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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자 핸드볼 팀이 이겼다. 올림픽에 진출한다. 언론사들이 기사를 쏟아냈다. "아저씨의 힘을 느꼈다." '아저씨의 힘' 또 빛났다." "대한민국 '아저씨'의 힘은 역시 강했다." 이런 기사가 우르르 쏟아지는 걸 본 적 있나?

 

이런 건 어떤가? "안정환, 아저씨의 힘 발휘" "이승엽 일본에서 홈런 신기록, 아저씨의 힘은 강했다." 신문과 방송이 앞 다퉈 이리 떠드는 걸 본 적 있나? '야구 아저씨'니 '축구 남편'이란 말은? '남편 투혼'이니 '아저씨 부대'라는 말은? 베컴의 놀라운 발차기에서 아저씨의 힘이 빛났다는 분석은?

 

여자 핸드볼 팀이 일본팀을 이겼다.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기 위한 막판 설전이었다. 이기자마자 많은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줌마의 힘을 느꼈다" "'아줌마의 힘' 또 빛났다"  그뿐인가? 유수의 언론은 아예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은 역시 강했다."

 

일간지와 방송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국가대표팀 여자 핸드볼선수더러 ''아줌마 핸드볼 선수들', '핸드볼 아줌마'라 불렀다. '주부 투혼'이란 말도 빠지지 않았다. 15명 선수 가운데 4명이 아줌마라고 했다. 감독마저 경기 전 '아줌마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김밥 말던 김밥집 아줌마가 김밥을 집어 던지던 실력을 인정받아 김밥집에서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로 전격 스카우트 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모두 '아줌마'가 됐다. 저 멀리 야쿠르트를 던져주던 신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아줌마'가 됐다. 결혼 전에 그들은 그냥 '핸드볼 선수'였다. 10년 넘게 핸드볼 선수였다. 결혼하자 '선수' 타이틀은 날아갔다. 오래한 선수 생활도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아줌마'가 됐다. 핸드볼을 하는 '아줌마'가 됐다.

 

'아줌마'가 어때서?

 

아줌마가 어때서? 미안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아줌마'라고 부르면 기분 좋을까? 누가 당신더러 "아줌마, 힘 좋은데?"라고 말하면 기분이 흐뭇하나? '아줌마'에 대해 말해보자. 아르바이트 전문 구인구직 포탈 '알바몬'이 아르바이트생 1277명에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듣기 싫은 말 2위가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였다. 1위가 "너 말고 사장 나오라고 해"였다. 반말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아줌마'라 부르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아줌마'는 이 사회가 선망하는 '호칭'이 아니다. 나이 든 여자를 '낮게' 부르는 표현이다. 언론은 더하다. 아무나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론이 대통령 부인더러 '아줌마'라고 부르는 걸 본 적 있나? 없다. 그나마 평등하게 부른 게 '000씨'다. 아니면 '여사'다. 그뿐인가?

 

 '청소부 아줌마'는 있어도 '변호사 아줌마'는 없다. 김밥집 아줌마는 있어도 판사 아줌마나 총리 아줌마는 없다. 의원 활동을 잘 했다고 여성 국회의원더러 언론에서 대놓고 "의원 아줌마의 힘이 빛났다"고 쓴 걸 본 적 있나? 아마 썼다간 명예 훼손으로 걸릴지 모른다.

 

물론 사석이나 댓글에선 쓴다. 그 여자를 비아냥거릴 때 쓴다. '날고 뛰어봤자 아줌마'라고 이죽거리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아줌마'가 멋진 여자의 대명사인가? 아니다. 전철에서 빈자리를 위해 저 멀리서 모든 사람의 발을 밟으며 다다다다 달려드는 아줌마, 눈치 없고 무식하고 무대뽀 이미지다.

 

거리에서 "아줌마 운전 하는 것 봐라" 라고 하는 말이 칭찬하는 감탄사인가? '아줌마'란 말엔 존칭보다 '비하'가 스며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감독이 결혼한 여자 선수들을 "아줌마"라고 부를 때, 존경이 묻어나나?

 

뭐 아저씨라고 그다지 다르진 않다. 인터넷에서 '검색' 해봐도 안다. '뉴스'에서 쓰는 아저씨는 '수위 아저씨'나 '택시 기사 아저씨' 뿐이다. 물론 청소부 아저씨도 있다. 일명 '단순 노무직' 직종 남성을 부를 때 쓴다. 그래서 국회의원 아저씨나 의사 아저씨는 없다. 핸드볼 아저씨도 없다. 쓰더라도 "평소엔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지만 코트에 들어서면 호랑이로 변한다"(2006년 1월 24일자 한겨레)고 쓴다. 코트에선 그는 '아저씨'가 아니다. 그냥 '선수'다. '감독'이다.

