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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철학서는 책 자체가 지닌 난해함에 영어 일어판 중역이 지닌 한계가 만들어낸 번역어의 난삽함까지 곁들여져, '철학'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고개를 외로 꼬는 이들이 많다. 나도 철학서는 그저 글자만 읽을 뿐 철학이 지닌 사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는 것에 자기 위안을 삼곤 했었다.

 

한 번쯤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존재(存在)와 무(無)>라는 존재론 번역서를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아마도 철학적 사투리와 번역의 한계, 내 자신이 철학적 사유에 익숙하지 못함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리라.

 

철학과 교수에서 농부로 변신을 거듭하며 진실로 행복한 삶의 방식을 찾아온 윤구병 교수는 쉬운 우리말과 삶으로 그가 지닌 철학을 풀어내는 분이며 우리말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다.

 

일상의 언어로 철학을 수다처럼 풀어내던 윤구병 선생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 역시 다른 철학 번역서를 읽을 때 느끼는 절망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윤구병 선생이 대학 철학교수 직을 그만두고 변산공동체를 꾸리려는 즈음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한 것을 철학 전문지 <시대와 철학>에 연재했던 것이라고 한다.

 

내용상 그 강의를 듣는 석·박사들 역시 끊임없이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을 테지만 명쾌한 언어로 존재 그 자체를 풀어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윤구병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강의는 그야말로 철학적 사투리여서 철학자들끼리만 알아듣는 수준의 글이다.

 

세계와 존재에 대해 있음과 없음이라는 우리말을 통해 과거·현재·미래 시제와 엮어 변증법적으로 하나하나 풀어냈지만 치밀하고 논리적인 변증법적 사고에 길들여지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외국어를 더듬거리며 독해한 수준에서의 이해가 고작이었다.

 

선생님께 난해함에 대해 여쭈었을 때 선생님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웃으시며 "그거 보리출판사의 최고로 악서로 꼽히는 책이야. 그런 책 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잠 안 올 때 초강력 수면제거든. 수면제 대신 사용해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의외로 그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지인도 있고, 윤 선생은 존재론의 정수를 단 한마디로 정의해 준 할머니가 계시는데 "바로 그거야!" 라고 무릎이 ‘탁’ 쳐지더라며 들려준 말은 바로 이것이다.

 

할머니는 정의로운 사회니 선(善)이니 라는 어려운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아따,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것이 좋은 것이제”라고 하더란다. 단순하지만 윤구병 선생 존재론의 핵심을 짚어준 말이다.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철학적 사투리를 가지고는 저렇게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정의는 결코 내려줄 수 없다.

 

윤구병 선생은 앎이 함(실천)이 되는 것을 통해 세상이 좋은 쪽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존재론을 강의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에서는 그 있음이나 앎이 어떻게 발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함, 즉 머리에 정의된 이론이 가슴과 발까지 내려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인 <실천론>이 머잖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출간될 계획이라고 한다. 그 책은 <있음과 없음>과는 다르게 잘 읽히고 재미있다고 하니 머릿속이 뒤엉키는 일은 없을 듯하다.

 

어쨌거나 철학은 일상적 사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철학이 일반 대중에게 가까워지려면 철학적 사투리가 아닌 일반 대중의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구체적 언어로부터 추상성과 사유가 풀어져야 할 것이다.

 

윤구병 선생이 무릎을 치게 했다던 그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존재론이란 거 별것 아니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존재론 아녀. 있어야 될 것이 뭔지, 없어야 할 것이 뭔지 알아서, 있어야 될 것을 있게 만들고 없어야 될 것을 없게 만들자고 하면 되지 뭘 그리 어렵게 말하는감?”

 

그렇다. 바로 저 것이 그 난해한 윤구병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의 알맹이다. 결국, 철학은 철학자들만 알아듣는  머릿속 ‘앎’의 축적이 아니라  삶속의 ‘함’으로 육화되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 / 윤구병 / 보리 / 1만3000원


있음과 없음 -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윤구병 지음, 보리(2003)


태그:#있음과 없음, #윤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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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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