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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편안히 주무셨어요?"

"키미테 못 챙기신 분 계세요?"

 

어둑새벽 일어나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배에 오르니 울산모임 선생님들이 이것저것 챙겨준다. 2~3미터 정도의 파도가 칠 거라는 일기예보 얘기도 했다. 작은 어선도 아니고 해경에서 제공해준 큰 배를 타고 가는데 설마 배멀미를 하겠냐 싶어 키미테를 붙이지 않고 버스에 탄 몇몇 선생님들도 파도가 칠 거라는 얘기를 듣고 키미테를 하나씩 받았다.

 

신명 수련원 앞바다에 눈부신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버스는 출발했다. 새해 첫날은 아니지만 떠오르는 해를 향해 소원도 빌었다. 오늘 탐사에서 꼭 고래를 보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내맡기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일출을 카메라에 담는 선생님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오늘 일정은 장생포에 있는 고래연구소에 가서 강연을 듣고 배를 타고 고래 탐사를 떠나는 것. 고래 탐사가 끝난 뒤 장생포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고래박물관을 관람한 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바위그림 답사로 마무리가 된다.

 

고래가 득실대던 바다의 추억

 

장생포 고래연구소에 도착하니 김장근 소장님께서 환하게 맞아 주셨다. 소장님은 우리를 2층에 마련된 강의실로 안내하고 고래를 주제로 특강을 해주셨다. 소장님의 특강을 통해 우리의 삶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고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고래를 본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이 속담이 만들어질 무렵에는 고래 정도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을 터. 어쩌다 한 마리 정도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동시에 등장해서 뒤엉켜 헤엄쳤을 거라 생각된다.

 

속담 속의 고래가 싸움을 하던 바다는 어디였을까. 울산 앞바다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동해라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경해(鯨海 :고래바다)라 불렀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고래가 있었는지는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도 확인이 된다.

 

17~19세기 북대서양과 바다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대형 고래를 남획한 서구 열강들은 19세기 중반 고래바다로 들어왔다. 그들의 포경일지에는 '사면팔방에 고래', '고래가 무수히 보였다', '백두의 귀신고래 떼', '사방팔방에 참고래 떼가 득실', '배가 빨리 갈 때는 고래 등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고래가 배를 향해 오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장근 소장님 특강 자료 중에서)

 

장생포가 고향인 노영수 시인의 기억 속에도 장생포 앞 바다는 고래가 득실대던 곳이었다.

 

장생포 곤여는 오행이 골고루

곤궁하지 않고 정재가 있는 곳

앞산은 치마산 고향 마을 보살피고

새끼고래 수백 마리 펄떡 뛰고 춤추면

다칠까 돌고래 휩싸서 들이고

파도는 해안 따라 삥 둘러 에워싸고

나팔소리 오색 끈을 허리에 매고

작은 배 큰 배 고기 잡아 돌아오면

당산 할머님 좋아하는 곡차도 올리고

밤새도록 포경선 지켜주는

골메기 신장님

 

- 노영수, 장생포 타령

 

고래바다로 떠난 고래탐사

 

고래연구소 소장님의 강연이 끝나고 장생포항에 대기하고 있던 배를 탔다. 울산모임 선생님들이 해양경찰의 도움을 청해 타게 된 배였다. 배 위에서는 해경 아저씨들이 분주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가 출발했다. 현대중공업의 육중한 골리앗 크레인이 배를 따라 움직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다와 만나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옷깃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꽤 쌀쌀한데도 사람들은 뱃전에 서서 파란 하늘과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육지가 점점 멀어지자 파도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뱃전에 서서 행여 고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다를 지켜보던 선생님들도 선실로 들어왔다. 큰 물결이 배를 향해 달려들면 어김없이 배도 따라 흔들렸다. 

 

 

파도를 헤치며 달리고 또 달려도 고래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팔방에 고래가 득실대던 고래바다에 고래는 없다. 배를 따라 달리는 고래도 없었고, 배를 향해 다가오는 고래도 없었다. 고래 대신 물결만 밀려들고, 밀려드는 물결 따라 배가 요동치고 있었다.

 

"오늘 고래 보기는 틀린 거 같아요."

"고래 탐사 나와서 고래 보는 경우가 좀 있나요."

"거의 없어요."

 

고래바다에서 고래를 보기가 힘들다며 소장님은 쓸쓸히 웃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배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장생포로 돌아오는 바다 위에도 고래는 없었다. 그 많던 고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쉬움을 뒤로하며 장생포로 돌아왔다.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덧붙이는 글 | 1월 14일부터 1월 17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주관하고 울산역사교사모임이 준비한 자주연수가 있었다. 이번 자주연수의 주제는 '고래와 노동의 도시, 울산'이었다. 이 기사는 둘째 날 고래연구소와 울산 앞바다 고래탐사에 대해 쓴 기사다.  


태그:#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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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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