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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추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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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후배 두 명과 영화 <추격자>를 본 건 지난 2월 말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우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며 서로가 느낀 공포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문대로 <추격자>는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충분히 공포스러웠고, 더 없이 팽팽한 긴장감을 안겨줬다. 각자가 느낀 공포를 이야기한 뒤 헤어질 때, 우린 서로에게 이런 작별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방금 전 나눈 이례적 인사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조심히 가라"는 말이 준 이질감은 영화가 준 공포만큼 컸다. 남자들끼리는 "조심히 가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씩 사용한다. 그러나 그 조심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대개 교통사고를 말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은 <추격자>를 보고 어떤 공포를 느낄까. "조심히 가라"는 말을 일상으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의 무게는 얼만큼일까.

<추격자>를 향한 상찬에 왜 '여성'은 없을까

<추격자>의 모티브가 된 유영철 사건이 보여주고, 역시 <살인의 추억>이 재구성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증명하듯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이런 희대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많은 살인과 폭행 사건의 희생자 역시 대부분 노약자 아니면 여성이다.

<추격자>에 대한 상찬이 줄을 잇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에 박수를 보내고, 재능 있는 감독의 탄생을 축하하며, 새로운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김윤석·하정우 두 배우에게 탄성을 터뜨린다. 그리고 <추격자>를 추격하는 영화도 없다. 흥행에서 독보적 1위다. 미국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도 들린다.

모두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뭔가 허전하다. 왜 우린 <추격자>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희생에 대해서 침묵하는 걸까. 연쇄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아무도 모르게 묻혔던 그들은 출장 마사지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만의 비극일까.

물론 <추격자>가 그들을 향한 만가(輓歌)는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시각에서 논의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여성 4인과 함께 <추격자>를 주제로 방담을 진행했다. 대학생 홍현진(25), 김혜민(24), 김한내(24) 그리고 문화잡지 <보일라> 편집장을 맡고 있는 강선제(34)씨가 바쁜 시간을 내줬다.

이들은 여성들이 이 땅에서 어떤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는지, <추격자>와 엮어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성들만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사회에 희망은 더디 온다. 잠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영화를 본 느낌이 어땠나.

김혜민(24)씨.
 김혜민(24)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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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내
"정말 끔찍했다. 극장을 나선 뒤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보다 기분 나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원래 무서운 영화 거의 안 보는데, <추격자>가 그런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다. 기분이 안 좋아서 함께 본 남자친구와 한동안 말도 안했다. 영화가 너무 잔인하고 현실적이었다. 나도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고."

김혜민 "영화를 방금 보고 왔다. 영화 속 범인 지영민(하정우)은 꼭 무기로 사람을 때리더라. 그런데 형사들이나 힘쓰는 사람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여자는 모두 약자였다. 그 어쩔 수 없음에, 약육강식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이런 영화를 찍어도 지영민 같은 범인은 또 나타날 것 아닌가. 정말 조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김한내 "나는 여자고 어쨌든 육체적 힘에서 상대적 약자 아닌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구나'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김혜민 "영화를 보면 여형사(박효주)조차 범인 지영민에게 공포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 난 지영민이 여형사에게 '생리하나 봐요? 비린내가 나네'라고 말했을 때 미치는 줄 알았다. 그 비웃는 웃음, 끔찍하다."

홍현진 "여자 형사가 풀려난 지영민을 따라가지 않나. 저러다가 지영민에게 당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맞어, 맞어") 그런데 참 역설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엄중호(김윤석)가 범인 집에 찾아가 그에게 '야, 들어가자'고 했을 땐 하나도 안 불안했다. 자꾸 여자 형사에게 시선이 갔다. 여자 형사가 계속 무기력하게 나온다."

강선제 "슈퍼 아줌마도 나오는 순간 '곧 죽겠구나' 했다." 

홍현진 "여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없다. 미진이·형사· 슈퍼 아줌마…. 다 죽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나. 지영민 집에 찾아간 노부부도 봐라. 여자가 개한테 '왜 그렇게 살이 빠졌냐'라고 말해서 죽음 자초하고, 슈퍼 아줌마도 '총각 좀 있다가 가'라고 말했다가 결국 죽고."

