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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던 겨울이 언제 그랬냐 싶게 순식간에 영겁의 시간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겨울이라면 오전 7시인 지금쯤도 컴컴한 어둠의 색이 자욱하고 짙으련만, 시간과 절기를 주관하는 우주의 섭리는 어둠의 길이를 하루하루 조금씩 줄여놓고 밝음의 길이를 또 조금씩 늘여 놓았다. 나는 엷은 백색의 안개가 연출해놓은 4월 초순 봄날의 커튼을 슬쩍 걷어치우며 자동차를 몰아 명성황후의 고향이자 대왕세종의 안식처인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량들, 아침부터 바삐 보인다. 향긋하고 상쾌한 봄날의 공기와 바람을 맞으며 어딘가로 쉴 새 없이 떠나는, 꽤나 많은 차량의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지금껏 내 답사여행의 친근한 벗이 되어준 어린 친구들과 오늘도 동행을 한다. 신호등이 없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차창 밖에는 피어나는 봄꽃들과 연둣빛으로 꼬물거리며 싹을 내미는 나뭇잎, 풀잎들이 낮은 산과 언덕 그리고 들판에 가득하다.

어느새 우리 일행은 중부고속도로에 접어들어 호법 나들목을 빠져나오고 영동고속도로 위로 올라섰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차 안에서 오늘 알현키로 한 한 사람의 황후와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조선의 임금을 생각해 보았다. 잠시 생각을 더듬거리는 찰라 눈앞에 '여주'라는 이정표가 불쑥 보이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를 물으며 엉덩이가 쑤신다고 야단들이다.

"얘들아,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명성황후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공부할 수 있는 곳
▲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공부할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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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I⋅C를 통과해 금세 여흥 민씨의 고장이자 대한제국 고종의 부인이었던 비운의 황후-명성황후-생가에 도착했다. 조선의 제26대 임금이자 조선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부인(아명:민자영)인 명성황후가 태어나 8살 때까지 살았던 어린시절 추억의 터전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잔디밭 마당에 모여 명성황후의 생애와 지나간 시절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다.  

명성황후 기념관 안에 나란히 정좌하고 계신다.
▲ 고종과 명성황후의 어진 명성황후 기념관 안에 나란히 정좌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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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란히 정좌한 채 너그러이 마중하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어진이 우리들의 눈앞에 점잖고 반가운 자태로 앉아계신다. 천정에서 햇빛이 비치도록 기념관 정면 안쪽에 네모나게 유리벽을 세워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조선의 황제와 비운의 황후를 알현하게 되니 가슴이 뭉클하고 야릇한 감격이 솟아오른다.

나는 아이들과 천천히 걸으며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진열되고 전시돼 있는 자료와 사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나도 몰래 오래 전 우리 역사의 한 시점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환상이 멍하니 느껴진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강직한 성격이었다는 여흥 민씨 민치록의 여식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 동안 왕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단을 경험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어린 나이로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된 상태로 왕비간택을 받는다. 그러나 악연이었는지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끊임없는 정쟁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급기야 그 와중에 서구 열강과 제국주의가 서로 먼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시기였던 1895년, 일본에 의해 경복궁 건청궁에서 무참히 시해당하는 참사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탄생부터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까지 아이들과 공부하고 토론하였다.
▲ 친구들과의 역사공부 이야기 명성황후의 탄생부터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까지 아이들과 공부하고 토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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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과 기념관을 나와 마당의 한 쪽에 만들어 놓은 연못가 정자 위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앉아 우리 민족의 비운과 오욕의 역사를 생각하고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의 손길을 노골화했고, 이에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 때 명성황후는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게 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워버린다. 나는 이 사건이 이른바 '을미사변'이라고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며 말해 주었다.

