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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89주년 3.1절을 맞아 평소 1500원을 받던 입장료를 받지 않고 무료 개방을 하며, 만세 재현과 옥사 체험 등 하루 종일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평상시에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여러 행사가 탐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쿠하와 저는 삼일절 하루 전인 2월 29일에 미리 다녀왔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차분하게 아이와 돌아보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뒤에 자리한 '이진아기념도서관'이 국경일이라 휴관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길이 있어도 쿠하는 벽돌길로만 걷습니다. 아무리 내려오라고 해도 저 길이 끝날 때까지 말을 듣지 않네요.
 큰 길이 있어도 쿠하는 벽돌길로만 걷습니다. 아무리 내려오라고 해도 저 길이 끝날 때까지 말을 듣지 않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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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리면 바로 독립문과 독립공원이 보입니다. 큰 길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가지 않고, 먼저 독립문을 보여주고 공원을 통과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갔습니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신축해 올해 100년이 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옥사와 1923년에 지어진 목조 사형장이 있어 보존해야 할 역사적 공간입니다. 1945년 서울형무소로 개명하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감옥으로 사용하다, 1988년에서야 비로소 역사관으로 개방되었습니다.

태형틀을 만지면서 이 십자가는 뭐하는 십자가냐고 묻습니다. 만지면 안된다고 써 있는데 말이죠.^^;;
 태형틀을 만지면서 이 십자가는 뭐하는 십자가냐고 묻습니다. 만지면 안된다고 써 있는데 말이죠.^^;;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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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추모의 장' 기획전시실에는 옥중에서 쓴 애국지사들의 편지를 크게 확대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편지들 가운데 두어편 읽어주니 아이는 지루해하며 태형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엄마 십자가가 누워있어."
"쿠하야, 이건 십자가가 아니라, 태형틀이야. 태형은 사람을 여기에 눕혀 놓고, 이 나무들로 때리는 벌이야. 아프겠지?"
"응. 아야하겠다."

오래된 나무 형틀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몸들이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죽어갔을지 상상하니 아이가 만지는 형틀에 '만지지 마시오'를 붙여둔 걸 오히려 떼내어 누구나 당시의 아픔을 생각하며 한번씩 만지고 지나가게 했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2층에는 강우규 의사가 남대문에서 폭탄을 던지는 모습이 매직비전으로 볼 수 있어서 아이에게 어떤 일인지 설명해주기가 좋았습니다. 흰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기모노를 입은 사람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걸 말해 주고, '민족저항실'에 있는 강우규 의사 의거에 대해 당시 신문에 실린 삽화와 기사를 보여주면서 아까 그 흰 한복 할아버지가 신문에 나왔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쿠하가 알아듣든 말든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초등학생들이 다시 가서 매직비전을 보고 옵니다.

어른들은 시큰둥하게 지나가는 재판 모형도 아이들 눈에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한복 입은 아저씨가 뭐하냐고 묻습니다.
 어른들은 시큰둥하게 지나가는 재판 모형도 아이들 눈에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한복 입은 아저씨가 뭐하냐고 묻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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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2층에는 옥중 생활의 일부인 벽감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두고, 사형장 모형을 만들어두었습니다. 데이트 코스로 역사관을 찾은 젊은이들이 벽관 앞에서 실갱이를 하다 결국 남자친구가 들어가기로 합니다. 쿠하는 다 큰 어른이 들어가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좁은 관이 신기한지 자꾸 열어봅니다.

지하에는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이 실물 크기로 재현돼 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고문을 받는 애국지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릅니다. 쿠하는 여성 애국지사 고문실을 지날 때 무섭다며 제 다리를 꽉 잡으며 빨리 나가자고 합니다. 우리 말을 대부분 알아듣는 쿠하는 일본 순사와 독립운동가의 대화를 다 알아듣고는 "아저씨가 화나서 언니를 때려서 무서워. 사이좋게 놀아야지!"하며 때리는 아저씨를 향해 저지하는 손짓을 합니다.

"지하 전시실에 다시 가볼까?" "무서워, 싫어 싫어!"
 "지하 전시실에 다시 가볼까?" "무서워, 싫어 싫어!"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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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미만의 어린이나 임산부, 심장이 약한 사람들은 가급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을 읽었지만, 두살 쿠하와 임산부인 저는 경고를 무시하고 고문 당하는 장면을 모두 보고 나왔습니다. 지하 전시실을 나오는 쿠하는 갑자기 쏟아지는 빛 때문인지 아까 본 장면들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립니다. 그러면서, "엄마 여기 싫어. 집에 가자."고 합니다.

개방된 12옥사는 독방부터 보게 됩니다. 앉으면 돌아설 틈도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혔던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또 저 자신을 향합니다. '내가 그 당시에 살았더라면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이 곳 독방에 갇힐 정도로 열심히 운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숨어서 겨우 군자금이나 조금 내면 다행일 정도로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을까?'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싸울 자신이 생기지 않아 더 숙연해집니다.

