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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도정이다. 같은 길, 같은 것을 보면서 보는 눈은 다르다. 이번 가을 여행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경험을 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자연은 도처에 비밀스러운 그림을 숨겨놓고 있었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은 독특한 풍광만으로도 신비스러움을 가득 품고 있다. 여러 차례 마이산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마이산은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이산은 코끼리와 같은 숨은 그림 몇 개를 보여주었지만 아마도 무수한 그림이 여전히 숨겨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설처럼 비밀스럽고 신화처럼 신령스러웠다.

큰바위 얼굴과 마주치다

두 봉우리 사이인 고갯마루에서 암마이봉을 카메라에 담다가 문득 얼굴 모양을 발견했다. 그냥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카메라의 프레임에 비치는 모습은 영락없는 큰바위 얼굴이었다. 3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 <큰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교과서에서 배우면서 추억 너머로 사라진 그 얼굴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인자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카메라에 잡힌 얼굴 모습
▲ 큰바위 얼굴 카메라에 잡힌 얼굴 모습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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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큰바위 얼굴> 아래에서 곰 한 마리가 잠을 자듯 누워있지 않은가? 틀림없는 곰이었다. 마치 인자한 얼굴에 기대어 아기곰 한 마리가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세히 보니 풀 무더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곰으로 보일 뿐이었다.

감춰진 자연의 비밀문을 열어본 듯 설레는 마음으로 숨은 그림을 찾아나섰다. 그런 눈으로 자연을 보니 온통 숨은 그림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여행과 아주 다른 독특한 체험이기도 했다.

   마치 곰처럼 보이는 풀 무더기
▲ 잠자는 곰 마치 곰처럼 보이는 풀 무더기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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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코끼리가 있었다!

고갯마루에서 은수사로 내려왔다. 그 산에 그 절인가. 은수사는 겨울철에 청실배나무 밑둥 옆에 물을 담아두면 나뭇가지 끝을 향해 역(逆)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신비스러운 절이다. 큰북을 마음껏 쳐도 좋은 절은 은수사가 처음이다. 둥둥둥 세 번을 크게 치자 북소리는 골짜기를 휘돌아 다시 내 마음을 두드렸다.

탑사를 향해 내려가는데 젊은 사진사가 코끼리 사진을 찍으라고 권한다. 코끼리라니? 지금까지 몇 차례 마이산을 찾았지만 코끼리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숫마이봉을 보라는 것이다. 세상에! 코끼리가 완연하다. 숫마이봉 자체가 거대한 코끼리였고 앞쪽에는 긴 코와 눈이 뚜렷한 또다른 코끼리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운주사 아래에서 바라본 두 마리의 코끼리 형상
▲ 코끼리의 모습 운주사 아래에서 바라본 두 마리의 코끼리 형상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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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상부만을 보니 인자한 얼굴이다. 마치 코끼리 아저씨가 억 년 침묵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듯 보였다. 마이산은 이제 코끼리산이라는 이름 하나를 얻어도 되겠다. 조물주는 참으로 짓궂은 장난도 잘 하신다. 말 귀에 코끼리를 새겨 놓으시다니!

   상부만 보면 눈을 지그시 감은 인자한 얼굴이 된다
▲ 코끼리의 또다른 얼굴 상부만 보면 눈을 지그시 감은 인자한 얼굴이 된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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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의 마음을 흉내내다

점심을 먹으면서 나도 잠시 조물주의 마음을 흉내내어 본다. 포장으로 사용된 은박지 위에 김밥과 나뭇잎으로 만들고 보니 올빼미로 변한다. 조물주도 힘들게 마이산을 만들어놓고 쉴참에 코끼리를 그려놓았나 보다. 어린이와 동행한다면 이런 놀이도도 꽤나 괜찮은 창의적 교육이 될 듯도 싶다.

      김밥과 포장지로 만들어본 올빼미
▲ 김밥 올빼미 김밥과 포장지로 만들어본 올빼미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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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빨간 열매를 주워 나뭇잎으로 새를 만들어본다. 나뭇가지로 잠자리도 만들어보고 김밥을 쌌던 고무밴드로 둥근 얼굴을 만들어본다. 색다른 재미가 쏠쏠하다.

  나뭇잎과 빨간 열매로 만들어 본 나뭇잎 새
▲ 나뭇잎 새 나뭇잎과 빨간 열매로 만들어 본 나뭇잎 새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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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사, 돌탑이 이룬 엄숙한 종교 

탑사로 내려온다. 한 인간의 혼신이 평생을 쌓아놓은 거대한 돌탑을 보면서 숙연함을 느낀다. 탑사를 올 때마다 삶은 함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돌 하나 하나가 쌓여 만들어진 저 거대한 탑은 차라리 엄숙한 종교이다.

