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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일 주일 쯤 있다오면 안될까?"

작년 여름방학,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 남매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시골가기를 자처했다.

뜻밖이었다. 몇 달에 한 번꼴로 시골에 데리고 가면 하루가 다 가기가 무섭게 언제 대전 가
느냐고 성화를 부리기 일쑤였다. 강아지와 토끼를 데리고 노는 것도 잠깐. 아이들은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만화채널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시골집에 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 주일 씩이나 자진해서 시골집에 가겠단다.

"왜? 덥고 심심하다고 싫다더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보고 싶고 토실이(시골집 멍멍이 이름)도 잘 있는 지 궁금해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대견'한 생각에 아이들을 시골집에 데려다 주고 올라왔다.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등에는 일 주일간 결석 예정임을 알렸다.

요상한 것은 일 주일간 아빠엄마에게 먼저 전화 한 통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 다
컸네'하는 생각에 이 마저 기특했다.

일 주일 후. 아이들을 데리려 시골을 내려갔다. 근데 시골집에 아이들이 없었다. 도랑에 물
놀이를 하러 갔나? 아버지 말씀은 뜻밖이었다.

"아랫 동네 니 누나집에 내려갔다. 아침 밥만 먹으면 쪼르르 쫓아 내려갔다가 저녁때 어둑
해져야 올라와... 그 놈들 참.."

시골집에서 2.5km 떨어진 '아랫동네'에는 누나가 살고 있다. 조카들은 모두 중학생이다. 조카녀석들은 머리가 컸다고 초등학생 동생들 하고 노는 걸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런데 웬 일로 일 주일씩이나 애들과 종일 놀아줬나 싶었다. 

역시나, 누나 얘기는 달랐다.

"말도 마라.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 박혀서 닌텐도랑 산다 살아. 오죽했으면 오지 말라고
했을까. 혼을 내도 또 걸어 내려온다니까..."
"닌텐도? '태권도' 학원 다니는데 '닌텐도'까지 배운다고 난리일까?"
"얘 좀 봐라. '닌텐도'가 무슨 일본무술 쯤 되는 줄 아나 보네. 게임기야 게임기!" 

알고보니 중학생 조카가 닌텐도 게임기를 구입한 걸 알고 처음부터 게임을 하기 위해 시골
행을 자처한 거였다. 폭염을 무릅쓰고 일 주일 내내 닌텐도의 길을 걷기 위해 왕복 5km
남짓 거리를 오간 셈이다. 

누나 또한 영어공부 위해 꼭 필요하다는 조카들의 호소(?)에 닌텐도를 사줬는데 "게임외에
학습용도로 쓰는 꼴을 못봤다"며 "너는 애들 한테 속지말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과 피곤한 줄다리기 협상을 벌여야 했다. 한번 닌텐도 맛을 본 아이들은 "공부해야 한다"며 닌텐도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평균 80점 이상 맞으면 사주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아이들의 대답은 "평균 60점 이상으로 하자"는 협상안이었다. 공부에 자신이 없었던 아이들이 점수대를 계속 낮춰 제시하는 바람에 공부를 전제로 한 양측의 협상은 금세 결렬됐다.

어느 날은 큰아이가 "인터넷이 좀 느린 것 같지 않느냐"며 인터넷 공급업체를 바꾸자고 제
의해 왔다. '괜챦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왜 바꾸려 하느냐'고 타이르듯 묻자 주머니 속
에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전단지를 내밀었다.

'전단지'에는 00일 까지 인터넷을 가입하면 선물로 디지털 카메라 등 15가지 중 원하는 한
가지를 선물로 주겠다고 내용이었고 그 중에 닌텐도DS도 포함돼 있었다.

이 마저 거부하자 매사 모든 일을 닌텐도와 연결시켰다.

"엄마 설거지 도와 줄테니 닌텐도 사줘!"
"닌텐도 사주면 강아지 사달라고 안 할께 아빠!"
"햄톨이(햄스터) 집 청소할게 닌텐도 사줘!"
"엄마, 닌텐도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대"

나중엔 생일선물로 대놓고 닌텐도를 요구했다. 지난해 말엔 초등학교 2학년 딸애가 내 방으로 건너오더니 퍼질러 앉아 구슬피 소리내어 흐느꼈다. 이유인즉 "크리스마스때 왜 선물을 주지 않았느냐"는 항변이다. '다른 아이들은 다받았는데 나만 못받았다'고 울먹인다. 아이들한테 선물을 받아 놓고 어찌하다 챙겨 주지못한 미안한 마음에 '갖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또 '닌텐도'다.

'닌텐도는 안된다'고 하자 맹랑한 일이 벌어졌다.

"방학인데 아빠 엄마는 우리만 집에 남겨 놓고 회사 가고. 맨날 우리가 밥 챙겨 먹고 학원다니는데. 심심해서 닌텐도 하면서 놀려고 하면 안된다고 하고... 주말에도 잘 놀아 주지도
않으면서... 내가 엄마아빠면 미안해서라도 사주겠다..."
  
거의 '짱구는 못말려' 수준이다. 정공법으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미안해 하는 부모
의 심정을 공격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매사가 굴복의 연속이니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올 연초엔 최후통첩을 해왔다. '저금통장에서 돈을 찾아다가 닌텐도를 살테니 상관하지 말라'는 거다. 자기들이 모은 돈이니 쓸 권리도 자기들한테 있다고 못을 박는다. 구실을 찾다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찾을 수 없게 돼 있다'고 눙을 쳤다.

구정이 됐다. 꼭두새벽부터 두 아이가 일어나 씻고 한복을 내달라고 설친다. 시골 동네 어
른들한테 세배를 하러 가야 한단다. 두 아이가 미리 세뱃돈을 모아 닌텐도를 사기로 사전공모하고 각각 최소 목표액까지 정해놓았음을 후에 알았다. 아이들은 10가구 남짓한 동네를 모두 돌고 일가친척의 도움으로 순전히 세배로만 닌텐도 구입자금을 확보했다.

애 엄마는 이런 속사정을 알고도 아이들이 모은 세뱃돈을 애들 통장에 모두 입금시켰다. 

하지만 애들이 난리를 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무룩했다. 닌텐도를 향한 희망(?)이 가로막힌 데 따른 깊은 좌절감이 묻어났다. 이 대목에서 나도 애엄마도 흔들렸다.

이번엔 먼저 협상안을 내밀었다.

'하루 한 번씩 꼭 일기 쓰기' '3일에 한 권씩 동화책 읽고 독후감 쓰기' 등  몇 가지 조건
을 제시했다. 이후 한 달간의 실적을 보고 잘 지켰을 경우 '닌텐도'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도 그 평가기간이다. 결국 반 년간의 실랑이 끝에 닌텐도의 집념에 손을 들어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게임시간을 놓고 아이들과 더 치열한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게 뻔하다.

최근 신문에는 저명한 교육심리학자가 "게임이 아이들의 주의 유지시간을 짧게 만들어 오히려 학습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휴~ 한숨만 나온다.


태그:#닌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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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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