강선제 "지영민 캐릭터는 현실에서 정말 하잘 것 없는 인물이다. 그도 정말 사회적 약자다. 근데 더 약자인 여성과 노인만을 노렸다. 실제로 유영철도 여성·노인 등 그런 약자만 죽이지 않았나."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성매매 여성...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홍현진(25)씨.
 홍현진(25)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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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진
 "성매매 여성들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 법의 보호를 못 받는다. 그 사람들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주나. 역설적이게도 미진이(서영희)를 찾아다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미진이를 살인의 소굴로 보냈던 엄중호다, 미진이 생명을 걱정하는 것도 그가 유일하다. 그 누구도 미진이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성매매 여성은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다."

- 영화 속 미진이와 희생된 여성들은 모두 성매매 종사자들이다. 그 여성들에게 감정 이입이 잘 됐나. 아니면 '난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나. 

강선제 "대한민국 안에서 성매매 여성이나 나나 다 똑같다. 다를 게 뭐가 있나."

홍현진 "나는 솔직히 <살인의 추억>보다 덜 무서웠다. <살인의 추억>은 음악 '우울한 편지'가 라디오에 나오고 비오는 날이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지르지 않나. 그런데 <추격자>는 출장마사지 여성에게만 국한됐으니까, '나는 안전할 수 있겠다'라는 치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선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죽어도 된다, 죽을만하다'는 생각이 더 무섭다. '맞을 짓을 했겠지' '당할 짓을 했겠지' 그런 생각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공포스런 일은 성매매 종사 여성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김한내 "미묘한 생각이 공존했다.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공포가 그대로 전달됐다. 그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성매매를 안 하니까 상대적으로 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유치하게도 '성매매 종사하지 말아야겠다'는 단순한 생각도 했다. (웃음)"

홍현진 "성매매 종사하는 여성들이 겪는 공포가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 누가 있을지 모르는 모텔방에 들어서고, 화장실 들어가고, 늘 낯선 공간에 가고."

김혜민 "미국에 친구가 있다. 걔한테 미국 무서워서 어떻게 사냐고 했더니, 오히려 한국이 더 무섭다고 하더라. 한국은 골목에 차가 못 들어가서 밤에도 걸어 다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강선제 "<추격자>가 골목길의 무서움을 잘 표현했다. 골목길은 여성들에게는 참 무서운 곳이다."

- 골목길이 무서운 건 근원적인 공포는 아닐 텐데.

김한내(24)씨.
 김한내(24)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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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제
"뉴스에서 항상 범죄에 관한 소식이 나오지 않나. 그런 소식을 접하면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으슥한 곳 다니지 말고 넓은 길로 다녀라' '밤늦게 택시 타지마라'고 전화한다. 그런 말 항상 듣고 살았다."

김한내 "그래서 밤늦게 친구들 만나 헤어지면 서로 택시 번호를 적어준다."

홍현진 "그런데 그게 조심해서 될 문제인가 싶다. 지금 학교 근처 자취촌에 사는데, 성범죄가 자주 일어났었다.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는 일도 있고. 엄마에게 전화로 무섭다고 했더니, '조심해라, 조심해라' 하더라.

근데 순간 짜증이 났다. 과연 내가 조심해서 될 문제인가. 구조적 문제인데, 왜 나한테 조심하라고 하는가. 치안상태 안 좋고, 가로등 없는 곳도 많고, 경찰은 작은 사건은 그냥 넘어가고. 택시 번호 적어봤자 안 좋은 상황 발생하면 그것으로 끝 아닌가."

김한내 "뉴스가 전하는 여러 범죄 소식을 알고 있으면 대처하는데 좋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 무기가 없는 이상, 많은 걸 알고 있어도 안 좋은 상황이 발상하면 모르는 것과 똑같다. 아나 모르나 똑같이 당한다. 택시를 타면 마음을 졸이게 된다. <추격자>를 보고 나서 누군가 모방 범죄를 저지를까봐 걱정이다."

홍현진 "나는 운이 좋아서 나쁜 일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일은 운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종종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 같다."

강선제 "나쁜 일 겪으면 '그래,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고 여기는 여자들이 있다. '잊어버리고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부모님 상처 안 받게 내가 조용히 있자'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참 안타깝다. 개가 아니라 사람한테 당한 일 아닌가. 특히 가해 남성은 처벌 안 받으면 계속 범죄 저지를 수 있다."

