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밖에 다 솥을 걸어논 민박집 아궁이에서 불이 타고 있다.
 밖에 다 솥을 걸어논 민박집 아궁이에서 불이 타고 있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여행, 일상의 부패를 막으려고 뿌리는 소금 같은 것

내 오늘은 자네와 더불어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네.

사람들은 살아가는 행위를 가리켜 일상이라고 부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상을 두고서 지긋지긋하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하더군. 만날 '그 밥에 그 나물' 같다고 아우성이지. 일상이 지긋지긋하다면 그 혐의는 누가 짊어져야 할 것 같나? 나? 아니면 일상? 사람이란 동물은 무조건 자신에게로 떨어지려는 책임을 면피하려는 본능을 가졌어.

나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돨 수는 없지. 당근 일상이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봐. 명색이 일상의 주인이라는 사람으로서 뻔뻔스럽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왜 뻔뻔스럽지 않겠어? 그래서 더는 뻔뻔스러워지지 않으려고 여행을 떠나는 것 아냐.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자신을 '여행가'라 소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 되게 웃기는 일이지. 뭐, 여행가라고? 아니, 지겨운 일상을 피하고자 떠나는 것이 여행일진데, 여행 자체가 일상이 된다면 그게 무슨 여행이란 말이야? 그건 여행이 여행다울 수 있는 첫 번째 필요조건을 이미 상실한 셈이거든. "당신에겐 여행이 곧 일상이라는 얘긴데 때때로 지겹게 느껴지지 않던가? 어쩌면 당신에겐 여행가라는 말보다는 아무래도 '떠돌이'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아."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돌아서고 말지.

여행이라는 것에는 프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야. 만일 거기에도 프로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는 매우 불쌍한 사람이 아닐는지. 이미 여행이 주는 싱싱한 맛과 느낌을 대부분 상실해버렸을 게 틀림없으므로. 그런데 말이야. 여행이란 걸 꼭 몸이 움직여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가령 책을 읽는다든지, 음악을 듣는 행위도 여행에 포함하면 안 되는 걸까. 그것 역시 여행처럼 새롭고 낯선 영역으로 이끄는 것이니까.

너무 지나친 오버 아니냐고? 생에 오버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남아있겠어? 정리하자면 여행이란 소금 같은 것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일상의 부패를 막으려고 뿌리는. 그렇다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소금을 뿌려선 곤란하지. 일상이라는 채소의 숨을 다 죽여선 안 되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흐물흐물한 일상을 다시 풋풋하게 만들려고 싶을 때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 아니던가 말이야.

걷는다는 건 기억의 확장이자 영혼을 단련시키는 것

지난9일, 가야산 해인사에 다녀왔다네. 1,430m나 되는 높은 키 때문일까. 구부정하게 서 있는 가야산이 몹시 쓸쓸해 보이더군. 이건 절대로 감정이입이 아니라네. 하긴 사람이건 사물이건 풍경이건 간에 끝자락에 선 것들은 다 쓸쓸해 보이기 마련이지. 아마도 돌아선 뒷모습에서 뒤늦게 진실을 발견하기 때문일 거야.

가야산이 품은 쓸쓸함을 내 것으로 간직하면서 해인사로부터 홍류동 계곡까지 십릿길을 터덕터덕 걸어 내려왔지. 걸어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게 어쩐지 좀 궁상맞은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난 걷는다는 건 단순히 속도의 차이나 운동량의 크고 작음 따위에 견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거든. 걷는다는 건 기억의 확장이야. 걷다 보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아주 까마득한 시간으로부터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기억과 만날 수 있지.

고은 시인이나 백기완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아, 이 양반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날의 아주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다 기억할까?"라고 감탄할 때가 있지. 그건 어쩌면 그분들이 이 산하를 걸어서 방랑했던 때문이 아닐까. 온몸이 욱신거릴 만큼 고단한 도보여행을 통해 높은 정신의 경지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거지. 자네는 늘 내 기억력에 감탄하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네.

홍류동계곡엔 농산정(籠山亭)이란 정자가 있더군. 정자 앞에는 눈부시도록 하얀 암반들이 있고 그 위로 청수(淸水)가 흘러가지. 한여름에 여기 와서 탁족을 하면서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야. 계곡가엔 고운(孤雲) 최치원이 썼다는 시를 새긴 '제시(題詩石)'이란 바위가 있지. 잠시 "常恐是非聲到耳 시비 소리 들릴까 저어하노니 / 古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 시켜 온 산을 감쌌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하면서 농산정에 앉아 있었지.

사람들은 대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쓸쓸한 것으로 치지만,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도 그에 못지않게 쓸쓸하지. 쓸쓸함이 내 마음속에다 둥지를 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까운 치인리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네. 민박을 쳐 삶을 꾸려가는 작은 마을이었네. 가다 보니, 어느 할머니가 길옆에다 커다란 양은 솥을 걸고 불을 때고 있더군.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려오는 삶이라는 여행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런 집에서 하룻밤 민박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샘물처럼 콸콸 솟구치더라구.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알싸한 슬픔도 함께였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문득문득 삶이 잔인하다는 걸 깨닫는 건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이 아닌가. 나에겐 오늘 중으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았거든. 난 기억 속 시 한 편을 떠올리는 것으로 애써 아쉬움을 달래면서 그곳을 떠났지.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반달만한 집과
무릎만한 키의 굴뚝 아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며
이세상에 여행 온 나는 지금
민박중입니다
때로 슬픔이 밀려오면
바람 소리려니 하고 창문을 닫고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파오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낮은 천장의 불을 끕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톱만한 저 달과 별
내 굴뚝과 지붕을 지나 또 어디로 가는지
나뭇잎 같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오늘밤도 꿈속으로 민박하러 갑니다
- 권대웅 시 '민박' 전문

이 시를 쓴 권대웅은 1987년 <시운동>을 통해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이라네. 그간 내놓은 시집으로는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당나귀의 꿈> 등이 있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나지막하다네.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시를 쓰기 위한 전략인지 그의 천성인지는 알지 못하겠네. 그러나 그가 체내에 쌓인 불순물이기라도 하듯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을 중얼거리듯 체외(體外)로 흘러보낸 시편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의 슬픔과 외로움이 내 것이 되고만다네.

그렇군. 좀 전에 내 마음이 잠시 아렸던 건,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팠던 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일 거야. 시인처럼 나 역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영원한 여행자라는 생각에, 다른 세상에 집이 있고 이 세상은 그저 잠시 유배온 거라는 생각에 젖어 일생을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았지. 삶의 쓸쓸함을 이불처럼 끌어당겨 자꾸만 추어지려는 마음을 덮으면서 민박의 밤을 새우곤 했지.

그러나 자네도 시인이 자는 민박집 풍경을 한 번 보게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톱만한 저 달과 별" 그것이 어찌 시인이 자는 민박집 만의 풍경이겠나. 설마 '아름다운 것은 결국 쓸쓸한 것'이라는 내 생각에 토를 달진 않을 것이리라 믿네.

이제 완연한 봄날이네. 봄날이 아름다운 건 꽃이 피기 때문이 아니라 그 꽃봉오리에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함께 묻어오기 때문이지. 봄날에 먼 길을 떠나면 마음의 길을 잃어버리곤 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언제 우리 먼 남쪽 항구로 여행 한번 떠나세나. 모처럼 둘이서 함께 길을 잃는 것도 봄날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흥취가 아니겠나.


태그:#여행, #민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