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여립' 그를 몰랐다. 전혀 몰랐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정인홍'이라 생각했다. 광해군을 다룬 사극을 볼 때 접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여립을 만나면서 가슴이 떨렸다. 신정일은 왜 정여립을 책에 담았을까?

 

왕정시대 '역모'는 무엇일까? 현존하는 '왕'을 뒤엎고 자신이 '왕'되는 것이 역모일까? 아니면 모두가 하나인, 남존여비, 양반천민, 부자빈자가 따로 없는 대동(大同)세상을 꿈꾸는 것이 역모일까? 신정일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을 통하여 역모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는 왕촉의 말은 조선을 지배한 신념이었다. 조선은 그 족쇄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여립은 이를 거부한다. 기축옥사는 단순히 '옥사'가 아니다. 옥사는 반역한 자를 죽이는 지극히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다.

 

하지만 '사화'(士禍) 는 다르다. 조선 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말한다. 당파와 정책, 이념에 따라 자신과 당파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것을 말한다.

 

'정여립' 그는 반역을 뜻하는 이름이다. 반역이라 하면 왕을 옥좌에서 내려앉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을 정치체제로 만들고 제도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중심에는 선조가 있었다. 애초부터 선조는 정여립을 가슴에 안을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자기 자리를 탐하는 자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인은 정권을 건 운명적인 싸움을 정여립을 역모자로 몰아 죽임으로써 자신들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정여립과 선조, 서인은 겉으로는 '역모'였지만 역모의 기본개념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정여립이 대동 세상을 꿈꾸었다면 반역으로 몰렸을지라도 비굴하게 도망가고, 결국 민인백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는가? 신정일은 정여립을 단순히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조선 시대를 운명을 바꾼 역사로 기록하고 싶어한다.

 

정여립은 조숙했고 천재였다. 그는 이이 문하였다. 이이도 그의 명민함을 보았던지 선조에게 추천까지 하지만 정여립은 스승 이이를 비판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서인들은 정여립을 제거하는 기축옥사를 실행했고, 그 중심에 성혼과 정철이 있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과 같은 불후의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서인정권과 정치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잔인한 살육을 이끄는 위관에 앉는다. 천하의 문객이 살육의 정점에 섰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성리학이 가진 약점과 정파성보다 나라와 백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정철 같은 문객이 살육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은 소설보다 재미있다. 정여립 사건의 진실성을 탐구하면서, 당대 지식인들을 비교분석한다. 노수신/백유양, 이이/성혼, 유성룡/이항복/ 정철/최영경, 송익필/이발 등등이다. 노수신과 백유양은 정여립을 추천하여 비극을 맞았고, 이이와 성혼은 스승으로서 배신당한 이들이다. 정철은 최영경을 죽인다. 최영경은 외로운 고집쟁이 선비였다. 정철은 죽이는 자였고, 최영경은 죽임을 당하는 자였다.

 

그렇게 수많은 천재와 인재들이 죽어갔다. 2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이 '왜'에게 비참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철은 술 잘 마시는 이라 비판하여 위선자라 믿지 못할 자라 비판하여 비극을 맞는다. 그는 사후에도 사원이 여섯 번이나 헐린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에 기축옥사가 왜 그릇된 일인지 알게 한다.

 

"도를 쌓는 것을 부로 삼을 것이지 재물로써 부를 삼지 말 것이며, 덕을 이루는 것을 귀함으로 삼을 것이지 벼슬로써 귀함을 삼지 말 것이며, 인을 얻음이 영화이지 벼슬이 영화가 아니며, 구차히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욕됨이지 재앙이 겹친 불운은 욕됨이 아니다." (본문327쪽)

 

정개청이 옳은가 정철이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사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도인지, 인간의 길인지 물을 때, 이런 답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자가 정말 사람이라 할 것이다. 정개청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2부는 정여립의 모반에 집중한다. 대동 세상을 꿈꾼 정여립, 하지만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기축옥사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다. 꾸며진 사건이다. 역모다. 아니다. 신정일은 단순히 기축옥사와 정여립 개인보다는 기축옥사를 통하여 이 땅에 더러워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한 치욕에 관심을 가진다. 전라도에 대한 편견은 길고도 길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한 천체 속에 한 점인 지구, 우리는 그 위에서 잠깐 살다가 간다."(본문368)

 

한 점에 불과한 인간의 욕심이 개인과 자기가 속한 집단에 국한될 때 비극은 시작되며,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된다. 대동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지역과 인종, 남녀가 계급과 신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세상이다. 정여립은 그것을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과연 우리 시대 대동세상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권력욕심은 과하다. 과하다 못해, 민주질서까지 어기면서 권력을 탐한다. 권력을 탐하면서 자신은 구국이란 외친다.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눈 쌓인 벌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느니라." (본문 381).

 

대동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뒤에 오는 이, 함께 가는 이와 같이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길을 어지럽히는 자는 대동을 거역하는 자이다. 함께 가는 길을 꿈꾸는 자는 대동세상을 열고자 한다. 역사는 정여립을 역모자라 하여 잊으려 했다. 이유는 뒤에 오는 자를 위하여 눈 쌓인 벌판을 어지럽게 가고 싶기 때문이다. 조선 선조 시대는 눈길을 어지럽게 가다 조선을 지탱하고 이끌어갈 사람을 1000명이나 죽였다. 이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으니 과연 인간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안타까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  신정일 지음 ㅣ 다산초당 ㅣ 15,000원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다산초당(다산북스)(2007)


태그:#정여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