김한내 "여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면, 가해자가 처벌 받고 나온 뒤 또 나를 괴롭힐 것 같다는 두려움도 갖고 있다." (일제히 "맞다")

- 여성들은 항상 "조심해라" 라는 말을 듣고 사는데,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클 것 같다.

김혜민
 "나는 남동생이 있는데, 서로 귀가 시간이 다르다. 남동생은 늦어도 괜찮은데, 나는 여자라서 그렇지 않다. 여자라서 늦게 다니면 안 되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강선제 "과거 우리집이 대가족이었다. 그 안에서 계속 차별받았다. 밤에 못 돌아다니고, 안전하게 살려면 집 울타리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하고. 후에 독립을 했는데, 그래도 계속 집에서 안부 전화를 받는다. 수시로 전화한다. 솔직히 귀찮다. 부모님은 남동생에게 전화해서 '밥 먹었냐'고 묻지만, 나한테는 '무슨 일 없냐'고 묻는다. 내가 아무리 잘 살아도 부모님들의 그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홍현진 "함께 본 남자 친구는, 만약 영화가 남자들이 희생되는 걸 다뤘다면 자신도 무서웠을 거라 말하더라. <추격자>가 상영되는 동안 공포의 소리를 지르는 건 다 여자들이다. 어느 순간 그게 참 짜증이 났다."

- 말했듯이 남자와 여자의 다른 느낌 때문에 소통의 단절을 경험한 적도 있을 것 같다.

김혜민 "소통의 단절까지는 아닌데…. 전에 남자친구와 만난 뒤 집에 돌아가는데, 밤이라서 좀 무서웠다. 여자가 항상 보호 받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내가 무섭다고 하는지, 여자에게 밤길이 어떤 의미인지, 내가 왜 자주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추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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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진 "난 여중·여고를 나왔는데 재수학원에 갔더니 남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내게 어깨동무도 하고 툭툭 치기도 하고 그랬는데, 좀 부담스러웠다."

김혜민 "대학 동아리에 여자 후배들이 들어오면, '저 남자 선배 조심해라, 스킨십이 있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홍현진 "맞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런 문제를 이야기 말하면 기분 나빠한다."

김한내 "그런데, 10번을 지적해도 안 고치는 남자도 있다."

홍현진 "야학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한 남자 분이 계속 내 손을 잡았다. 너무 싫었는데, 크게 내색을 못 했다. 그것을 표현하면 분위기 이상해지니까…."

- <추격자>를 보면 은연 중에 포주 엄중호를 응원하게 된다. 이를 검찰과 경찰이 좀 불편해 하는 것 같다. 실제 한 검사는 엄중호를 비난하는 글도 썼는데.

김혜민(24)씨.
 김혜민(24)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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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제
"포주라고 무조건 무시한 게 경찰인데…."
김혜민 "유영철도 포주들이 잡지 않았나. 실제로도 검찰과 경찰이 무능했다."
강선제 "포주보다 못한 경찰이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더 공포를 느낀다. 경찰이 여자를 보호하지 못하니까."

- 일상에서 공권력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끼나.

강선제 "성매매 여성들 이야기 들어보면, 자기가 피해를 당했을 때 도와주는 건 자기들에게 이익을 뽑으려는 포주들이지, 경찰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경찰을 피해 다닌단다. 실제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지 경찰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혜민 "어두운 길을 갈 때, 만약을 대비해 휴대폰에 번호를 찍어두고 통화버튼에 손가락 대고 걷는다. 나쁜 일 벌어지면 바로 누르려고. 그런데 그 번호가 112가 아니다. 엄마나 아버지 번호다."

"비상시 내 손은 112를 누르지 않는다"

홍현진 "절차 때문에 경찰이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강선제 "혼자 사는 여자들이 지금 얼마나 많나. 그 사람들의 공포는 더 클 것 같다."
홍현진 "내 친구는 자취방에 들어 온 도둑과 얼굴을 마주쳤는데, 그 순간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더라. 도둑이 도망간 다음에야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여자들의 이런 경험은 웃긴 해프닝처럼 세상에 떠돈다."