    거대한 돌탑을 보면서 혼신의 힘을 느껴본다
▲ 마이산 탑사 거대한 돌탑을 보면서 혼신의 힘을 느껴본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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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극으로 통하는 <바보 바위>

탑 주변을 맴돌다가 문득 한 형상을 보았다. 분명 또 하나의 얼굴 모습이다. 입에 해당되는 곳에는 누군가 두 개의 작은 돌탑을 쌓아서 마치 이처럼 보인다. 동그란 눈과 입을 헤벌린 모습이 마치 무엇에 놀란 것인지.

무엇이라 이름 짓기 어려운 형상을 나는 '바보 바위'라고 이름지어 본다. 극은 극으로 통한다고 지극한 도는 어쩌면 바보의 도일지도 모른다. 운보 김기창은 필생의 예술혼으로 '바보 산수'를 그려냈지 않았던가. 이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니 '가자미'를 닮았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이름도 그럴 듯했다.

     탑사의 돌탑 사이에서 입을 헤벌린 모습 때문에 바보 바위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 바보 바위 탑사의 돌탑 사이에서 입을 헤벌린 모습 때문에 바보 바위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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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는 자연속 숨은 그림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만큼 보였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은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 모습은 수많은 눈들에 의해서 닳고 닳아진 듯 더는 새롭지 않았다.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그저 비슷비슷한 느낌만 남아있다. 여행의 참맛인 새로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마치 처음 세상에 눈을 뜬 아이처럼 신기하고 신선했다. 남부 주차장에서 또하나의 형상이 보였다. 프레임으로 바라본 기이한 얼굴 형상을 '킹콩'이라고 이름 붙였다. 형상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꼭 이름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어쩌면 속세에서 물든 못된 버릇인지 모르겠다. 입 모양에 돌탑이 있어서 마치 이처럼 보여 더 실감이 났다.

  남부 주차장에서 발견한 킹콩의 모습의 형상
▲ 킹콩? 남부 주차장에서 발견한 킹콩의 모습의 형상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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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그 애달픈 사랑이야기

마이산 전체는 마치 달의 분화구처럼 곳곳에 구멍이 나있다. 호박돌들이 서로 엉키어 거대한 산을 형성한다. 어찌보면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절벽에 능소화가 자라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트 모양이 아닌가. 능소화에는 이러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전설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지인인 김명서 시인은 능소화의 애달픔을 시로 달래기도 했다.

마이산 탑사의 절벽에는 능소화가 하트 모양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간절히 바라기라도 하듯이.
▲ 능소화의 사랑이야기 마이산 탑사의 절벽에는 능소화가 하트 모양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간절히 바라기라도 하듯이.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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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구중 궁궐에 소화라는 어여쁜 살았다. 임금은 첫 눈에 반해 소화에게 빈(嬪)의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소화를 찾지 않았다. 구중 궁궐 깊은 처소에서 어쩌면 오늘이나 님이 오실까? 내일이면 오실까? 임금님의 예리성을 듣던 소화는 결국 잊혀진 여인이 되어 상사병이 깊어서 죽고 말았다.

소화가 살아생전에 부탁한대로 하녀들은 담장아래에 매장을 하였다. 자신은 죽으면 담가의 꽃으로 피어나 내일이라도 오실 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겠다고 했다. 그 뒤 소화가 죽은 처소 담 아래에는 주황색 꽃이 피어 났는데 님의 예리성을 듣기 위해서 귀를 활짝 열었던 소화의 애절한 마음이 꽃이 되어서일까? 능소화는 꼭 나팔처럼 생긴 꽃으로 피었다 한다.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있는 것처럼….


능소화

                                                   - 김명서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우주 하나가 들어온 것같이
        당신이 성큼 들어온 순간
        결박된 수문이 한꺼번에 열렸습니다
        폐허 한 채 쓰러지고
        흥건히 젖어오는 애액
        그러나 닿기엔 너무 아득한 이 갈증
        해소할 수 있도록
        제발 나를 불러주세요
        새벽 별보다 더 푸르게 깨어 있다가
        먹보랏빛 울음으로 타버린 가슴에
        당신의 이름을 얹어놓으면
        심연에서 넌출넌출 올라오는 수십 마리의 뱀,
        불의 혓바닥으로 널름거립니다
        멀미가 나고 숨이 막혀
        가슴을 쥐어뜯는 자리마다
        주홍빛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내세에 무간지옥으로 떨어진다 해도
        지금은 나를 깨뜨리고 싶습니다
        견디고 견디다가 키워버린 독으로
        당신의 눈을 멀게 하고 싶습니다


능소화의 슬픈 전설이 저런 하트 모양을 만들어낸 것인가. 능소화 앞에 이런 전설표지판이라도 만들어 놓는다면 한결 마이산은 또하나의 신비스러움을 담고 있지 않겠는가.

