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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빗길을 걸으면서
비오는 날, 우산을 받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 책방 앞 비오는 날, 우산을 받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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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을 걸어갑니다. 우산 하나를 받고 두 사람이 걷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 이 길을 얼마나 걸어 보았던가 헤아려 봅니다. 서울역 앞에서 헌책방 살림을 꾸리는 '서울북마트' 아저씨는, 당신이 헌책방을 하기 앞서까지 이곳을 퍽 자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한국외대 옆에 자리한 '신고책방'은 처음에는 길장사로 꾸렸고, 차츰 살림을 키워 작은 가게 한 자리를 얻었고, 이 가게를 꾸준히 늘렸습니다. 가게삯을 곱배기로 올려 달라는 건물임자 말에, 집을 보증으로 빚을 얻어서 아예 가게를 사들이기로 했고, 이렇게 사들인 가게빚은 온식구가 헌책방 일에 달라붙어 힘쓴 끝에 차츰 갚으면서 가게는 훨씬 넓게 키우게 됩니다.

저한테 이곳, 서울 한국외대 옆 '신고책방'은 1994년부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갓 서울로 와서 새로운 학문을 배운다고 했을 때, 나이를 앞세우는 선배들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나머지, 또 도서관 장서가 너무도 적은 모습에 슬픈 나머지, 학교 언저리에 하나둘 자리하고 있는 여러 헌책방을 돌아다녔습니다. 퍽 멀리 떨어진 헌책방까지 찾아다녔습니다.

전공 사전으로 마땅한 책이 없어서, 헌책방 책시렁과 책더미를 여러 시간씩 뒤지며 두 손이 시커멓게 된 끝에 가까스로 낡은 전공 사전 한 권씩 찾아내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찾아내어 보던 사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찍은 '네-영' 사전 하나, 그리고 192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찍은 '네-네' 사전 하나.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네-라틴' 사전은 신학 공부를 하던 동무한테 선물로 남기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몸은 학교를 떠났어도 마음은 학교 옆 헌책방에 남아서, 틈을 내어 일부러 이곳 '신고책방'까지 찾아오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구름다리가 있어서 책방 간판을 가렸습니다. 이제는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한동안 유마트라는 곳이 있던 자리는 옛 저잣거리였습니다. 학교 울타리에는 오래된 나무로 자연스러운 울타리가 이루어져 있었으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 학교는 오래된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몹쓸병이 들지도 않았습니다만, 구에서 '담장 허물기 사업'을 할 때, 이 학교 울타리도 싹 바뀌었습니다.

이문동 언덕받이에 구름다리가 있던 때, 이 구름다리에 올라 휘 둘러보면, 지붕 높은 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작 해야 경희대학교 솟은 건물이 가장 높았던 집. 그러다가 삼성래미안 아파트가 골목집 한복판에 들어서고, 안기부 건물 둘레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큰길을 따라 올망졸망한 집이 허물리며 새로운 빌라가 들어섭니다. 이제는 이문동과 휘경동과 회기동을 묶어서 어마어마하게 재개발을 한다니까, 이 모습도 머잖아 ‘그리운 옛날’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 <신고책방>을 생각하면 무척 넓어졌습니다. 안으로도 깊어지고, 2층도 생기고. 수많은 책들이 제 갈래에 따라서 알뜰하게 꽂혀 있어서 둘러보기에 퍽 좋습니다.
▲ 문간 예전 <신고책방>을 생각하면 무척 넓어졌습니다. 안으로도 깊어지고, 2층도 생기고. 수많은 책들이 제 갈래에 따라서 알뜰하게 꽂혀 있어서 둘러보기에 퍽 좋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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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버려지는 책과 살아나는 책