- 우리나라가 치안 상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좋다고 말하는 남자들도 많다.

김혜민 "진짜? 그건 정말 아니다."
강선제 "여성인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데, 남자들이 좋다고 하면 뭐하나. 정말 체감하는 게 다르다."

홍현진 "얼마 전 성범죄 일어난 현장 취재했는데, 자취촌이었다. 저녁 7~8시 학교 바로 뒤였는데도 새카맣게 어두웠다. 무서워서 바로 달려서 현장을 빠져나왔다. 사건이 터졌을 때 가로등을 설치해 주겠다는 등 말이 많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우리나라가 안전하고 말할 수 없다."

김혜민 "언젠가 경의선 기차를 탔는데, 갑자기 노숙인 아저씨가 나한테 막 뭐라고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욕설을 그냥 이유 없이 들었다. 근데,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아무도 안 말려 주더라. 평소 그런 사람 만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한테 해코지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커서 참았다. 기차에서 내리고 난 뒤 울음이 터졌다."

김한내
"밤길 걸어갈 때, 남자와 마주치면 괜히 불편하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일 텐데도, 그냥 무섭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거나, 뛸 준비를 한다. 사실 밤에는 남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보인다."

(갑자기 대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홍현진(25)씨.
 홍현진(25)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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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진
 "남자들은 그걸 엄청 싫어한다. 대학에서도 총여학생회가 남학생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만든다면서 많이 비판하지 않나."
김혜민 "근데 그렇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하나."
김한내 "그것 때문에 화내는 사람도 있다. 밤에 택시를 탄 뒤 번호판을 보고 적고 있는데, 기사 아저씨가 '학생 날 뭘로 보는 거야?'라면서 기분 나빠하더라. 결국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홍현진 "딜레마가 있다.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안 좋은 것이지만, 의심하게 되니까.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남성 에티켓으로 엘리베이터에 여자가 타면 먼저 올려 보내라는 캠페인을 했다. 그 운동 제안한 쪽은 엄청난 댓글 공격을 받았다."
김혜민 "밤에 모르는 남자와 엘리베이터 타면 진짜 많이 불편하다. 상대방이 버튼을 누를 때까지 기다린다."
강선제 "엄마는 지금도 엘리베이터 탈 때 모르는 남자와 함께 타지 말라고 한다. 너무 슬프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그게 잘 안되니까."

- 영화에서 미진이의 딸은 홀로 남겨진다. 그 딸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강선제 "엄중호가 참회를 하면서 그 아이를 돌봐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현진 "엄중호와 함께 있을 때 그 아이가 잘 클수 있을까?"
강선제 "엄중호가 다르게 살겠지. 자기 직업도 바꾸고."
김한내 "내가 만약에 그 아이라면 제대로 못 클 것 같다. 엄중호는 분명히 내 엄마를 불러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그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힐 것 같다."

홍현진 "어릴 때 공포를 겪는 건 정말 큰 사건이다.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잖나. 영화를 보면 엄중호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데, 폭력에 계속 노출돼 안타까웠다. 자기 엄마가 죽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 듣고 차 안에서 아이가 우는데, 소리는 안 났지만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엄중호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 쫓은 정도였지."

- 상처를 겪은 뒤 그를 극복하는 것도 큰 문제인 것 같다.

강선제 "내가 인터넷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때 상처가 엄청났다. 밤에 잠도 잘 못자고.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고민이었다. 나도 가해자에게 똑같은 수치스런 경험을 주면 자유로울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김혜민 "맞다."
강선제 "가해자를 불러서 나에게 10대를 맞을래, 아니면 고소를 당할래라고 물었더니 맞겠다더라. 그래서 있는 힘껏 때렸다. 만약 그 가해자가 폭행으로 나를 고소하고, 나는 그를 사이버 폭력으로 고소했으면, 100% 내가 졌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여자한테 맞을 걸 수치스러워서 고소를 안 했다. 그가 그런 수치심을 알았던 순간, 나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를 때리지 않고 그냥 고소를 했다면? 난 어린놈한테 모욕당한 수치심를 평생 안고 살아갈 것 것이다. 여성들이 사이버테러나 성폭력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늘 고민이다. 솔직히 나는 피하지 말고 밟아주라고 한다. 많은 여자들은 폭력을 소스라치게 무서워한다.

