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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마을에서 만난 물방울꽃.
▲ 물방울. 하늘과 맞닿은 마을에서 만난 물방울꽃.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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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옵니다. 봄비입니다. 마른 풀이 서걱거리던 들판은 모처럼 촉촉하게 젖어 들었습니다. 비를 내리고 있는 하늘은 잿빛입니다. 청춘의 시절엔 잿빛하늘만 보면 집을 떠났습니다. 청춘의 시절엔 비만 내리면 술을 마셨습니다. 이유없는 청춘이 어디 있을라구요.

비를 마중 나간 여행길에서 정선아라리 가락을 만나다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마음만은 아직 청춘인가 봅니다. 마음이 들뜬 것도 아닌데 차분히 비를 바라보지 못하겠습니다. 결국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습니다. 비를 마중 나가는 길이지만 화려하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잡한 곳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날은 어떤 곳을 가도 고독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요한 산촌마을을 찾아 가기로 했습니다.

강원도 정선. 정선아라리 가락이 성글게 흐르는 곳입니다. 정선아라리를 흥얼거리며 하늘과 만나는 마을을 찾아 갑니다. 그 순간만큼은 내리는 비도 정선아라리 가락에 젖어 듭니다. 정선읍내에서 가리왕산으로 가는 강변길을 따라 갑니다.

짙은 물빛으로 흐르는 강은 조양강입니다. 봄이라 하지만 곳곳에 얼음이 남아 있습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계곡이 만들어낸 길 사이로 구비구비 돕니다. 구성지게 내 뽑는 정선아라리 가락이 간절한 풍경이지만 직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감질나는 물길입니다.

비 마중을 가는 생탄 마을은 큰 지도에도 간신히 표기된 작은 마을입니다.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첫 경험의 마을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변길을 버리고 산자락으로 난 길로 접어 듭니다. 길은 곱게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비에 젖은 포도는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하늘빛을 닮아 갑니다.

계곡 사이로 난 길은 구불구불합니다. 바쁘다고 서두를 수도 없는 길입니다. 바람과 안개가 흘러가는 그 속도에 맞추어 올라야 합니다. 길 가에 있는 비탈진 밭은 작년에도 묵었던지 쟁기질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건너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해 묵네

노랑 저고리 진분홍 치마를 받고 싶어 받았나
우리집 부모님에야 말 한마디에 울며불며 받았지 - 정선아라리 가사 중에서

한참을 오르니 동곡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동쪽 계곡이라는 뜻을 지닌 마을입니다. 마을이라지만 집이라야 고작 몇 채가 눈에 띌 뿐입니다. 이쯤이 생탄 마을인 줄 알았더니 더 가야한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동곡에서 생탄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더 셉니다. 길을 따라 오르니 안개가 발 밑에 깔리기 시작합니다. 잠시 머물렀던 안개는 바람이 불자 휭하니 흩어집니다.

멀리 읍내로 가는 길이 보인다.
▲ 정선읍내. 멀리 읍내로 가는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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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기와로 담을 쌓았다.
▲ 돌기와. 돌기와로 담을 쌓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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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마을에도 하루 세 번 버스는 오고

몇 개의 구비를 더 돌아 생탄 마을로 갑니다. 귀가 먹먹해지는 걸 보니 해발 고도가 꽤 높은 듯 싶습니다. 곧게 뻗은 소나무가 도열해 있는 산길을 돌아서니 비로소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여행객을 반기는 집은 빈 집입니다. 버려진 장독이 비에 젖어 번들거립니다.

울타리로 심어 놓은 탱자 나무에는 말라 비틀어진 탱자가 지금까지 달려 있습니다. 버려진 집의 풍경은 쓸쓸합니다. 지붕 위로 떨어진 비는 어떤 온기도 느끼지 못한 채 낙숫물로 떨어집니다. 복닥거리며 살아갔을 지난 날의 사람들은 대처로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니 이 마을에도 버스가 오는지 버스 정류장 하나가 소품처럼 놓여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정류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류장은 지상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는 곳이 아닌 하늘로 가는 버스를 타는 곳 같습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정류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류장 안에서 시 한 편을 만났습니다. 액자로 만들어진 시화는 이 마을 풍경을 그대로 담아 놓고 있었습니다.

안동네 바깥동네
마실 길 반마장
동네사람 힘모아 닦고 넓힌 길
시간도 어김없이
하루 세 번 오는 버스
조양강 경관 지나
애환 삶을 함께 날으고
장 서는 날 아니면
승객은 삼명인데
낮 차는 빈차되고
다섯가구 산동네
근심 걱정 한데 묶어
빈차는 싣고 가고
오늘도
내리는 눈송이 차창에 날리우며
기여서 다달은 버스종점
산 향기로 숨 돌리고
하나 둘 돗는 별
손님되여 태우고
경적소리 늘리며 떠나는 막차버스

- 김은수 시 '산동네 버스 종점' 전문

거칠지만 질박한 시구입니다. 하늘로 향하는 마을인 생탄 마을에 오는 버스는 하루 세 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루 세 번 오는 버스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정류장에서 바라본 먼 산은 친구처럼 가깝게 다가와 있습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산들이 이 마을에선 친구이자 말벗입니다. 지나가는 바람은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우체부이고, 안개는 포근한 이불과도 같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마을의 정류장에서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주변은 고요합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빗소리만 들려옵니다. 귓전이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풍경 좋은 곳에 위치한 어느 산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은 하늘 아래 첫동네 생탄 마을의 하루가 비에 젖어 듭니다.

