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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양성평등지수 97위 – 세계경제포럼(WEF), 2007
남녀권한척도 53위 – 유엔 인간개발보고서(UNDP), 2006
아시아태평양 국가 13개국 가운데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13위 – 마스터카드 인터내셔널, 2005


한국 여성의 지위를 말해주는 각종 지수들이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수치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 현상을 제대로 짚어낸 수치라고 판단된다. 이 수치를 보면서 부끄럽게도 난 다시 태어나더라도 여자는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한 여론조사 기관(R&R, 2000)이 성인 600명을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으냐, 여자로 태어나고 싶으냐'하고 물은 적이 있다.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한 남자 응답자는 82%인 반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답한 여자 응답자는 44%에 불과 했다.

자기 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다시 남자를 택한다는 이 조사 결과는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남자들도 다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군가산점 문제로 여자들도 군대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들이나, 초등학교 여교사의 비율을 들어 요즘 남녀 지위의 역전을 이야기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로 태어나 살고싶은 사회, 아직 갈 길이 먼데

2001년 만들어진 여성부는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를 선택하는 여자의 비율과 남자를 선택하는 남자의 비율을 비슷하게 만들자는 게 주 목적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로 여성부 설치 이후 '양성평등'이라는 생소했던 말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고, 가정 폭력 및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다양한 대비책이 마련되는 등 여성의 지위가 일정 부분 개선되었다.

지금 여성부의 폐지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이들은 다시 태어나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 남자들이다. 자기의 우월적 지위를 더 이상 내 놓지 않아도 된다는 데 대한 만족을 표하는 것이다. 성매매하는 남자들을 늑대로 묘사한 여성부를 그 동안 눈엣가시로 여겼던 남자들이 함께 만세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1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1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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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가 구현하고자 하는 양성평등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요구하는 기계적인 평등이 아니다. 남녀의 신체적·사회적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조건을 따로 마련해 주는 것이 곧 양성평등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남녀 화장실 크기를 똑같이 만들면, 신체 구조상 여자 화장실만 늘 붐비게 되는 게 기계적인 평등이 낳는 부조리의 한 예다. 여성부가 생긴 이후로 그런 기계적인 평등이 조금씩 줄고 양성평등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성부 폐지를 계기로 양성평등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 남녀의 차이를 무시한 기계적인 평등이 또 다시 자리잡아 양성평등지수를 끄집어 내릴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인수위는 여성부의 폐지로 인해 여성 정책이 위축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명박 당선인은 이미 지난 해 11월 여성단체와의 토론회에서 여성부를 존속시키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면서도 이번에 약속을 어겼다. 부처 폐지 문제 같은 눈에 보이는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그 성과를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정책 추진 약속을 믿으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딸들이 여자다

사실 이번 여성부 폐지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이미 예견된 일이다. 한나라당은 끝없이 이어지는 성추문으로 유명한 당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부터 '마사지걸' 발언과 개인 소유의 빌딩에 퇴폐유흥업소를 들인 전력이 있다. 당과 당선인 모두 양성평등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이 여성부를 더더욱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된다. 대통령과 여당이 여성문제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여성부가 해야 할 일이 더 막중해 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일구어 온 양성평등의 기반이 마초정부의 탄생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여성단체는 이번 여성부의 폐지를 이명박 정부의 여성문제 바로미터로 간주하고 총선과 연계해 압박을 해야 한다. 여성부는 대한민국 여자들의 마지막 보루다.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 어머니가 여자고, 내 아내가 여자고, 내 딸들이 여자다. 여성문제는 곧 내 어머니와 내 아내와 내 딸들과 관련된 바로 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자들이 다시 태어나도 다시 여자로 태어나길 바라야 그게 제대로 된 양성평등의 세상이다.


태그:#여성가족부, #조직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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