30년 전의 추억, 운일암반일암을 찾아서

30년 전에 찾았던 젊은 날은 물처럼 흘러갔지만 그 추억은 풍경처럼 오롯이 남았습니다.
▲ 운일암반일암의 정경 30년 전에 찾았던 젊은 날은 물처럼 흘러갔지만 그 추억은 풍경처럼 오롯이 남았습니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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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을 떠나 운일암반일암으로 여정을 옮긴다. 30여 년 전의 젊은날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다. 먼지가 풀석이면서 버스로 겨우 왔던 오지가 매끈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전혀 다른 곳에 온 듯이 낯설다. 기억을 더듬어 냇가로 내려선다. 이미 자연 속 숨은 그림찾기에 열중했던지 두 개의 바위에 눈이 간다. 마치 키스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라도 하듯 놓여있었다
▲ 운일암 반일암에서의 <사랑 바위>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라도 하듯 놓여있었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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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질투의 두 얼굴

그러나 또하나의 바위가 질투가 가득한 모습으로 두 바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질투심만큼 마음의 지옥이 있을까? 미움과 분노로 일그러진 모습에 '질투 바위'라고 지어본다. 사랑과 질투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세 개의 바위는 운일암반일암 정자 바로 아래의 물가 가운데 있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도 있지만 이렇게 극적인 형상을 보는 것도 뜻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바위 끝 부분에서 분노와 미움이 가득한 얼굴 형상을 발견했다.
▲ 질투 바위 바위 끝 부분에서 분노와 미움이 가득한 얼굴 형상을 발견했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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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 호박만한 돌로 탑을 세워놓았다. 그도 역시 조물주의 마음을 흉내내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의 아랫돌이 얼굴을 닮았다.
▲ 돌탑 얼굴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의 아랫돌이 얼굴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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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나그네 바위>를 보다

길은 구름으로 반쯤 가린다는 운일암반일암을 지나서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생애는 어찌보면 쉼과 감이다. 사람은 쉬고 싶어서 집을 만들고 떠나고 싶어서 길은 만든 것이 아닐까. 길은 유혹한다. 오라고, 나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떠나자고.

그러나 길 위의 생은 지치고 외롭다. 그러기에 나그네라는 말에는 애수가 짙게 배어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나그네처럼 바위 하나가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듯이 지친 모습으로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듯도 싶다.

   길가에서 나그네가 쉬고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
▲ 나그네 바위 길가에서 나그네가 쉬고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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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서 본 산마루에는 거대한 부처님이 있었다. 운일암반일암을 지켜보면서, 아니 속세의 피곤함에 절어 이곳을 찾아온 중생들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자비를 베푸신 부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오기 때문일까. 백팔번뇌에 찌들려 살아가는 중생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듯이 그렇게 부처님 형상의 바위는 운일암반일암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처 바위>를 보면서 여정을 마무리하다


마치 부처님이 서있는 듯 푸근함이 느껴져 부처 바위라 이름지었다
▲ 부처 바위 마치 부처님이 서있는 듯 푸근함이 느껴져 부처 바위라 이름지었다
ⓒ 우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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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여정은 참으로 뜻깊은 추억이었다.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자연을 보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이산과 운일암반일암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형상들은 자연의 신비, 그 한 자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단순히 공간속에서만 가시적인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무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만심에 도취해 눈을 감고 사는 미천한 존재일지 모른다. 

한편 세속적인 미천함으로 본다면 그런 형상을 발굴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찮게 보이는 것도 전설이 배이면 오래 묵은 장맛을 내는 법이다. 태양에 비추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배이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이런 새로운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행의 또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보는 방안도 생각할 여지는 있다고 본다.


태그:#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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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꿈마저 없다면 삶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혁이나 혁신이나 실은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의 다른 어휘일 뿐일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교육이고 내 글쓰기가 문화라고 한다면 특히 그런 쪽의 이데아를 찾고 싶다. 물론 내가 찾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정답보다는 바른답을 찾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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