하늘과 맞닿은 마을에 있는 버스 정류장. 마을을 작품화한 시 한편이 걸려 있다.
▲ 정류장. 하늘과 맞닿은 마을에 있는 버스 정류장. 마을을 작품화한 시 한편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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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올 때도 빈 차, 나갈 때도 빈 차.
▲ 하늘 구경을 하고 나오는 버스. 들어올 때도 빈 차, 나갈 때도 빈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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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닐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파와요.
▲ 아기와 할머니. 걸어다닐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파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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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할 땐 그 별이 눈깔 사탕이었으면 했어요"

비를 맞으며 마을을 둘러 보았습니다. 우산이 있었지만 쓰지 않았습니다. 집집 마다 돌담을 쌓았습니다. 보통 돌이 아니라 지붕으로 사용하던 것들입니다. 기와나 슬레이트가 귀하던 시절 산촌에서는 나무로 만든 너와나 굴피 껍질 또는 돌기와로 지붕을 얹었습니다.

지금은 슬레이트나 양철 지붕으로 덮었지만 오래 전 이 마을 집들의 지붕은 다들 돌지붕이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귀한 돌기와이지만 이 마을에선 돌담으로 쓰여집니다. 멋진 집을 갈구하는 도시 사람들이 본다면 혹할 것들입니다.

정류장에서 본 시에서처럼 사람이 사는 집은 다섯 가구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빈 집이 더 많은 이 마을에선 개짖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마을입니다. 세상 번뇌가 씻긴 듯이 사라지는 느낌마저 듭니다.

마을을 돌다 아기를 업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마을에 한 시간 넘게 있었지만 사람을 구경 하기는 처음입니다. 반가움에 말을 걸었습니다.

"마을이 조용하네요?"
"사람이 몇 살아야 말이지요."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살았나요?"
"시집와서 지금까지 쭉 살았으니 몇 십년 됐지요."
"친정은 어딘데요?"
"새터골이라고 여기서 멀어요."

할머니가 흐릿하게 보이는 먼 산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옛날엔 읍내 한 번 가려면 힘들었겠어요."
"길이 없을 땐 산을 넘어 다녔지요. 강냉이 한짐 이고 새북(새벽)같이 떠나야 점심 무렵 장거리에 당도해요. 그러면 강냉이 팔아 필요한 거 사서 곱 돌아 집에 오면 하늘에 별이 총총해요. 배가 고픈 날은 그 별이 눈깔 사탕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많았죠."

그랬을 겁니다. 걷는 일이 유일한 교통수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산촌의 생활이었으니까요. 할머니 말처럼 맑은 날 밤엔 별이 우수수 떨어질 듯한 마을입니다. 가능하다면 어느 가을 밤 두어 끼 굶은 채 이 마을을 찾아 밤 새워 눈깔사탕 같은 별을 헤아려야 겠습니다.

할머니는 아기가 칭얼대자 집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하늘과 맞닿은 생탄 마을엔 여행객 혼자 남습니다. 빈껍데기로 남은 빈 집으로 가 봅니다. 문창살 안으로 버려진 세간살이가 보입니다. 도시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는 여물통이며 호미, 지개도 보입니다. '정낭'이라고 불렀던 변소간도 그대로입니다. 정겨운 풍경들이 비에 젖고 있습니다.

하늘과 대화를 나누며 근심을 해결하는 곳.
▲ 정낭. 하늘과 대화를 나누며 근심을 해결하는 곳.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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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가는 길은 오늘도 '출입금지'입니다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비에 젖은 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어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납니다. 마을을 떠나려는데 버스가 산자락을 오르고 있습니다. 무슨 횡재라도 만난 기분입니다.

버스는 들어올 때도 빈 차, 나갈 때도 빈 차입니다. 버스는 정류장을 돌더니 곧바로 되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버스를 세워 운전기사와 몇 마디 나눴습니다.

"빈 차로 오셨네요?"
"여긴 손님이 없어요. 정류장에 있는 시에도 나오잖아요. 장날 아니면 없어요. 장날이라야 두어 명 탈까요."
"시에는 승객이 세 명이라고 나와 있던데요?"
"아,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세 명이에요. 그 애들이 유일한 고정 승객인 셈이죠."

승객이 없어도 버스는 어김없이 제 시간에 도착합니다. 작은 공용버스도 아닌 대형버스입니다. 버스가 생탄 마을에 들어오니 마을길이 그득합니다. 버스가 떠나자 잠시 소란스러웠던 마을은 다시 조용합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정류장엔 마중 나오는 이도 배웅 하는 이도 없습니다.

버스가 꽁무니를 보이며 사라집니다. 정류장에 있는 시작품을 알고 있는 운전기사가 모는 버스입니다. 비를 맞았더니 몸이 떨려 옵니다. 여행객마저 떠나면 이제 정류장만 홀로 남습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지만 하늘로 가는 길은 오늘도 출입금지입니다. 이제 여행객도 지상으로 하강해야 합니다. 비 마중을 나갔던 오늘 여행은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가는 길은 오늘도 출입금지이다.
▲ 하늘 길로 가는 중. 그러나 하늘로 가는 길은 오늘도 출입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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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선아라리,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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