나는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들의 잔잔한 표정에서 자그마한 감정의 파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슬픔과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엉키어 교차하는 듯한 묘한 감정의 혼란인 것 같았다.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 행랑채 툇마루에서의  휴식
▲ 명성황후 생가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 행랑채 툇마루에서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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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명성황후의 6대 조부이자 숙종의 장인 민유중의 신도비를 둘러보고,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하던 방이 있던 자리이자 태어난 곳에 세워진 '명성황후탄강구리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아담하게 복원되어 조성된 생가로 들어서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과 안채를 골고루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따뜻하게 비추는 봄 햇살을 듬뿍 받으며 이곳저곳을 살피고 뛰어다니며, 뒤뜰 풀밭에 군데군데 핀 민들레와 제비꽃, 냉이꽃을 만지고 쓰다듬었다. 몇 발치 뒤에 가만히 서서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 싱그러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또한 동심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황후께 작별을 고하고서 다음 장소인 영릉(세종대왕릉)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를 달리니 금세 영릉에 도착했다. 영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샛노란 개나리와 그 뒤편 언덕의 연분홍 진달래가 만발하여 마치 국가원수들의 의장대 사열처럼 화려하고 멋들어지게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위대한 조선의 임금을 알현하러 오는 뭇 백성들을 위해 꽃길을 마련케 한 누군가의 아름다운 배려를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이 절로 느껴진다.

영릉의 아래에서 바라본 정자각 능침 : 조선 최고의 명당답게 편안하고, 너그러우며, 포용적인 모습이다.
▲ 천하의 명당 - 영릉 영릉의 아래에서 바라본 정자각 능침 : 조선 최고의 명당답게 편안하고, 너그러우며, 포용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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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릉 정문 입구에 서서 영릉의 좌우와 그 주변의 산세, 지세를 유심히 살펴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듣던 대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로 호위 받으며 자리 잡고 있는 거침없는 배산임수의 자태이다. 능침이 있는 곳에서 남향하여 호탕하게 열어젖힌 능역의 품에는 넉넉한 봄 햇살이 가득 안겨져 모든 주변을 질서 있게 정돈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편안함과 너그러움, 포용과 아량이 넘쳐나는 한 눈에 봐도 천하 명당임에 틀림없는 모습이다. 와~아~!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감탄의 소리가 순식간에 목젖을 타고 올라와 입을 벌어지게 하고, 양쪽 가슴 허파꽈리에서 휴우~ 하고 날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켜 가며 아이들과 함께 정문 안쪽 곳곳에 놓여있는 세종시대의 과학기구 모형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관찰하기로 했다.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해시계(앙부일구)와 세종 15년에 박연, 김진 등이 만들었다는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물을 이용하여 시간을 관측하는 물시계(자격루), 그리고 내린 비의 양을 측정하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과학기구들을 살피는 아이들의 눈빛에 호기심과 신기함이 가득해 보였다. 

친일화가 운보 김기창이 그렸다는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이 세종전 안에 걸려있다.
▲ 세종대왕의 영정 친일화가 운보 김기창이 그렸다는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이 세종전 안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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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아이들을 데리고 '세종전'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세종전 안에는 조선조 제 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의 영정(초상화)이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들 어린 백성들을 소리 없이 맞아주고 계셨다. 가만히 가서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인데, 아뿔싸! 만원짜리 지폐 속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같은 표정이다. 그러니까 저것은 대표적인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의 영정 초상인 것이었다. 속으론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에서 세종대왕께서 집현전의 학자들과 각고의 연구와 노력 끝에 만든 위대한 우리 말, 우리 글-훈민정음-의 흔적과 자취를 만날 수 있었기에 값진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세종전을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글 창제 당시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고 중국을 섬기기에 급급했던 사대주의적인 많은 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하여 정성과 슬기를 다해 한글을 만든 세종은 '혹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좌파 임금이었을까?'를 내 맘대로 상상해 보았다. 

