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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부부의 첫 자손. 100일 즈음의 어여쁜(?) 모습.
▲ 하품하는 한이 우리부부의 첫 자손. 100일 즈음의 어여쁜(?) 모습.
ⓒ 임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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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돼지해에 낳는 아이. 기쁨보다 걱정이었다.

양가 부모님께 산후조리를 맡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장모님은 홀로 생활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대외 활동이 많고 몸도 약하셨다. 게다가 주변에서 정보를 수집해보니 부모님께 산후조리를 맡겨서 얻는 이득보다 심적인 부담이 훨씬 더하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우리 부부도 그리 생각하고 산후조리원을 생각했다.

돈도 없는 '별거 부부', 산후조리는 어떻게 하지?

임신 중기만 하더라도 "산후조리는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묻는 친구의 답에 "조리원이 나을 것 같은데"라고 막연하게 대답했지만, 임신 8개월에 다다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수입이 없는 상태이고 아내는 주택담보대출금을 갚느라 여유가 없었다. 몇백만원에 달하는 출산과 산후조리비용이 버거웠다. 게다가 당시 우리 부부는 '별거 중'이었다. 아내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녔고 나는 진안군 무릉마을에서 마을 간사를 하고 있어서 우리는 오백리를 떨어져살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내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도 감당하기 벅차하는 모습이었다. 호르몬 이상분비로 인한 아토피로 밤마다 긁어대느라 잠을 못 이루고, 변비로 인한 고생은 또 얼마나 유달리 심했는지 울면서 전화한 적도 있었다.

혼자 고생하던 아내를 생각하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 한 쪽이 베인 듯 아파온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아내는 여유있게 핀잔을 주면서 웃지만, 그 때에는 가슴을 졸이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전답사로 결정한 산부인과... 서울의 반값이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산부인과를 알아보기 시작한 아내는 소문이 괜찮은 신사동 근처의 모산부인과에서 정기검진을 받았다. 정밀 초음파를 받으러 삼성의료원을 다녀오는가 하면 산후조리원에 대한 정보도 여기저기서 묻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난리를 피웠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산모와 신생아에게 가장 스트레스가 덜한 출산환경을 제공하는 곳은 어딘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조산원을 알게 돼 아내에게 추천했지만, 아내는 "위급상황에 대한 대비가 부실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래서, 서울 강남쪽의 산후조리원을 알아보았지만, 그 엄청난 가격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며 살 진안엔 산부인과가 없고, 30㎞ 떨어진 도시 금산에도 우리가 원하는 산후조리시설은 없었다. 윗집 형님네도 아이만 낳고 퇴원해서 집에 왔다고 한다.

두 달이 되어가는 즈음의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다.
▲ hand in hand 두 달이 되어가는 즈음의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다.
ⓒ 임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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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산 중이라 가까운 도시래야 전주와 대전인데,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전주가 가깝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주 산부인과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린 전주의 좋은 산부인과를 찾아 사전답사를 했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정이었는데, 아내는 웹사이트를 통한 정보로 무려 스무가지에 달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는 들고 다니면서 꼼꼼히 체크했다.

산후조리원을 겸한 산부인과를 다녀보았는데, 조리원 시설이며 가격·서비스·의료진 평가도 따져보고 진안까지의 거리도 확인한 끝에 B산부인과로 정했다.

깜짝 놀란 것은 서울에서보다 시설이나 서비스는 훨씬 좋은데도 기간당(보통 2주) 가격이 서울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뻤다. 백만원이 내 손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리원엔 두 가지 등급이 있었다.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특실, 산모들만 숙박하는 일반실. 내가 진안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터라, 산모들이 서로 육아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함께 생활하는 일반실이 덜 부담스러웠다.

양수 터진 산모 데리고 서울에서 전주까지

양수가 터졌다. 그것도 예정일에 삼주나 앞서서. 생각도 않고 가까운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서울 부모님 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아래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다. 양이 많은 것을 확인하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이리저리 전화해보더니 일요일이라 근처 산부인과는 아기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양수 터져도 아기가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안심시키는 어머님 말이 야속하게 들렸는지, 아내는 계속 울면서 집을 나왔다.