책방에 닿습니다. 해가리개가 비가리개 노릇도 합니다. 우산을 접어서 문간에 놓인 우산통에 넣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반가운 인사를 꾸벅 하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가방이 제법 젖어서 쟈크를 열어놓습니다. 앞서 들른 헌책방에서 고른 책은 비닐봉지로 싸 놓았습니다. 비오는 날을 생각해서 늘 비닐봉지를 열나문 가방에 넣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디부터 둘러볼까 생각하면서 슬슬 골마루를 누빕니다. 하루하루 책살림이 늘어나는 '신고책방'은,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 내로라할 만큼 큰 곳으로 새로워졌습니다. 따로 마련한 인터넷방에는 목록이 무척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나라안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사랑받고 있습니다. 책방 아저씨를 취재하는 사람도 퍽 있어서, 신문이나 잡지에 쏠쏠히 소개기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분보다는, 아들과 며느리 들이 꾸려나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젊어진 헌책방입니다. 헌책방 일을 큰손으로 굴리자면 어떻게 해야 잘 되면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책도 보다가, 쇠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문제부모와 문제아동>(A.S.니일/박영실 옮김, 백록출판사,1979)을 집어듭니다. 1979년 3월 15일에 나온 책인데 '서울특별시립동대문도서관'에서 1979년 3월 31일에 제41108호 장서로 들여놓는 책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책은 서른 해가 조금 못 되게 도서관에 깃들어 있다가, '이제 오래되었으니 나가 주렴' 하고 등이 떠멀렸는가 보군요.

2층으로 올라가는 동글뱅이 계단.
▲ 쇠계단 2층으로 올라가는 동글뱅이 계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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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아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문제아의 원인이 그들의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닐지도 모르나 적어도 진리에는 가까울 것이다. 문제아가 생기는 것은 부모가 어린이의 성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모들이 자기 자신의 성질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데에서 원인이 된다 … (7쪽)

등이 떠밀린 책은 어떤 책일까 생각해 봅니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서 다 닳고 낡았기에 새로 장만하고 치우는 책인가요. 손님들이 찾지 않아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치우는 책인가요. 도서관에서 등떠밀린 책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폐지처리장으로? 폐지처리장이 아니면 어디로?

도서관 규정으로는, '폐기처분' 하는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고, 찢어서 버려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서관에 더 둘 수 없다고 해도, 이 책들을 누군가 쓸모있어 하거나 찾기도 할 텐데, 책이라는 목숨이 '새책으로 꾸준히 찍히는 판'이라면 모르지만, '판이 끊어지거나 출판사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헌책방에 내놓아 새 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다거나, 아예 도서관에서 '닳거나 낡은 책을 파는 칸'을 마련해야지 싶습니다.

… 흔히 부모들은 자기들의 불화를 어린이들에겐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런 속임수가 언제까지나 어린이들에게 통할 리가 없고 어린이들은 그 사정을 눈치채고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 (15쪽)

중국조선족이 엮은 책이 둘 보입니다. <조선족교육론문집>(연변교육출판사,1987)과 <변천의 십년>(연변인민출판사,1989). 이제 연변에서는 '변천의 삼십 년'을 낼 만한 때로군요. 오늘날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서른 해 발자취를 책으로 남긴다면, 남녘땅으로 보내는 '이주노동자'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테지요. 그나저나 몇 해 가지 않아서, 연변은 소수민족자치주가 풀릴 듯하다는데. 조선족 아가씨는 남녘으로 시집오고, 조선족 사내는 남녘 공장에 일하러 나오는 터라, 텅 비게 된 연길시는 한족들이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든요.

인터넷으로 주문한 분들한테는 책방 이름이 찍힌 상자에 담아서 보내 줍니다.
▲ 책 상자 인터넷으로 주문한 분들한테는 책방 이름이 찍힌 상자에 담아서 보내 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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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에서의 탈출>(이반 일리치/김남석 옮김, 범조사, 1979)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일리치'라는 이름 하나가 이 책을 끄집어 내어 살펴보라고 이끕니다.