나는 다시 아이들과 함께 세종전을 나와서 참도를 걸으며 능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좌우로 우리들을 너그러이 크게 품어주는 산세의 흐름이 포근하고 편안하다. 나는 정자각에 이르자 기단의 장대석 위에 아이들을 참새들처럼 쪼르르 앉혀 잠시의 휴식을 가지도록 했다. 그리고는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과장하여 마치 틀림없는 것인 양 매우 진지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얘들아, 여기 잠들어 계신 세종대왕은 밀짚모자의 할아버지란다."
"정말요? 진짜예요? 에이~! 거짓말이죠?"
"아냐, 사실이야. 나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세종의 둘째 형님)파의 후손으로 세종대왕은 우리 친할아버지의 동생이니까 나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인 거야!"
"와~아, 정말예요? 으음~ 안 믿어지는데…."

나는 솔직히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족보에 대해서도, 몇 대 손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아이들에게 역사적 상상력(?)과 답사여행의 추억을 하나 쯤 남겨주겠다는 순진한 일념 하나로 우스꽝스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이들이 나중에 철이 들더라도 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후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먼 친척 할아버지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난간석이 무덤을 둥글게 감싼 채 손에 손을 잡고서 '강강술래'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영릉의 난간석 난간석이 무덤을 둥글게 감싼 채 손에 손을 잡고서 '강강술래'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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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의 꿀맛 같은 휴식을 멈추게 하고 능침의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세종대왕과 그의 비 소헌왕후가 함께 잠들어 계신 무덤 앞으로 올라갔다. 가까이서 무덤을 바라보니 내 안에 잠복해 있는 나만의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력이 더욱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무덤 앞에 나란히 놓여있는 혼유석(상석)이 두 개인 것을 보며 합장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덤을 바깥에서 둘러 감싸고 있는 난간석을 보면서 또 내 나름의 상상 속에 빠져 들었다. 마치 궁궐의 나인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세종과 소헌왕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과 상상. 누가 들으면 어처구니없는 유치한 생각이라고 말 할 법도 하지만 이곳에 있는 난간석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세종은 죽어서도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무덤(헌릉)이 있던 곳의 곁에 묻히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침(무덤)예정지를 서울의 대모산 아래 헌릉 옆에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소헌왕후가 죽자 지관들은 그곳이 길지가 못되니 무덤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듣지 않았고, 소헌왕후의 능을 쓰면서 곁에 빈 석실을 마련해 두었다가 자신이 죽은 후 합장할 것을 유언하였다. 이 후 세종이 승하한 후 합장해 모셨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1469년 신하들에 의해 무덤의 자리가 불길하다하여 현재의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하며, 이곳의 지세는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라 하여 풍수가들은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긴 나 같은 일반 범인이 보더라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이곳은 참말로 좋은 자리인가 보다.

민들래 삼형제가 예쁘다.
▲ 민들래 민들래 삼형제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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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에게 무덤 주위에 놓여져 있는 석상과 동물모양의 석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무덤 앞에 서서 멀리 남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나는 아래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또 다른 느낌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남향의 지세가 더 없이 평온하고 풍요로워 보이니 가슴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고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세종(충녕) 할아버지께 영원히 강녕하시기를 인사드리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와 다음예정지인 신륵사로 향했다.

우리는 입구부터 벚꽃과 목련, 개나리, 진달래, 팥꽃나무 등으로 화려하게 꽃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고찰 신륵사에 도착했다. 가족들, 연인들, 어린이들을 망라한 상춘객을 기쁘게 반기고 있는 신륵사는 그 표정과 인상이 매우 밝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신륵사 경내로 천천히 걸어서 산책하듯 들어섰다. 경내에 들어서니 처음으로 얼굴을 보여주는 구룡루와 '불전사물'을 보호하고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건물이 고색의 단청으로 지난한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네 귀에는 추녀의 비상을 떠받치는 활주를 받치고 있으며, 마당에는 다층석탑이 다소곳이 서있다.
▲ 신륵사 극락보전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네 귀에는 추녀의 비상을 떠받치는 활주를 받치고 있으며, 마당에는 다층석탑이 다소곳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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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불법)을 세상에 전하는 네 가지의 사물 -범종, 운판, 법고, 목어-을 홍살로 막아 호위하고 있는 건물을 한 바퀴 돌아가며 짧은 눈으로 진하게 감상했다. 그런 다음 뒷길로 조금 오르니 저 만치 앞에 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이 자리 잡고서 불자들의 왕래를 자애로이 맞아주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올라 불단 위에 앉아계신 '목조아미타삼존불'을 겸손히 뵈었다. 그리고선 또 극락보전 앞마당에 서있는 다층석탑을 내려다보았다.