 

'아저씨의 힘'은 왜 없을까?

 

우리나라 남자 핸드볼 팀이 일본을 이겼다. 하지만 어느 언론도 "'아저씨의 힘'이 빛났다"고 쓰지 않았다. 골키퍼는 여자 핸드볼팀 골키퍼와 부부 선수였다. 그런데 여자 선수는 '아줌마'가 됐지만, 그는 '아저씨'가 되지 않았다. 결혼한 스포츠 스타가 외국에서 날린다고 '아저씨의 힘'이라고 쓰지 않는다. 안정환은 결혼해도 안정환이다. 남자 국가대표팀에 나이 든 선수가 많다고 '아저씨의 힘'이라고 쓰지 않는다.

 

서른 넘은 여자 선수가 활약하면 '아줌마 투혼'이지만, 나이 든 남자 선수들이 활약하면 '노장 투혼'이다. '아저씨의 힘'이라 부를 땐 하나뿐이다. 직종을 불문하고 성인 남자인 그에게 '절단되지 않은 신체'의 힘을 가리킬 때 뿐이다. 이른바 '정력'이랄까.

 

여자 핸드볼 선수뿐일까? 지난해 말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김진규씨 역시 '아줌마'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론은 "습작 한 번 해보지 않은 아줌마가 공모에 당선됐다"고 보도했다. 한 일간지는 "선배 주부작가들의 경험담을 들어 본다"는 기획 기사까지 마련했다. 재미있는 일이다. 소설가 박민규가 2003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했을 때, 그도 유부남이었다. 하지만 어느 언론사도 그더러 "아저씨가 당선됐다"고 보도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공모에 당선됐다거나 수상했다는 말은 없다. 같은 전업 작가라도  '주부 작가'는 있어도, 남편 작가나 아저씨 작가는 없다. '핸드볼 아줌마'나 '아줌마 작가'는 있어도 '핸드볼 아저씨'나 '야구 아저씨'는 없다. 소설가 김훈이나 이문열더러 언론이 '할아버지 작가'나 '아저씨 작가'라고 부르는 걸 본 적 있나? '대가'와 '아저씨'는 적이다. 대가에겐 '아저씨'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핸드볼 대가인 여자 선수는 '아줌마'가 될까?

 

결혼한 여자 선수가 경기를 잘하면 왜 '아줌마의 힘'이 될까? 여자가 결혼하면 불끈 힘이 생겨서? 남편이 힘을 준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줌마의 힘'이라고 떠들어대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봐라. 그들을 '아줌마'로 만든 '결혼'이 어디 그들에게 힘이 되나? 한 여자는 이혼했고, 한 여자는 사업하느라 빚 옴팡 진 남편 때문에 죽을 맛이다. 그들에게 남편과 결혼은 '힘'이 아니라 '웬수'다.

 

사실 그들에게 '힘'을 준 건, 그들을 아줌마로 이끈 '결혼'이 아니었다. 그들을 그 자신으로 만드는 '핸드볼'이었다. 핸드볼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리고 동료 선수였다. 믿고 끌어주는 동료 선수였다.

 

하지만 언론은 그더러 '아줌마의 힘'이라고 부른다. 왜냐? 그렇게 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 눈엔 '선수'보다 '아줌마'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에게 가서 꽃이 된 게 아니라, 그들이 '아줌마'라고 부르자 그들은 그냥 '아줌마'가 됐다. 핸드볼을 할 줄 아는 '아줌마'가 됐다.  '아가씨의 힘'은 없어도 '아줌마의 힘'은 있다. 노총각, 노처녀의 힘은?

 

솔직히 말하자. '아줌마의 힘'이라는 말엔 "아줌마가 대단한데?"하는 뉘앙스가 숨어있다. 정작 강한 건 '아줌마의 힘'이 아니다. '아줌마'라고 불러야 성이 차는 '성차별의 힘'이다. 이미 천박해진 '아줌마'란 단어를 추켜올리는 척하며 실은 '비하'하는 힘이다. 이중 잣대의 힘이다.

 

'비하'하는 게 아니라, '아줌마의 힘'에 대한 칭송이라고?  그렇다면 왜 '인수위' 위원장이야말로 '아줌마 위원장'이라고 부르고, '아줌마의 힘이 놀랍다'고 말하지 않나? 요즘 진짜 센 힘을 보여주는 건 그 분인데?


태그:#핸드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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