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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12월, 발해 해상항로를 복원하기 위해 겨울철 동해바다를 건넜던 발해해상항로 학술뗏목대탐사대(이하 발해1300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논문이 최근 발표되었다.

동북아역사논총 최신호에 실린 발해1300호 관련논문
▲ 발해1300호 관련최신논문 동북아역사논총 최신호에 실린 발해1300호 관련논문
ⓒ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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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동북아역사논총(동북아역사재단 발행) 16호에 발해1300호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윤배, 권용인, 이소희 등의 공저로 '발해건국 1300주년 기념 발해해상항로 학술뗏목탐사를 통한 발해의 동해해상항로 연구'가 실려 발해1300호 뗏목탐험과정이 발해 고대해상항로를 복원한 과정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동안 발해사 연구논문의 일부로서 발해1300호 항해가 일부 언급되어왔지만, 발해1300호 항해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논문은 기존의 인문학적 해석에 동해의 해양순환특성을 고려한 자연과학적 해석이 함께 결합되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접합을 시도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 논문을 평가한 익명의 심사위원들은 “동해상의 해류와 항로 등의 다양한 과학적 실증자료를 폭넓게 인용하여 분석함으로써 향후, 발해 해양 교류사 복원에 큰 도움이 된다”, “과거의 역사와 자연과학적인 데이터 그리고 현재 일어난 사건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역사의 현재적의미를 적절하게 반영했다고 판단한다”, “해양사 특히 발해의 해양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한국의 현실에서 앞으로 관련 연구의 진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는 평가의견을 밝혔다.

이 논문에는 발해시대 일본과의 해상무역항로에 관한 역사자료, 발해1300호 사고후 수색팀에 의해 발견된 발해1300호 항해일지, 발해1300호와 아마추어무선햄 사이의 교신기록을 비롯하여 유럽중층기상예보센타의 동해 해상풍자료, 부산대, 서울대,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동해에 투하한 인공위성추적 표층추적부이자료 등 다양한 동해 해양 및 기상관련자료가 활용되었다.

이들은 논문을 통해 발해인들이 러시아 연해주 - 일본 본토를 향하는 동해북부 횡단항로, 발해연안 - 울릉도 - 오끼섬 - 일본본토를 거치는 동해중부 연근해항로, 그리고 발해연안 출항후 기상악화에 의한 표류를 통해 일본 연안에 표착하는 발해인들의 해상무역항로를 제시하였다. 발해1300호 항해는 초기에는 동해북부횡단항로, 후기에는 동해중부연근해항로를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발해1300호 항해는 가을, 겨울철에 일본을 항해 출항하였던 발해인들의 항해를 실증적으로 재현했음이 제시되었다.

발해인들은 모두 34차례에 걸쳐 일본과 정치 경제적인 목적으로 동해를 건넜다. 모두 10월부터 3월사이에 이루어졌다. 북서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발해1300호는 일본도착과정에서 폭풍우를 만나 사고를 당하여 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안타까움을 남겼다. 발해역사에서도 이러한 사고는 빈번히 있었다. 발해당시 2차(739년) 항해때는 배 1척이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34차례 항해 중 6차례의 항해가 기상악화에 의해 일본연안에 표류 후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해가 이러한 사고때문에 일본과의 교역을 피했다면 해상왕국 발해라는 평가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비록 229년간 우리 역사에 발해라는 역사를 남겼지만, 이러한 진취적 도전과 탐험정신이 있었기에 고구려를 이어 동아시아의 자주국가로서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발해1300호가 12월에 출항한 걸 두고서 일부에서는 동해바다를 모르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애초 10월에 출항을 계획하였지만 외부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탐험대장이 집까지 팔아 겨우 12월에 출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출항시기는 발해당시의 항해를 재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비록 발해당시에는 범선을 이용한 항해였지만 발해1300호는 뗏목을 이용한 항해였다. 거기에는 발해해상항로를 실증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대원들의 고민이 있었다.

이 논문의 공저로 참여한 당시 발해1300호 육상지원팀을 맡았던 이소희씨(현 자전거사랑전국연합회 인천본부장)는 “비록 학술뗏목대탐사대 였지만 사고이후 이렇다 할 학술적 평가논문이 없어 항상 마음 한켠 짐이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발해1300호에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이어져 발해1300호의 의미가 부각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소회를 밝혔다.

발해1300호가 뗏목탐험에 돌입하기 전 국내에서는 발해사가 관심밖에 있었다. 이웃 중국과 일본의 관심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당시 이웃 중국, 일본에 비해 발해관련 논문발표건수는 월등히 뒤져 있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발해관이 없었던 당시의 현실은 이들이 발해해상항로 복원에 나서는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바다에서 지혜를 찾고자 했던 발해1300호 대원들의 발해 사랑이었다. 뗏목 탐험 이후 국내에서는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지만 최근 드라마 대조영의 성공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러시아 극동대는 장철수 탐사대장에게 발해 고대 해상항로 복원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명예해양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 장철수 대장 영결식장에 참석한 러시아극동대 부총장일행 러시아 극동대는 장철수 탐사대장에게 발해 고대 해상항로 복원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명예해양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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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이후 러시아 극동대학교 부총장 일행은 탐사대장을 맡았던 장철수씨의 영결식장에 직접방문하여 명예해양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지만, 국내에서는 대원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평가가 없었다. 지난 2001년 바다의 날에 육상지원팀장을 맡았던 이소희씨에게 해양수산부에서 훈장을 수여한게 전부이다.

발해의 역사가 1300년전의 묻혀진 역사에서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다시 국민들의 관심을 받게 했던 발해1300호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그러한 과정은 고구려에 이어 발해사까지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에 대한 대응으로 이어질 것이다. 발해1300호 기념사업회(http://www.balhae1300ho.org)에서는 10주기를 계기로 발해1300호 대원 4명에 대한 국가유공자 선정을 추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발해1300호 관련논문이 실린 동북아논총 16호 전문은 http://www.balhae1300ho.org/ybk/paper_16.pdf를 통해 받아볼 수 있다.



태그:#발해1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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