… 학교와 병원 어느 쪽도 스스로 자신의 치료를 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느니, 독학으로 학습하는 것은 신빙성 없는 일이라느니 하고 있으며, 행정 당국으로부터 비용이 지출되지 않는 주민조직은 일종의 공격적 또는 파괴적 활동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 속하든 그들은 제도에 의한 보호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제도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독립적인 활동을 그들은 회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 멕시코에서는 10년 전에만 해도 자기 집에서 출생하고 자기 집에서 죽고, 그리고 친구들에 의해 매장된다는 것이 하나의 당위였다. 제도로서의 교회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영혼이 필요로 할 때만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자기 집에서 인생을 시작하고 또 끝낸다는 것은 빈곤 때문이 아니면, 어떠한 특별한 특권 중의 하나를 과시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임종과 죽음은 의사와 장의사의 제도적인 관리 밑에 있게 되었다 … (14∼15쪽)

러시아 시인 마야코프스키 삶을 다룬 <나는 죽음을 선택했다>(앤 차터즈,사뮤엘 차터즈, 신동란 옮김, 까치, 1977)라는 책을 구경합니다. <독재의 극복과 민주화>(오도넬 슈미트/한완상,김기환 옮김, 다리,1987)라는 책도 구경합니다. 죽고 없는 시인 한 사람을 다루는 이야기책 하나, 독재정권에 짓눌리던 남녘나라에서 세계 여러 독재나라 형편을 돌아보면서 쓴 책 하나.

나라안 시인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 이야기책이 있을까나. 신동엽, 김수영, 박인환, 김소월, 이상화, 서정주, … 그리고 또 어떤 시인들 삶이 이야기책으로 꾸며져 우리가 즐기고 있을까. 고은? 박목월? 글쎄나. 김남주는? 백무산은? 백석은? 정지용은? 우리는 우리네 시인들 삶을 이야기책으로 엮어나갈 자료가 제대로 있나?

손님들이 사는 책은 쪽지에 이름을 적어서, 인터넷 목록에서 지웁니다.
▲ 책이름 쪽지 손님들이 사는 책은 쪽지에 이름을 적어서, 인터넷 목록에서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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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잃어버린 우산

고른 책을 들고 셈대로 갑니다. 아저씨는 안경을 벗고 책이름을 공책에 적습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처음 만난 열 몇 해 앞서는, 말 그대로 그저 아저씨와 아주머니였는데,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입니다. 머리카락은 더 빠지거나 더 세고, 눈은 더 어두워집니다.

셈한 책을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습니다. 차곡차곡 눌러서 담은 다음 질끈 들처멥니다. 문간으로 나가 우산을 찾습니다. 어. 우리 우산이 사라졌네. 누군가 우리 우산을 슬쩍했군요. 지나가던 사람이 슬쩍했을까요. 책방 손님이 제 우산을 남기고 우리 우산으로 바꿔치기했을까요. 허허. 우산이 없어서 우리 우산을 슬쩍했는지, 우산이 있는데 제 것이 낡아서 우리 것과 바꿔치기를 했는지.

우리를 기다리는 책은 한 해도 두 해도 열 해도 다소곳하게 꽂힌 채 기다립니다.
▲ 책들 우리를 기다리는 책은 한 해도 두 해도 열 해도 다소곳하게 꽂힌 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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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에 남은 우산으로 보건대, 맨몸인 분이 가져가지는 않았고, 낡은 우산을 놓고 우리 우산을 가져갔습니다. 우리 우산이라고 해야 더 새것도 아니고, 다만 두 사람이 받을 만한 크기일 뿐인데. 이리하여 작은 우산을 둘이 받고 돌아갑니다. 큰 우산으로 바꿔치기한 사람은 재수가 좋은 하루로 여기며 살아갈는지, 바보 같은 사람을 놀려먹어서 기분이 좋다고 하며 하루를 마감할는지. 그래도, 바꿔치기한 그 우산을 오래오래 잘 아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늘어지지 않는 빗길을 걷습니다. 전철역까지 그리 먼길은 아니지만, 가방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느끼니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비닐로 싸 두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스며들면 물기가 배어들 수 있어요.

전철역에 닿아 가방을 내리고 안을 들여다봅니다. 책은 젖지 않았습니다. 한 권만 꺼내어 읽습니다. 집까지 돌아가는 먼 전철길, 비내음을 맡으며 책에 담긴 줄거리를 마음에 살포시 담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한국외대 옆 〈신고서점〉 / 02) 960-6423
http://singoro.com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태그:#헌책방, #신고서점, #신고책방, #서울, #한국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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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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