탑의 양식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목탑, 그 다음은 전탑(벽돌탑), 그리고 석탑과 혼합된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곳 신륵사에 오면 석탑과 전탑을 모두 볼 수 있으니 매우 유익한 공부를 할 수 있는 듯하다.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은 더군다나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더욱 특색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탑의 대부분은 화강암인데, 이 곳의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정교한 조각을 볼 수 있으니 색다르다.

태조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건물로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 신륵사 조사당 태조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건물로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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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극락보전을 한 바퀴 뒤로 돌아 뒷마당을 내려서니 저 앞에 자그마하고 아담한 자태와 균형감이 돋보이는 비례로 단아하게 서있는 보물 제 180호 '조사당' 건물이 보인다. 조사당 건물 안으로 몸을 구부려 넣고 머리를 들어 천장을 보니 듣던 대로 천장에 대들보가 없다. 태조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오지만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는 건물이라고 한다.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아이
▲ 부도탑과 아이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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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과 함께 조사당 남서쪽 낮은 언덕 위에 앞뒤로 나란히 서있는 두 개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서 쌓은 묘탑을 부도라 하는데, 이곳의 부도는 하나는 원형 부도탑의 형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팔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니 개성도 있어 보이고, 나름의 비교도 할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부도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설명이 끝나고 난 후 원형 부도탑 앞으로 한 녀석이 다가가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구~! 귀여운 녀석'

우리는 '석종부도'가 있는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그 실물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종 모양을 한 형태의 부도인데, 이 부도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금강계단처럼 높은 기단 위에 마련된 것이 색다르다. 석종부도의 앞으로는 팔각석등이 있고, 오른쪽 옆에는 보제존자 석종비가 있는데, 대리석 비신(비석의 몸돌)의 양옆을 화강암으로 액자처럼 감싸게 만든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었다.

기단부는 화강암으로 쌓고, 탑신부는 전돌로 쌓아 세운 전탑(벽돌탑)이다.
▲ 신륵사 다층 전탑 기단부는 화강암으로 쌓고, 탑신부는 전돌로 쌓아 세운 전탑(벽돌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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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와 다시 극락보전을 지나 동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쩌면 커다란 벽돌굴뚝처럼 보이는 듯 착각을 할 수도 있게 보이는 전탑이 높다랗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여강(남한강)이 파란 물빛으로 유유히 흐르며 향긋한 봄바람을 휘~휘~ 뿌려대고 있었다. 나와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들 얼떨결에 바람을 덥석 껴안아 버렸다. 답사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겨주고, 혼탁한 세상의 오염에 물든 영혼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런 바람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여강(남한강)의 절벽에서 강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 덥석 껴안았다.
▲ 여강 안벽(절벽)에서 여강(남한강)의 절벽에서 강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 덥석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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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남한강의 절벽(안벽)에서 우리들은 강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고, 나무와 들풀을 마음껏 자유로이 만나 껴안고 사랑했다. 나와 아이들은 오늘 하루 동안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봄의 절정에서 꽃을 보면서 반하고, 바람을 껴안고, 역사를 더듬으며 황홀한 외도를 한 셈이다. 그야말로 오늘은 일석삼조 행운을 얻은 날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다음 카페 "어울림 체험학교" 운영자이자 대표 길라잡이 입니다. 이 글은 지난 4월 12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명성황후 생가, #영릉, #세종대왕릉,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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