12옥사 감방을 하나씩 다 열어봅니다. 이 방에 누가 사는지 궁금다네요.
 12옥사 감방을 하나씩 다 열어봅니다. 이 방에 누가 사는지 궁금다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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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에게 독방에 한 번 들어가 보라고 했더니 싫다고 고개를 세게 흔듭니다. 그러면서도 각 방들에 누가 사는지 안 사는지 궁금하다며 12옥사가 끝나는 지점까지 모든 방문을 열어봅니다. 이어지는 관람 순서는 고문체험과 재판체험, 사형체험을 할 수 있는 '공작사'였습니다. 공작사에서는 관용 물품과 2차 대전 군수품을 만들던 곳입니다. 전기 고문과 손톱찌르기 고문을 직접 해 볼 수 있었지만, 임산부인 저는 그저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한이 서린 붉은 벽돌 감옥에 걸린 대형 태극기. 저 벽에 태극기를 달 수 있도록 헌신한 분들의 고초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한이 서린 붉은 벽돌 감옥에 걸린 대형 태극기. 저 벽에 태극기를 달 수 있도록 헌신한 분들의 고초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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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옆에는 방문자들이 순국선열들께 전하는 마음을 붙일 수 있는 태극기 액자가 있습니다. 쿠하는 글씨를 몰라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 붙였습니다.
 추모비 옆에는 방문자들이 순국선열들께 전하는 마음을 붙일 수 있는 태극기 액자가 있습니다. 쿠하는 글씨를 몰라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 붙였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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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은 오래된 목조건물이 주는 따뜻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시구문까지 둘러보고 나니 마음이 더 스산해집니다. 입구에서부터 줄기차게 떠들던 엄마가 쿠하에게 설명을 멈춘 곳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검은 복면을 씌우고 외줄에 목을 매달아 죽게 하는 사형 방법을 알려주기도 싫었고, 쿠하가 그런 걸 알게 될 쯤에는 전 세계 사형제도가 모두 폐지되어 말 그대로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남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시며 이 나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시며 이 나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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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에 '경(京)'자가 새겨진 붉은 길을 지나 역사관을 빠져나와 독립공원 쪽으로 걸으면, 역시 서울 '경'이 새겨진 벽돌계단이 나옵니다. 쿠하와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뒤로 하고 이진아기념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자판기 거스름통 확인하기!!! 현재까지 누적 1800원의 수입을 올린 쿠하.
 자판기 거스름통 확인하기!!! 현재까지 누적 1800원의 수입을 올린 쿠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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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지은 도서관

이진아기념도서관은 1980년에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이진아양을 기억하는 도서관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가 서대문구에 기증한 국내 최초의 기증 구립 도서관이기도 합니다.

먼저 간 딸아이의 이름을 도서관에 새긴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드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은 건축상을 받을 정도로 잘 지은 건축물이라 집구경을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만, 딸아이 쿠하의 손을 잡고 그 도서관을 찾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그런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딸아이의 이름으로 지은 '이진아기념도서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딸아이의 이름으로 지은 '이진아기념도서관'.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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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을 맡기면 회원이 아니어도 책을 빌려줍니다. 1층 어린이열람실에서 1회 10권씩 대출되는 아이 책을 빌려서 맞은편 모자열람실로 갑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려준 벽화가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고, 낮은 소파와 푹신한 바닥이 있어 엄마 무릎에 앉혀 놓고 책을 읽어주기에 편안한 곳입니다.

천창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도서관 전체를 밝혀줍니다.
 천창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도서관 전체를 밝혀줍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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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창에서 내려오는 오후의 햇빛이 도서관 전체를 밝게 하는데, 유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투명하고 밝은 건물입니다. 엘리베이터도 전망을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만들었고, 창문이 많아서 독립공원의 조경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무엇보다도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무바닥이라 딱딱한 느낌을 갖지 않게 합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은 1층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모유수유실이 있어 젖을 먹이는 엄마들에게도 부담없이 찾아오게 하는 흔치 않은 도서관 입니다. 요즘 어린이열람실이나 모자열람실은 잘 갖춰져 있어도 모유수유실까지 갖춘 도서관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 도서관에서 가장 고마운 공간을 들라면, 주저없이 모유수유실을 들 것입니다.

종합자료실과 전자정보열람실 등 도서관 시설도 훌륭하지만, 다목적 홀과 문화강의실, 도예공방 등에서 문화센터 이상으로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합니다. 우리가 찾은 시간에는 발레 수업을 듣는 초등학생들이 분홍색 발레 슈즈를 신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발레복을 보니 생소하기도 했지만 단지 책으로 눅눅한 인상을 주는 곳보다 훨씬 살아있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지역주민들은 물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진아도서관은 책과 여유를 선물합니다.
 지역주민들은 물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진아도서관은 책과 여유를 선물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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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기념도서관은 서울시민이나 서대문구에서 일하는 사람들, 국가유공자와 독립유공자에게 회원증 발급 재료비 1천원을 받고 회원자격을 줍니다. 책도 빌릴 수 있고, 햇빛 가득 들어오는 열람실에서 보고 싶은 책을 여유 있게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역사관에서 너무 많이 걷게 해서 그런지 그림책 열 권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쿠하는 단잠에 빠져버립니다. 모유수유실에 작은 침대가 있긴 해도 그건 아주 어린 아기들에게 양보해야 하기에 얼른 흔들어 깨웠습니다. 우유를 사준다고 꼬시고, 야쿠르트도 사준다는 말로 아이를 데리고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야쿠르트 먹을 욕심에 졸음을 참고 억지로 걷는 아이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납니다.

투명한 엘리베이터도 아이들에겐 재밌는 장난감 입니다. 쿠하의 성화에 못이겨 엘리베이터를 세 번이나 탔습니다.
 투명한 엘리베이터도 아이들에겐 재밌는 장난감 입니다. 쿠하의 성화에 못이겨 엘리베이터를 세 번이나 탔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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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우리 역사의 아픔이 서린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조용한 독립공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하기 좋은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있습니다. 4-5시간 여유 있게 준비해서 천천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보고, 형무소 옥사 사이의 벤치에 앉아 미리 준비한 간식으로 요기를 하고,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느긋하게 오후 햇빛을 즐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그:#쿠하, #시티투어, #서대문형무소, #이진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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