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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앨범 재킷
▲ [Creation]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앨범 재킷
ⓒ S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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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소설가 루쉰은 <고향>에 쓰고 있다.

이것은 마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걷지 않은 길>에서 “두 갈래 길이 내 앞에 놓여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두 길 중에서 사람들이 밟지 않은 길을 택하였고, 그 길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노래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창조는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창조를 통해 사람들이 걷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서양인에게 클래식은 음악의 고향이다. 재즈색소포니스트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이 ‘고향’에서 남들이 ‘걷지 않은 길’로 들어서고 있다.

프랑스 클래식 작곡가의 곡을 색소폰 음으로 재창조하고 있는데, 오르페우스 신화가 원시 그리스도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듯, 색소폰을 통해 클래식의 본바탕을 그리고 있다.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 클로드 드뷔쉬, 모리스 라벨, 다리우스 미요, 가브리엘 포레, 쟈크 이베르의 곡을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있는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색소폰은 장엄하면서 클래식의 품격을 놓지 않는 웅장한 맛을 보여준다.

특히 에릭 사티 곡으로 유명한 <Gymnopedie No. 3>는 에릭 사티의 피아노에서 들을 수 있었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단편의 풍경화로 채색하고 있다.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소프라노 색소폰은 추운 어느 북유럽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안온한-이를테면 색소포니스트 얀 가바렉의 앨범에서 느껴지는 냉철하고도 수정 같은-이미지로 그려낸다. 

클로드 드뷔쉬의 곡 <The Little Shepherd from Children's Corner Suite> 역시 차고 단단하면서도 묘한 하모니를 들려준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찰나의 직관과 인상을 그린 작곡가로 유명한 드뷔쉬의 곡을 변성기 전의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 연주한다. 

모리스 라벨의 <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 우리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라고 하는 이 곡은 우아하다. 스페인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하나 모리스 라벨은 이를 부인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왕녀의 우아함과 사뿐함이 느껴지는 회화적인 곡이다. 이 곡을 브랜포드 역시 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리우스 미요의 <La Creation du monde, Op. 81>은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17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변화무쌍하고 열정적인 이 곡은 클래식과 재즈의 특성만을 모아서 들려주고 있다. 특히 북소리가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현악의 풍부한 화음이 재즈의 즉흥연주를 듣는 듯한 여운을 주는 곡이다.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소프라노 색소폰은 클래식의 음감을 높여준다. 특히 다리우스 미요의 곡에서는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땅이 위로 샘솟는 듯한 다이내믹한 연주를 들려준다. 이것은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하나의 희망이고, 낭만적이면서도 신비한 시와 그림을 그렸던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태곳적부터 계신 이>처럼 천지가 열리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향한 갈구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윌리엄 블레이크, [The Ancient of Days], 1794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윌리엄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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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향한 열망은 절망과는 적어도 거리를 두고 있거나,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프랑스 클래식을 작곡가의 곡을 하이 톤의 선율로 그려내는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소프라노 색소폰은 많은 이들이 가지 않고, 걷지 않은 길에 대한 탐구이다. 그 길에서 그는 때론 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처럼 ‘절망을 잠시 벤치 위에 앉혀 놓고’ 삶에 대해서 깊이 묻기도 한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김사인 시인, <깊이 묻다> 전문

나는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희망’이 한 자리씩 묻혀 있었으면 좋겠다. 그 희망이 커다란 것이 아니더라도, 새로움을 통해 희망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움은 창조로 가는 첫걸음이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이 작품에서 색소폰으로 클래식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클래식을 재창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방법으로 재해석 하고 있다. 재창조는 재해석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며, 창조는 재해석에서 자신의 색깔을 입힐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앨범 <Creation>은 충분히 창조적인 면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재즈 월간지 MM Jazz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브랜포드 마살리스, #프랑스 클래식작곡가, #윌리엄 블레이크, #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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