나는 갈등했다. 진찰을 받았던 전주를 갈 것인가. 아니면 응급실을 가야 하나. 터미널 앞에서 표를 사려다가 불안한 나머지 근처에 성모병원으로 갔다. 응급실 갔다가 산부인과로 안내를 받아서 몇 가지 검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는 당직 인턴들만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를 하고 난리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전주 한 번 다녀오자"고 이야기 했다. 상황을 듣고는 친구가 놀라서 허겁지겁 차를 끌고 병원으로 왔다. 병원 측에선 "병동에서 대기하다가 아기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를 데리고 친구차에 올랐다.

전주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병원이 보이자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양수는 조금씩 새는 모양이었지만 무사히 입원할 수 있었다. 당직 의사가 아내를 검사하고 나서 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담당의사가 와서 촉진제를 주었다. 의사는 양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태라 잘못하면 위험하다고 했다. 꼬박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러나 진통도 안 오고 양수는 줄고.

결국 최후의 선택은 제왕절개 수술이었다. 하도 오래 기다려서 집에 가서 준비물을 챙기러 갔는데, 그 사이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어머님이 내려와서 아내 옆에 계셨지만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내가 없던 것이 아내에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허겁지겁 들어와서 겨우 막 나와 씻겨진 아기를 안아보는데 무언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때렸다.

분유 주지 마세요, 빛·난방 줄여주세요

사진찍는다는 이야기에 어색한 미소로 포즈.
▲ 젖 먹이는 아내 사진찍는다는 이야기에 어색한 미소로 포즈.
ⓒ 임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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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나 자신을 영영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무리해서 전주로 왔을까. 돈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성모병원에서 잠깐 검사 두 가지를 하는데 20만원 가까운 돈이 나갔다. 임신 중 검사비용도 지방보다 서울이 비싸다. 초음파 비용도 차이가 났다. 땅 값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출산과 산후조리가 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산모나 아이에게 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낳으되면 이중으로 지출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산부인과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다.

바깥으로 나오자 마자 신생아들은 분리 수용(?)된다. 24시간 밝은 불빛 아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둡게 해주어야 시각 능력이 형성된다는데 요즈음의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막 나오는 순간부터 몇 주간 밝은 빛을 피할 수 없다. 좀 어둡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병원측은 운영시스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막 태어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것도 문제다. 병원 측에서야 여러 아이를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매번 엄마를 호출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또 분유회사와 모종의 계약이 있다는 것은 뻔히 보이는 일이다. (병원 곳곳에 광고지가 붙어있고 퇴원시엔 분유 남은 것과 젖병을을 선물한다.)

이러한 관행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분유도 잘 먹고 모유도 잘 먹어서 엄마가 초유를 먹이고 나서 여태까지 모유 수유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신생아에게 분유의 맛을 보게 하면 모유 수유가 어려워진다.

또한 조리원이 너무 더웠다. 옛날 집들은 외풍이 심해서 불을 계속 지폈지만, 요즘 건물이 어디 그런가. 통풍도 잘 되지 않는 방에서 찜질을 해대니 답답하고 불쾌하기만 한다.

바람이 안 통하게 몸을 감싸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30℃ 가까이 되는 방에서 어찌 안 벗을 수 있는가. 환자복만 걸치고 양말이고 속옷이고 벗고 다니는 것이 이 산후조리원에 묵는 산모들의 실정이었다. 실내온도를 낮추고 방안에 없을 때 환기를 한 번씩 시켜서 쾌적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둘째 계획하는 우리, 다시 답사 가야지

2주가 지나고 우리 부부는 집에 돌아왔다. 그새 텃밭은 풀밭이 되어 있고, 3평의 집안도 정리가 안 돼 어수선했다.

할 일이 많았다. 아이는 꼬박꼬박 입을 벌렸고, 아내는 몸이 쑤신다고 하고, 나는 동네에도 못 나가고 집안에서 일을 한다고 하며 북적거렸다. 그래도 아이는 무럭무럭 크고 건강하게 자라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둘째를 생각하는 요즈음, 우리는 또한번 체크리스트를 들고 현지답사를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낳고 기르기'를 하고 싶어서.


태그:#산후조리, #주말부부, #산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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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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