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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밤 10시 50분 연대에서 북경행 기차 k286차(次)를 타니 다음날인 29일 오후 2시 30분에 북경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온 지 10개월 만에 마침내 중국의 수도 북경에 입성한 것이다. 북경의 첫 답사지는 유리창(琉璃廠). 지하철 노선을 확인하고 유리창 근처 즈음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에게 유리창을 가자고 하니 알겠다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을 달렸다. 퇴근시간도 아닌데 차가 많이 막혔다. 아직 멀었냐는 말을 열 번도 더 한 것 같다. 택시 기사의 발음에 ‘얼화’가 많아서 도무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택시가 멈추었지만 우리가 찾던 유리창이 아니라 엉뚱한 곳이었다.

 

엉뚱한 곳에 우리를 떨구고 간 북경 택시 기사를 욕할 여유가 없었다. 다시 택시를 타니 역시 30분을 넘게 달렸다. 애초 지하철을 잘못 내려 북경 시내를 두어 시간이 넘게 관광을 하게 된 셈이 되었다. 저녁 6시가 넘어서 유리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을 것이라 예상했던 유리창 거리에 불 켜진 가게는 한두 군데일 뿐, 대부분 문을 닫았다. 북경 최대의 골동품 시장인 유리창은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그 옛날 유리기와나 벽돌을 만들던 곳이었다. 기와나 벽돌이 유리처럼 번쩍거렸기 때문에 유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것이 시장이름이 된 것이다.

 

유리창은 서적·문방사우·도자기를 포함하여 온갖 괴이하고 기이한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곳이기에 북경의 명소 중의 하나이다. 유리창은 명·청 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다. 전국에서 출간된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이곳 유리창 고서점가로 쏟아져 성시를 이루었다고 하건만, 오늘 불 꺼진 유리창 거리에는 차갑고 매서운 북풍만 윙윙 불어댈 뿐 오고 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옛날 조선의 학자들이 수만 리 길을 걸어서 연경의 유리창 고서점가에서 방대한 중국의 서적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을 것을 생각하며, 중국의 학자들과 필담을 나누며 학적 교류를 하였을 조선의 선비들을 생각하며 유리창 거리를 돌아다니려 하였는데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한 권의 고서적도 볼 기회가 없어 동행하신 김 교수님도 많이 아쉬워하였다.

 

그래도 서화(書畵) 가게에 들러서 붉은 모란화 한 점을 살 수 있었다.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해 주고, 작가와 함께 사진 한 장도 찍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아 구매자와 작가가 사진 찍는 일이 빈번한 듯하였다. 짤막한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구사하는 종업원을 보며 북경이 국제도시임을 실감하였다.

 

어둠이 짙게 내린 유리창을 나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을 가득 메운 손님들로 보아 괜찮은 식당인 듯하였다. 북경에 왔으니 그 유명한 ‘베이징카오야’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주문한 오리고기와 연경 맥주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오리고기 한 접시가 더 나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종업원이 살코기가 약간 붙어 있는 오리를 통째로 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분명히 오리고기 한 접시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잘못 알고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온 것이다. 난감하였다. 그렇다고 종업원의 실수라고 장황하게 설명할 만큼 중국어 실력이 유창한 것도 아니고, 아들과 내가 오리고기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한 마리를 통째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오리고기를 싸들고 호텔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유학생이 있기에 집에 가서 먹으라고 그들에게 주었다. 생각지도 않은 보시를 하였다. 오리고기 한 접시를 시켰는데 한 마리가 나오다니! 기억에 남을 북경오리가 될 것 같다. 

 

12월 30일. 오늘 답사할 곳은 만리장성이다. 유리창에서 만난 조선족에게서 얻은 여행 정보대로 전문(前門)에서 관광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전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행단원들을 모으는 가이드가 배낭을 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우리 일행에게 접근했다. 만리장성의 한 구간인 팔달령(八達嶺)과 명 13릉을 관광하는 비용에 점심 식대와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약간 비싸긴 하였으나 팔달령까지 따로 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서둘러 관광버스에 타고 보니 이십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국말을 쓰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졸지에 오늘은 중국인들 틈에 섞여 관광하게 되었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팔달령 관문에 도착하였다. 오전 10시 10분. 가이드는 11시 30분까지 관문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고 깃발을 들고 출발하였다. 만리장성을 제대로 보려면 도보로 7∼8시간은 소요된다고 들었는데,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니 부담 없이 출발하였다. 장갑에 목도리를 칭칭 둘렀지만 정말이지 귀청이 떨어질 듯한 매서운 추위였다. 

 

 

중국의 노동절에 만리장성을 다녀온 사람이 ‘장성은 보이지 않고 앞 사람 뒤통수만 봤다’고 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만리장성이지만, 오늘 이곳을 찾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공위성에서도 보일 정도로 제 아무리 대단한 문화유산이라도 이런 강추위에 선뜻 관광을 나설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간을 부여잡고 가파른 계단을 겨우 오르고 올라 드디어 해발 888미터에 이르렀다. 이곳의 이름은 ‘호한파(好漢坡)’.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한 모택동의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날새도 넘기 힘들다는 험준한 산맥에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진 장엄한 대역사(大役事)를 보노라니, 사내대장부라면 일생에 한 번쯤 올라볼 만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남편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장성으로 보내놓고 얼마나 많은 맹강녀(孟姜女)가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것임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낭군을 곡하다 낭자 죽었으니 낭자 곡할 이 누구냐

원한이 장성의 옥새에 들어갔네

哭郞娘死哭娘誰 怨入長城玉塞遲

 

만리장성을 소재로 한 시에 등장하는 낭자가 바로 맹강녀이다. 진시황 때에 장성을 구축하기 위해 동원된 수백만 명의 백성 가운데 범칠랑(范七郞)이란 사내가 있었는데 맹강녀는 그의 아내다. 남편이 장성으로 부역 나간 지 몇 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두툼한 솜옷을 만들어 장성까지 찾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체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맹강녀가 장성 앞에서 통곡하자 성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시신이 드러났다고 한다. 또는 죽은 남편을 따라 바다에 몸을 던져 파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만리장성은 수백 만 명의 범칠랑과 맹강녀의 피와 땀으로 구축된 혈벽(血壁)이거나 원한의 축성(築城)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고름을 짰는지는 너무도 유명하다.  오죽하면 부역을 피하기 위해 복사꽃 핀 별천지의 세계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도 나오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인류의 거대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백성들의 희생의 결과물임을 새삼 말할 것이 없다. 또한 만 리까지 뻗어 있는 장성이 있을지라도 일개 백성들의 인화(人和)가 아니면 제국을 보존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역사는 실증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역사는 늘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팔달령을 내려오면서 살을 에는 혹독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직면해야 할 차가운 현실의 장벽과 또다시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는 자기방어식 삶을 생각했다.

 

만리장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이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얼마나 많은가. 진시황과 역대의 제왕들이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구축한 만리장성처럼 나도 생존하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장성을 쌓아야 하는가. 착잡하였다.

 

호한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들에게는 팔달령을 등반하였다는 기념품을 새겨주고 내려왔다. 팔달령 관광을 마친 관광버스는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식당으로 들어갔다. 낯선 중국인들. 행색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순박해 보인다. 또 나름대로 진지해 보인다. 아무 데서나 가래침을 퉤퉤 뱉는 중국인들이 아닌 것 같았다.

 

둥그런 테이블에서 저마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고 수줍은 듯 살짝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친 우리는 명 13능으로 향하였다.


태그:#북경,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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