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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원에서는 다섯 명의 꼬마 아이들이 출전했다.
▲ 피아노 경연대회 포스터 우리 학원에서는 다섯 명의 꼬마 아이들이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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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토요일은 어머니와 누나가 가르치는 꼬마 제자 5명의 피아노 경연대회가 있는 날이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그 경연대회에 나도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 것이다.

"아들! 엄마 제자들에게 추억이 되는 대회인데 따라와서 사진 찍어줄 거지?"

어쩌랴,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피아노와 악연(?)이 있는 나로서는 경연장에 따라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피아노 경연이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 피아노와 관련된 일은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어릴 적, 난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 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어쩌면 어머니는 날 모차르트(?)로 키우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아주 엄격한 피아노 교육을 시키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능이 모자랐다. 그것도 지지리도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칭찬은 고사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나기 일쑤였다. 모차르트는커녕, 또래 아이들보다도 더 피아노를 못 쳤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를 하고 말았다. 피아노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고 만 것이다.

다행히 누나는 재능이 있어 피아노를 전공하게 되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피아노와 담을 쌓고 지낸다. 그러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몇 년만에 피아노와 관련된 행사에 따라가게 된 것이다. 이 기분은 뭐랄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대회에 참가하는 혜원이(12), 은지(12), 그리고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님인 누나
 대회에 참가하는 혜원이(12), 은지(12), 그리고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님인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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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경연대회를 앞둔 지원이(10)
 피아노 경연대회를 앞둔 지원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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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불편한 기분은 대회를 앞둔 5명의 꼬마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왠지 모를 설렘으로 바뀌었다. 민규(7), 지혜(10), 지원(10), 은지(12), 혜원(12)이는 모두 밝고 귀여웠다. 대회를 앞둔 아이들의 표정은 봄꽃처럼 밝았다.

5명의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짓는 아이들에게서 긴장된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그 아이들이었다면 긴장돼서 오들오들 떨었을텐데 말이다.

피아노 대회가 열리는 한 대학의 아트홀은 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피아노 대회가 열리는 한 대학의 아트홀은 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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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섯 꼬마 중, 일곱 살 민규가 눈에 띄었다. 화려한 턱시도로 멋을 냈지만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고 쾌활하게 웃음을 짓는 모습이 천상 개구쟁이 남자아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볼 때, 난 민규가 그다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예술적인 요소가 많이 필요한데, 민규는 친구들과 뛰어놀기를 더 좋아할 것 같은 아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피아노를 지지리도 못 치던 나의 어린 시절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저 아이 피아노 잘 쳐?"

그런데 누나의 말은 예상외였다.

"응, 잠재력이 대단한 아이야. 피아노 칠 때 유심히 봐봐. 꼬마 예술가야."

개구쟁이 민규와 누나, 난 민규가 피아노를 잘 칠것이라고 차마 생각을 못했다. 어릴 적 내가 지지리도(?) 피아노를 못쳤으니까 말이다.
 개구쟁이 민규와 누나, 난 민규가 피아노를 잘 칠것이라고 차마 생각을 못했다. 어릴 적 내가 지지리도(?) 피아노를 못쳤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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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예술가'라는 누나의 말이 인상깊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민규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일곱 살 개구쟁이가 과연 내 마음에 감동을 전해줄 것인가 하고 말이다.

"자, 유치부 선수들은 모두 대기실로 와 주세요."

얼마 후 피아노 경연은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경연이 시작되었고 많은 꼬마 음악가들의 연주가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만들어내는 피아노 선율은 흥미로웠다. 잘했다 못했다가 확 드러날만큼 아이들의 실력 차는 커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적 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노력의 차이 정도로만 생각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민규의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선 민규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더니 피아노 앞에 턱하니 앉았다. 무대 뒤에서는 누나가 마음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앗, 그런데 피아노에 앉은 민규는 연주를 하지 않고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었다. 1초, 2초… 그러기를 30초, 하지만 민규는 여전히 건반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규의 행동에 심사위원들과 관객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누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고 만다.

'헉, 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거지? 설마? 악보를 까먹은 건가? 그렇다면 큰일인데….'

관객석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콩닥콩닥 걱정이 되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실력이 있다 해도, 긴장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머릿속에서는 예술 영화의 비극적 장면들이 떠올랐다. 재능은 있지만 긴장해서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비련의 주인공 말이다.

관객석과 심사위원들을 보고 웃으며 피아노를 치는 민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들이 크게 웃었다.
 관객석과 심사위원들을 보고 웃으며 피아노를 치는 민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들이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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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긴장한 줄 알았던 민규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향하던 시선을 돌려 관객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갑작스런 민규의 행동에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선 웃음이 터진다.

"앗, 저 아이 웃고 있잖아."
"하하하…."
"저렇게 치면 분명 다 틀릴 텐데."
"저 아이, 우리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네."

눈 앞에 신기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세상에, 일곱 살 민규가 피아노 건반이 아닌 관객들을 바라보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관객과 심사위원을 바라보며 민규의 클레멘티 소나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 맑은 선율이 연주장 내에 흐른다. 그런 민규를 보던 심사위원들도 연신 웃음 지으며 점수를 매긴다.

"아아, 잘했어."
"저 아이, 귀엽네. 하하."

관객들과 심사위원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민규의 부모님은 걱정스런 모습으로 연주를 지켜봤다. 저러다 실수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혹 틀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민규의 연주는 틀린 데 없이 끝이 났다. 연주의 끝에서 관객들은 웃으면서 박수를 쳐준다.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민규는 태연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를 친 이유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민규가 말한 그 이유란 게 참 가관(?)이다. 관객석을 보고 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민규는 너무 천진난만하게 말을 한다.

"건반을 보는데, 떨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관객석을 보고 피아노를 쳤어요."

악보를 보고 쳐야한다는 따뜻한 조언이 담겨있다 .
▲ 민규의 심사평가표 악보를 보고 쳐야한다는 따뜻한 조언이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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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아노 건반을 보고 치지 않았으니, 점수가 많이 깎였을 것이란 걱정이 든다. 그런데 잠시 후, 발표된 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최우수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건반을 보면서 연주해야 한다'는 따뜻한 조언과 함께 좋은 상을 준 것이다. 아마 다른 곳을 보면서 피아노를 친 신기함 때문에 더 좋은 점수를 준 것 같다.

'최우수상' 소식을 들은 민규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와 누나도 함께 밝게 웃었고 나 역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민규를 보면서 예술적 재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피아노 못 친다고 혼나기만 했던 나와는 너무 다른, 꼬마 베토벤(?)을 만난 느낌이다.

이어진 지혜와 지원이 그리고 은지와 혜원이도 아름다운 연주로 듣는이의 마음에 작은 감동을 전해준다. 다섯 꼬마 제자들은 각각 아름다운 연주로 '최우수상', 특히 혜원이는 '특상'을 타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의 종류가 재능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되지 못할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열심히 준비해서 음악 경연대회에 온 아이들 모두 꼬마 베토벤이요, 꼬마 모차르트일 것이라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내게 다시금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다섯 명의 꼬마 예술가들 덕분에 피아노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조금은 바뀐 것 같다. 만약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금 나도 '피아노를 열심히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랬으면 지금쯤 나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그 뒤늦은 아쉬움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태그:#꼬마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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