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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구, 구한말 일제에 체포된 호남의병들은 대구감옥소로 가기 위해 이 곳에서 배를 탔던 한 많은 포구였다. 이 포구를 떠난 대부분의 의병들은 일제에게 처형당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전해산 의병장도 이 포구에서 배를 타고 대구감옥소로 간 뒤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영산포구, 구한말 일제에 체포된 호남의병들은 대구감옥소로 가기 위해 이 곳에서 배를 탔던 한 많은 포구였다. 이 포구를 떠난 대부분의 의병들은 일제에게 처형당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전해산 의병장도 이 포구에서 배를 타고 대구감옥소로 간 뒤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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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의병장 행장

전해산 의병장
 전해산 의병장
ⓒ 전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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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全海山) 의병장은 1878년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이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해산은 그 해 겨울 이석용과 같이 전북 남원에서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하였다.

이들보다 일찍이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고광순이 적에게 전사되고, 기삼연이 일어나 활약하다가 그 역시 체포되자, 그 산하 의병들은 김태원의 휘하에 통솔되고 있었다.

이에 해산은 이석용에게 김태원과 연합할 것을 건의, 김태원을 뒤쫓아 장성에 이르니 김태원 역시 순국하였다고 하므로 오성술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에 주둔하였다가, 사천 등지에서 적병과 교전하였다.

한편 김태원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의병장이 되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해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1908년 6월 광주에서 모군하고 있는데 정원집이 부하를 거느리고 찾아와 부하되기를 청하였고,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으므로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다시 구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전해산 <진중일기> 원본(순천대 박물관 소장)
 전해산 <진중일기> 원본(순천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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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 정원집(鄭元執)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도포장 이범진(李凡辰)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격문을 지어 원근에 돌리고 수하 장령들에게 특히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명하고 군령을 엄히 하였다. 적병과 전투하는 한편 친일 무리, 그 중에도 일진회원들을 경계하여서 김원범 등에게 명하여 일인에게 의병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던 두 명을 총살시켰다.

영광 불갑산 전투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 전투였다. 1908년 7월 25일 삽시간에 적에게 포위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蟬峙)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았다.

1908년 9월, 도림(道林) 일대에 머물고 있었는데 대봉산 일대에 적병들이 운집하여 총성이 들렸다. 9월 29일 나주 석문동에 이르러 조사해 보니 전일에 조경환이 순사대장 정득주를 죽였기 때문에 적병들이 거문돌(黑石) 윗마을에 불을 지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마침 전에 헤어졌던 군사들이 합세하여서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일시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조경환 의진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두 의진이 연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1908년 10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장성의 김기순과 합진할 것을 꾀하나 서로 군사와 무기를 빌릴 것을 주장하여 합의치 못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구룡촌· 대곡 등을 행군하여 영사재(永思齋)에 이르렀다.

전해산 의병부대 고막 전적지
 전해산 의병부대 고막 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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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광주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남은 군사를 이끌고 순창· 담양 등을 거쳐 광주 대치(大峙)에서 다시 적과 대적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총과 탄환, 군복 등을 노획하였다.

주흥동에 이르러 기우만을 만나 크게 고무를 받고, 곧 순창 내동으로 가서 적과 접전하다가 적이 불을 질러 후퇴하였다.

다시 함평 유덕산으로 가서 김돈을 만나 전략에 대해 의논하고는 고막의 적 병참을 포위 공격하여 적을 몇 명 사살하였으나 선봉장 정원집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민가에 머물며 10여 일 치료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해산은 거의한 이래 오른팔 역할을 담당하던 정원집을 잃고 크게 상심하였을 뿐 아니라 의진의 사기도 다소 떨어졌다.

이제 다시 영산강으로 못 가리니

1909년 1월 17일 몰래 고향에 돌아가 부친께 세배를 올리고 가사를 처리하고 돌아왔다. 3월 27일 해산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광을 출발하여 부안 오동촌에 이르렀을 때 적의 내침을 받아 접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다시 나주로 돌아와 의병활동이 어려우므로 일시 휴식할 것을 훈시하고 곧 재기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적은 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탐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해산 의진에 출입하던 조 아무개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 아무개에게 밀고하여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은거한 지 수개월 만에 일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후 일인들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전향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 다시 영산강으로 못 가리니
두견새 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書生何事着戎衣 太息如今素志違
痛哭朝廷臣作蘗 忍論海外賊侵圍
白日呑聲江水逝 靑天咽泣雨絲飛
從今別却榮山路 化作啼鵑帶血歸)

광주를 거쳐 1910년 1월 대구감옥소에 이감되어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과 함께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 무렵 전해산 부하 중에 원인석· 노한문· 이범진도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로써 호남의진 우두머리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시부모의 상을 홀로 치르고 있다가 남편 관이 돌아온 날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전해산 할아버지 무덤에 성묘하는 손자 내외
 전해산 할아버지 무덤에 성묘하는 손자 내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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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태그:#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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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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