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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자유로운 시간은 설 연휴 마지막 날에야 생겼다. 모처럼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 내일부턴 다시 일상에 복귀해야 하는데, 차례를 지내느라고 분주했던 시간에 보상이 될 만한 일이 무엇일까?

 

실상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고, 설 연휴 동안 몸을 좀 움직였다고 피곤하기도 하여 '그럼 가까운데 가보자'고 의견을 보았다. 방학이 끝나 가는 아이들에게도 동구릉은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될 것이었다. 막상 '동구릉'에나 가자고 했지만, 동구릉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말 그대로 동쪽에 위치한 아홉 개의 능인 동구릉. 한가운데를 위치한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제외하고 나머지 능은 누구의 능이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능 자리를 알아보라 했다고도 하고 친히 망우리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니 지금의 동구릉 자리가 과연 길지라 하여 그곳을 택정(宅定) 하였다고도 한다.

 

매표를 하고 정갈하게 이어진 흙길을 걸어 들어가니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관리소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설 연휴동안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놀이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널뛰기·윷놀이·투호·팽이·제기차기 등, 전통 놀이 도구들이 멍석 위에 놓여 있어 누구나 놀다 갈 수 있도록 했다.

 

널도 뛰어보고 윷놀이에 제기차기 그리고 팽이치기에 재미가 들린 아이들이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전통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이들을 보자니, 새삼 세월 따라 변하지 않은 게 없지만 놀이에서 만큼의 획기적 변화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게임과 전통놀이 간의 간격이 한없이 길어 보인다. 사실 '전통놀이'라는 말 자체가 이물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전통음악'이 '우리 음악'이듯이 전통놀이가 물 흐르듯 이어져 그저 '우리 놀이'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선왕조의 역사 중에 아홉 명의 임금과 왕비를 모신 동구릉은 54만 평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에 놀란다. 능을 둘러싼 주변은 숲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삼림욕장으로도 손꼽힌다고 한다.

 

겨울에 찾은 동구릉이 다소 쓸쓸하다. 소나무를 제외하고 나머지 나무들이 잎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우리 산하를 휩쓸었던 소나무재선충이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 흰 팻말을 달고선 소나무들이 재선충 치료중임을 알린다.

 

동구릉 입구를 기준으로 맨 처음 만나는 능부터 순서대로 수릉·현릉·목릉·건원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이 위치한다.(반시계방향으로) 동절기는 산불예방차원에서 목릉과 숭릉, 경릉은 출입이 불가하기 때문에 지금 동구릉에 가면 수릉·현릉·건원릉·휘릉·원릉·혜릉만 둘러보기가 가능하다.

 

임금과 왕비 그리고 계비를 모신 세 개의 무덤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어 특이한 능 구조를 가졌다는 경릉을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경릉은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가 나란히 묻힌 삼연릉의 구조라고 한다. 경릉에서 내려다본 동구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산불방지 기간이 끝난 봄이나 여름에 다시 한번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릉이 시작되는 곳이자 성역의 표시인 홍살문은 어디나 비슷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그곳에서 부터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까지 참도가 이어져 있다.

 

참도가 시작되는 오른쪽 네모난 돌은 판위라고 부른다. 여기서 인사를 여쭙고 '신도'(혼령이 지나는 길)와 '어도'(임금이 지나는 길)로 분리된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른다. 제를 모시고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태운 축문를 묻는 소대 혹은, 예감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기본 제의가 끝난다.

 

능의 기본 구조와 형식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데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 아홉개의 능을 확실히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동구릉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경우, 망료위가 있어 다른 능과 또렷한 차이를 보인다. 망료위는 축문을 불태우는 장소였다고 하는데 태조 이후의 능에는 망료위가 보이지 않은 걸로 보아서 아마도 고려시대의 영향이 남은 건 아닌가 추측한다.

 

동절기라 문화해설사도 없고 그냥 한번 둘러보자고 온 동구릉은 각각의 능은 분간하기 어려워 마침 관리인 아저씨가 청소를 하고 있길래 몇 가지 여쭤 보았다.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그제서야 능마다의 구별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문화해설사가 없는 것도 아쉽지만 산불방지 기간이라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정자각까지만 한정되어 있는 것 또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진짜 능은 언덕처럼 솟은 가짜 능에 묻여 그 윤곽을 그려보는 일마저 어렵다. 고향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태조의 무덤은 고향에서 가져온 억새로 덮혀 있다니 그 또한 궁금하다.

 

문종임금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은 동구릉에서 유일하게 두 능이 골짜기를 마주하고 있는 동원이강(同原異岡)형식이다. 때문에 제사를 모시기 위해 걸어가는 참도 역시 ㄹ자 형식으로 굽어져 있어 다른 능 구별된다.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신 휘릉과 제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은 왕비가 혼자 외롭게 묻힌 단릉이다. 수림보호지구로 설정되어 있어 관람이 불가능한 숭릉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둘러본 혜릉의 무덤 주변엔 녹지 않은 눈마저 하얗게 쌓여 있어 쓸쓸함을 더하는 듯했다.

 

아쉽게도 다른 능에선 발견하지 못했는데 혜릉의 정자각이 특이해서 눈길을 끌었다. 정자각 용두에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가 새겨진 조작이 얹어 있다.

 

숭유 억불정책을 편 조선시대의 종교관을 생각하면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불교를 억압했던 정책과는 상관없이 단의왕후의 무덤에 새겨진 삼장법사와 손오공친구들은 외롭게 묻혀 있는 왕후의 무덤을 호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추운 날씨 속에 간간이 방문객들이 능과 능 사이에 놓인 오솔길을 걸어간다. 처음엔 다소 쓸쓸한 인상을 주었지만 동구릉은 겨울의 한적함과 잘 어울려 보인다.

 

출입이 금지된 세 개의 능을 제외하고 나머지 능을 둘러보는 시간이 꽤 길었다. 왕조의 무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일은 한 권의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결코 쉽게 읽히지 않은 역사책. 쉽게 책장을 넘기기 위해 몇 번은 더 이 길을 걸어 보아야 하리라.

 

산불방지 기간이라 관람이 가능한 구간은 제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에 한정되어 정작 진짜 능은 둘러보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은 다음을 위해 남겨둔다. '동구릉에나 다녀올까', 하다 덜렁 숙제 하나 받는 느낌이다.

덧붙이는 글 | 동구릉을 다녀오고 얼마 안 있어 숭례문이 불타는 뉴스를 지켜보는 심정이 매우 착잡하다. 오래되고 가치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태그:#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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