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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여섯시 반, 신촌 아트레온에서 열리는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 단편경선 5'가 상영되었습니다. 헐레벌떡 아트레온으로 뛰어가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일단 시간이 맞는 표를 샀는데, 운 좋게도 아시아의 우수한 단편들이 경쟁을 벌이는 '아시아 단편경선' 상영작이 걸렸군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아시아 단편경선’은 아시아 여성영화의 현재를 지원하고 풍성한 미래를 독려하는 시상 부문입니다. 아시아 13개국에서 출품된 263편의 작품 중 여성으로서의 분명한 시각, 영화적 완성도, 감독의 가능성 등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19편을 골라 영화제 기간동안 상영하고 폐막식에서 시상을 합니다.

 

표를 내고 입장을 하는데 오늘의 상영작들이 나란히 써있는 종이쪽지를 한 장씩 나눠줍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뒤 가장 맘에 드는 영화를 골라 나가면서 투표하는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영화는 폐막식 때 '아시아 단편경선 관객상'의 주인공이 됩니다.

 

 제 손에 쥐어진 쪽지에는  <여고생이다>, <엘리베이터>, <무지개>, <그녀의 여름> 총 4편이 쓰여있습니다. 자 그럼 어떤 영화가 제 마음을 가장 두근거리게 할지 한 번 따라가 볼까요?

 

<여고생이다> : 당신의 판타지 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박지완 감독의 <여고생이다>는 어른들이 제멋대로 묶어버린 '여고생'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존재하는 진짜 '여고생'에 관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여고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여고생'이 아닌 각자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지요.

 

 단짝 친구와 신발을 한 짝씩 나눠 신으며 깊은 결속감을 지니지만 모의고사 점수 때문에 서로 까칠해지는 여고생, 수업이 끝나면 분식집에 모여 진지하게 카드게임을 하고 장래 희망을 '여대생'이라고 말하는 여고생, 밤이면 고독을 즐기러 학교 잔디밭에 누워있는 여고생.

 

 여고를 졸업한 저로서는 많은 부분 공감이 가고 때론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여고생활 따위는 그냥 잊고 싶어'라고 한 아이가 말하는 장면과 어느 여대생이 한참동안 여고생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은, 저에게 '여고생활'이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제가 가장 먼저 손을 들게 했던 것도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매 장면에서 저 자신을 발견하고 공감했는데 박지완 감독님께서도 자신의 여고시절 경험을 투영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 감독님은 "꼭 내 경험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 곳곳에 내 스스로 공감대를 이룰 수 있게 했다"고 답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자유로운 여대생이 되는 것만을 꿈꿀 수 있게 허락받은 우리의 여고생들. 그러나 여고생들의 은밀한 꿈꾸기와 내밀한 즐거움은 쭉 계속됩니다.

 

<엘리베이터> : 인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는 여행

 

꼭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든 건 아니었지만, 감독과의 질문시간에 첫번째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선물을 받았습니다. <엘리베이터>의 청 페이정 감독님이 준비해오신 DVD와 엽서입니다. 멀리서 오신 감독님을 직접 만난 것도 영광이었지만 이렇게 선물까지 받다니 시험공부 안 하고 영화 보러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는 거친 펜자국으로 만든 듯한 흑백 애니매이션입니다. 저마다 자신만의 엘리베이터를 타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뛰어난 성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투사한 듯한 여자 주인공의 심리 상태가 펜 끝에서 섬세하게 나타납니다.

 

 청 페이정 감독은 영화 속에 나타나는 엘리베이터를 '하나의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은 인생의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나갈 것인지 남아있을 것인지는 자신의 결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여러 층을 다니며 장애를 해결하고 다시 나의 자리로 가는 과정"을 엘리베이터로 표현했군요.

 

팍팍한 흑백 화면에서 자화상을 그렸다가 분에 차올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또 다시 그러기를 반복하는 여자 주인공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여행을 시작할 주인공이여, 좌절하고 또 괴로워할지라도 계속 자신을 찾아가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무지개> : 아줌마가 이걸 왜 해요?

 

 쇼윈도에 놓인 발레슈즈를 바라보며 10대와 40대의 두 주인공이 멍하니 빗속에 서있습니다. 발레리나를 꿈꾸는 두 여성은 각자의 현실 속에서 꿈을 미뤄왔지요. 그러나 꿈 꿀 권리마저 버린 것은 아닙니다. 10대 소녀는 수업시간에 교실 뒤에 서서 발레를 연습하고 40대 아줌마는 유아발레교실에 등록해 발레를 배웁니다.

 

 아무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 두 여성은 아파트 옥상에서 조우합니다. 서툴고 거칠지만 가장 자유롭게 발레를 추는 소녀, 그리고 빨래를 널다말고 팔을 길게 뻗어 발레리나가 되는 아줌마. 꿈은 항상 꾸지만 그것이 내 것이라고 내보일 수 없던 두 여성은 그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지요.

 

 40대 여성이 발레 학원에 등록해 자식뻘 되는 아이들과 연습을 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아줌마가 이걸 왜 해요?"

 

자리에 앉아있던 저는 "하고 싶으니까!"라는 대답을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되뇌는데 그 여성은 아무 말도 못하고 꼬마 아이 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김경진 감독은 "당당하게 말할 수 없던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꿈꾸는 대로 모두 할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다가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란 얼마나 깊고 위대한 것이 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녀의 여름> : 그녀의 손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안선희 감독의 <그녀의 여름>은 클로즈업과 롱테이크샷으로 47분동안 '그녀'를 비춥니다. '그녀'는 안 감독의 할머니로 80세가 넘도록 가정을 돌보고 딸, 손녀, 며느리 등 '그녀의 그녀들'을 존재하게 한 주인공입니다.

 

 할머니의 일하는 모습과 주변의 사물들을 세심하게 잡아낸 화면이 스크린을 꽉 채우면서 관객들은 낯선 느낌을 받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상함'뿐인데, 화면은 할머니의 손에 잡힌 굵은 주름이나 개수대 옆에 쌓인 깻잎, 따그닥거리며 돌아가는 미싱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니까요.  "그녀는 계란형 얼굴에 오똑한 코, 가지런한 입술을 지녔다"라는 나레이션도 낯섦의 연장이지요.

 

이 영화에서 남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하고 제사준비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이를 돕는 여성들이 등장할 뿐 남성은 제사 때 절을 하고 바로 스크린에서 벗어납니다. 제사라는 가부장적 행사에서도 여성이 주도가 되어 일을 진행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할머니의 손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다른 여성들이 성장했음에 대해 헌정하는 영화입니다.

 

안 감독은 "슈만의 음악을 주로 사용했으며 특히 몇 번 등장하는 오페라곡은 '여자의 일생'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자의 일생, 그 중에서도 할머니의 인생에 대한 손녀 감독의 사랑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4명의 여성 감독이 만들어낸 4색의 영화를 보고 나니 여성 자신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더욱 깊어지고 따뜻해졌습니다. '아시아 단편 경선' 출품작으로서 각자 충분히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영관을 빠져나오면서 어떤 영화에 투표했는지는 비밀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 ansi.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감독과의 대화, #아시아단편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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