로 사관학교에 원서를 내도록 한다.
▲ 학교는 공부 잘하는 최상위층 학생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쓸 뿐 다른 아이들은 모두 들러리다.
   
 
그 친구는 학교 측의 이런 부당한 처사를 성토하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학교를 '미친 학교'라고 결론 지으며 속상해했다. 딸아이는 실시간으로 전해오는 이런 부조리를 내게 전하면서 그 아이와 함께 분개했다.
 
"아, 정말 나쁘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21세기,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과시하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이런 구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단 말인가. 학력 지상주의, 서울대 지상주의 망령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단 말인가. 명문대 합격생 숫자로 학교를 평가하고 학력을 평가한단 말인가. 
 
입시철이 끝나면 늘 인근 고등학교 교문에 붙어있던 화려한 플래카드 문구가 언뜻 떠올랐다. 
 
"서울대 O명, 고려대 O명, 연세대 O명, □□대 의대 O명, 약대 O명, **대 한의대 O명…"

 

학교 명예를 올린 대단한 업적이라고 자랑스럽게 플래카드를 내다 거는 모양인데 이런 소영웅주의적인 일류병이 바로 우리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자가 살고 있는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해리슨버그. 이곳에 있는 유일한 공립인 해리슨버그 고등학교에서는 미국의 명문으로 불리는 하버드, 존스홉킨스, 코넬, 스탠포드 대학에 가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물론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하지만 이들 우수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거창하게 학교에 나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기자 생각으로는 이들의 명문대 입학이 사실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고,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인생관과 철학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는 지켜 봐야 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명문대 입학이 곧 바로 그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 때, 극소수의 잘난 학생만을 위하는 교육이나 어쭙잖은 학교 명예를 위한답시고 서울대 합격생 수만 늘리려는 어긋난 진학 지도는 분명 비난 받아야 할 일이 아닐런지.  

태그:#학력지상주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