성폭력 당한 어린애는 자기가 어쩔 수 없이 당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평생 죄의식을 갖거나 남자를 무서워하며 산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직도 피해 '극복'보다는 '피해'가 강조되는 게 안타깝다."

"가해 남성들에게 사과 못 받아봤다"

김한내(24)씨.
 김한내(24)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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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
"구성애도 성폭행 당했을 때 부모가 가해자 데리고 와 무릎을 꿇렸다고 하지 않나. 그런 방식이 좋은 것 같다."
강선제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추격자>에서도 지영민이 반성을 하거나 '쪽팔림'을 당하는 게 아니다. 남자 엄중호가 들어가서 힘으로 제압한 것이다. 여자들이 느낀 수치심과 공포에 대해서 그는 경험하지 않았다. 남자가 남자를 제압한 것이다.

성매매를 피해를 경험한 여성은 그걸 치유하는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어간다. 남자들은 쉽게 돈을 주고 성을 사지만, 여자들은 그 트라우마가 굉장히 오래간다.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는 기억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쉽게 돌아가지 못한다."

- 본인이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남자에게 사과를 받아본 경험이 있나. 

김혜민 "없는 것 같다."
강선제 "없었다."
홍현진 "야학에서 불쾌한 일 겪었을 때, 왜 그랬냐고, 다른 곳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나는 그냥 그 사람과 마주치기도 싫었다. 후회가 된다."

김혜민 "남자들에게 불쾌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사과를 요구하면 엄청 어려워한다. 내가 왜 불쾌했는지를 모른다. 모르니까 사과를 안 한다. 학교에서 술 마실 때, 옆에 앉아 계속 허벅지를 만지는 선배가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이야기해도 계속 반복하더라.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따로 마나서 '왜 그랬냐'고 물으니, 자기는 전혀 문제의식을 못 느꼈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일상에서 성폭행의 공포를 느끼느냐, 아니냐로 구분되는 것 같다."

- 추상적인 물음이겠지만, 이걸 꼭 묻고 싶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강선제 "여성이기 때문에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독립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여자니까, 오빠나 남동생 보다는 인간이 빨리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최소한 나는 가해자는 아니니까. 인간답게 사는 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적어도 가해자 입장에서는 서 있지 않다고, 살아본 적이 없다고 믿는다. 제대로 살고 있다는 믿음도 있으니 마음의 짐이 작다."

"왜 희생당한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까"

김한내
 "여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 주는 게 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여자가 겪는 걸 절대 알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족한 걸 크게 느끼지 못했다. 가정 형편도 나쁜 게 아니니까.

그나마 내가 사회적 약자라고 느낀 건, 여성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게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여자니까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여자로 태어난 건 내게 기회이기도 하다."

홍현진 "살아갈수록 내가 모르고 있던 걸 많이 알게 됐다. 가부정적인 사회에서 피해를 겪는 사람도 있고,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겪는 불편함도 있다. 아는 게 병이라고, 그걸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가.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남자도 많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자니까, 남들이 뭐라 해도 평생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김혜민 "여자를 배려 해줘도, 안 해줘도 문제다. 장애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신체적인 조건이 처음부터 다르니까.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들의 세계가 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자기들만의 문제를 왜 그렇게 강하게 주장 하냐고 하는데, 사실 그래야만 세상이 바뀐다. 또 돌아보면 그렇게 강한 주장도 아니었고."

김한내 "우리가 보호 받을 필요가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
홍현진 "<추격자>에 대해서 많은 상찬이 쏟아진다. 그러나 여성에 대해서, 지금도 출장 마사지를 나서는 여성들의 인권에 대해서, 유영철에게 희생당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김한내 "나도 그렇게 느낀다."
홍현진 "남자들에게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지만, 여자에게는 공포영화다. 왜 그런 시각이 없을까 안타까웠다. 그런 문제들이 공유되고 공감돼야 한다."
김한내 "여성의 시각으로 작성된 <추격자> 평론을 못 봤다."

강선제 "가끔 인터넷 댓글을 즐겨보는데, 우리 사회는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그런데 <추격자>에 그런 여성이 나왔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더라. 남자들은 미진이의 고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홍현진 "정말 미진이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잊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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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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