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6월 28일 유시.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며 시대를 고민하던 비극적 영웅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의 죽음이자 미래를 지향하던 조선의 죽음이었다. 역사의 신이 그에게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 있기를 허락했다면, 그래서 그가 초인적 의지로 구축했던 정치체제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
역사가 이덕일이 2월에 펴낸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서문의 한 대목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덕일은 정조의 죽음 앞에 '만일'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만큼 정조의 죽음이 안타까웠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저자는 왜 그토록 정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정조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의 죽음을 이토록 절절하게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야기를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를 통해 낱낱이 풀어놓았다. 18가지 주제로 나뉘어 전개되는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죽을 때까지 그의 적이었던 정순왕후와 노론 일파들, 그를 왕위에 오르게 도와주었으나 불타오르는 권력욕 때문에 정조에게 내침을 당한 홍국영,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했던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등의 남인들, 아버지 사도세자들 기리기 위해 쌓은 계획도시 수원성 등등. 어느 것 한 가지 예사로운 것이 없다. 박진감 넘치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정조의 삶이 그만큼 파란만장했기 때문일 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것도 할아버지인 영조의 손에 의해서. 물론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에 희생이 되었다. 노론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외가가 있었다.
저자는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조의 어머니가 정조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어느 정도 관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외가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앞장 선 것도 끔직한 일인데 어머니마저 그랬다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자랄 수밖에 없었던 소년. 그 역시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린다.
그 때문에 밤이 늦도록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운명이었으므로. 실제로 죽음에 임박한 영조가 왕위를 정조에게 넘기려고 했을 때 노론 일당은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 막기까지 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버린 영조는 손자는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켰고, 끝내 왕위를 물려주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정조 역시 사도세자처럼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왕자이면서도 늘 운명은 거친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살아남아 왕이 되었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임금답지 않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늘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
다음은 그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는데, 임금이 된 뒤로도 폐지한 적이 없다. 때로는 저녁에 응접을 한 뒤에 아무리 밤이 깊어도 조금도 쉬지 않고 반드시 촛불을 켜고 책을 가져다 몇 판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 - <일득록> 1성실하기만 했던가. 개혁적이었고, 차별받던 서얼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박식한 학자이기도 했다. 조선의 어떤 임금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을까?
그랬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도 정조의 독살설을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정황상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처단하겠다고 분연히 일어난 장시경, 장현경 부자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나, 당시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지금에와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마는.
정조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드라마 <이산>이 화제를 뿌리며 시청률을 높이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정조를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다.
드라마 <이산>은 드라마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 역사라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역사와 드라마는 엄연히 다른 것. 이 책을 통해 정조의 실체에 다가가 보고, 그를 기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